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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86화 (886/1,277)

##  886화

발렌티나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시비를 걸듯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그거나 줘 봐.”

“?”

너무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아나스타샤는 일순 당황한 듯 큰 눈을 깜빡이며 발렌티나를 바라보았으나 곧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건네주었다.

잔뜩 흔들어놓은 터라 그냥 따면 거의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요령껏 힘을 주어 캔을 살짝 따서 탄산을 날아가게 만든 다음 깔끔하게 땄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콩쿠르에 나가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으니 그에 대한 성의 표시로 캔 음료 정도는 발렌티나에게 바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뚜껑만 따선 도로 아나스타샤에게 돌려주었다.

대체 뭐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발렌티나는 강압적인 눈빛을 보냈다. 당장 마시고 이야기하란 의미였다.

“…….”

묘하게 약한 모습으로 아나스타샤는 눈치를 보며 캔을 홀짝였다.

한 마디쯤 반항할 만도 한데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니 지금 어지간히 마음이 약해져 있는가 싶다.

아나스타샤가 기어이 음료수의 반 정도를 마시는 걸 뚫어져라 쳐다 본 후에야 발렌티나가 입을 열어 물었다.

“콩쿠르 못 나갈 것 같다고 누구한테 이야기한 건 아니지?”

“누구한테라니?”

“선생님이나 다른 애들한테 말야.”

목을 축이고 나니 정신이 드는지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했어. 시간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고만…….”

“그럼 아직 할 생각이 있는 거네?”

“……생각처럼만 다 되면 세상에 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니?”

“그래도 생각도 않는 것보단 훨씬 낫지.”

일단 해 보겠단 마음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문제는 지금 이 약한 의욕의 불씨마저 꺼져버린다면 아나스타샤가 겪는 슬럼프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단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년을 통째로 날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어지간해선 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지금 겪는 문제를 일단 최소한으로 하고 참가라도 시킨다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생각한 시간은 얼마 정도 남은 거야?”

“……길게 잡아도 일주일?”

“DVD는 어떻게든 만들어 보내 놓고 내년까지 준비할 생각은 없는 거지?”

아무리 아나스타샤가 슬럼프를 겪는 중이라 하더라도 대충 1/3 정도를 뽑는 DVD 심사에서 떨어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어놓고 차분히 극복해나가는 방법도 가능하겠지만, 아나스타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발렌티나는 또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이 애가 그래도 피아니스트이긴 하네.

그럼 괜찮을 거란 듯 웃으며 발렌티나가 말했다.

“일주일 동안은 최선을 다해 보자. 할 만큼 해 본 다음에 그다음에도 안 되면 미련 없이 그만해도 되잖아.”

일주일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아나스타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진 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발렌티나는 그사이에서 일찍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국제 콩쿠르에 참가를 희망하는 피아니스트로서 이런 마음가짐은 이미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콩쿠르에 참가 안 한다고 해서 무슨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는 건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가는 사안이기도 했고, 때문에 중앙음악학교에서도 참가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차라리 가볍게 생각하는 쪽이 부담도 덜하고 아나스타샤가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발렌티나는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쿨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한참 오래 전부터 참가의사를 밝혀 왔던 발렌티나가 이렇게 말하는 건 스스로를 조금 우습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을 느낀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너한테 괜히 이런 이야기를…….”

“그럼 나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

“…….”

“더 해도 되는데.”

친구가 별로 많지 않은 아나스타샤가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상대는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하다.

발렌티나는 일부러 그 부분을 놀리듯 이야기했고 아나스타샤는 삐친 듯 대꾸했다.

“안 할래.”

“에이, 괜찮다니까?”

“안 해.”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친구를 보며 발렌티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디 마음대로 웃어 보라는 듯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참을성이 서서히 떨어져가는 것이 눈에 보일 듯이 훤했다.

발렌티나는 딱 아나스타샤가 참아줄 만한 정도에서 적절하게 웃음을 그치고는 다리를 쭉 뻗었다.

“아무튼…… 같이 바르샤바에 갔으면 하지만, 못 가도 상관없어.”

다시 한번 태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아나스타샤도 진지한 표정을 했다.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발렌티나라도 갈 길을 가줬으면 하는 눈빛이었다.

이미 여러 이야기를 하여 얽힌 부분이 많았지만, 아나스타샤는 한 번도 적극적으로 발렌티나에게 도와 달라 한 적이 없었다.

그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명백하기도 하고, 애초에 아나스타샤는 독립적인 성향으로 자신이 겪는 일들을 홀로 해결하려 하곤 했다.

물론 발렌티나도 정도 이상으로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바라지도 않은 도움은 독약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겪는 일들은 너무나 무겁고 특별했다.

발렌티나는 어떤 일이든 이해할 수 있으니 도와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만의 독단이자 편견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일은 쉽게 이해한다고 말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발렌티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천천히 해결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줄 수 있다고 약속할 수는 있었다.

“내년 콩쿠르 끝나고 5년 후에 다시 준비해도 되잖아.”

갑자기 일단 내년은 제쳐놓고 그다음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나스타샤는 진심이냐는 목소리로 물었다.

“5년…… 너무 길지 않니?”

“그래 봤자 우리 스물두 살밖에 안 된다?”

발렌티나는 헤죽 웃으며 말했다.

스물두 살에도 절대로 그 자신감을 잃지 않을 거란 믿음이 곧 지금의 자신감으로서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앞으로 우린 더 잘 해낼 수 있어.

그런 메시지를 느낀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쳐다보다 말고 갑자기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방금 선생님도 똑같은 말 했었는데.”

“그만큼 당연한 이야기라는 거지. 안 그래?”

“그럴지도.”

내년이면 열일곱 살. 그리고 5년 후면 스물두 살. 뭔가 까마득한 먼 미래처럼만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만약 두 사람이 체조 같은 것을 전문으로 했다면 내년에 정말 목숨을 걸고 커리어를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30세 나이제한인 쇼팽 콩쿠르에 다시 참가할 나이로는 스물두 살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어리다.

발렌티나의 말은 옳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제대로 된 역량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발렌티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저 멀리 창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난 상상이 잘 안 가. 스물두 살이라는 건……. 뭘 하고 있을지.”

지금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도 그때쯤이면 분명 모두 해결되었겠지만, 그걸 어떻게 해결했을지 상상하지 못하니 그 이후의 미래도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 아나스타샤에겐 계속 피아니스트일 것이란 믿음조차 약한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의 일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슬럼프에 빠졌기 때문인지.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불분명하고 불안정하게 느끼고 있었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캔을 입가에 대더니 문득 발렌티나에게 물었다.

“넌 어떠니? 발렌티나. 스물두 살엔 뭐 하고 있을 것 같아?”

“아까 말 했잖아?”

“응?”

“같이 콩쿠르 준비하고 있을 거라니까? 너도, 나도.”

발렌티나가 말하는 바는 한결같았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까지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일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두 사람 간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다시 한번 못 박아 이야기할 뿐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두 사람은 휴게실 의자에 앉은 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정말 시간이 몇 년 앞으로 흘렀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을 느끼면서 발렌티나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 안 갔으면 좋겠어?”

“시간이 가긴 가는데 그동안을 내가 안 겪으면 주어진 결과에 잘 납득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하하, 나도 잘 몰라.”

잘 이해했으면서도 발렌티나는 괜히 그렇게 말했고, 아나스타샤도 더 설명하기보단 그냥 얼버무리길 택했다.

그래도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축 늘어져 있던 것과 달리 기운을 차린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발렌티나 쪽으로 조금 다가오며 장난을 걸어 왔다.

“그런데 있잖아, 발렌티나. 스물두 살에 쇼팽 콩쿠르에 다시 도전한다는 건…… 이번엔…….”

“아!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던 건데, 그냥 넘어가나 싶었더니 아나스타샤가 이런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내년엔 자신 없는 거냐며 놀리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저주 그만 걸라며 짜증을 내던 발렌티나는 결국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일으켜 세웠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렌티나는 뭘 그렇게 보냐는 투로 말했다.

“가자. 연습하러.”

“지금?”

“그럼 지금 해야지! 시간 없다구!”

“같이 가게……?”

“네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들어는 봐야지.”

“……네 앞에서 연주하기 싫은데.”

“뭐라구?”

아나스타샤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발렌티나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노려보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발렌티나는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길 바랐다.

***

오늘도 점심을 먹자마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동시에 일어섰다. 발렌티나가 내게 말했다.

“우리 연습하러 갈게. 타티아나. 이따가 볼 수 있을까?”

“음…… 오늘은 레슨을 마치고 수학 과제도 하고 갈 생각이에요. 스터디룸에 오실건가요?”

“그럴까? 그러자.”

산뜻하게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은 연습실로 가 버렸다.

얼마 전부터였을까.

발렌티나의 연주를 연습실에서 들어 보고 그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붙어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쇼팽의 곡들을 연습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꽤 자존심도 세고 경쟁심도 있어서 쇼팽에 대해선 같이 연구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며칠 전부턴 매일같이 함께 연구하는 걸 보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영문도 모르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난 어렴풋이 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겪고 있는 음악적 슬럼프, 그리고 그다음 날 내가 발렌티나를 찾아서 그녀의 연주는 어떠한지 확인했을 때, 발렌티나가 보였던 반응.

그 후에 두 사람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모든 것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나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리며 레슨실로 향했다.

지금 난 아나스타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내게 일정선의 선을 긋는 듯한 감이 없잖아 있었고.

때문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자신만만하게 우리가 어떻게 해내는지 보여주겠노라 말해놓고도 막상 어쩔 수 없이 주위를 빙빙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발렌티나가 끼어들어선 아나스타샤를 끌고 다니며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발렌티나에게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

두 친구에게 좋은 결과가 있길 빌며 난 나대로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오늘 레슨에선 과제곡들은 일절 없이 콩쿠르에 올릴 곡들만 레슨 받을 예정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여에 정말 깊은 관심과 심혈을 쏟고 계시는 중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면 나 역시 DVD예선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많은 무대들도 충분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해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레슨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 왔구나. 타티아나.”

“왔냐.”

레슨실 안에는 미하일 선생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보는 한 친구가 더 있었다.

“레슨시간이야?”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오른손을 까딱였다. 난 한층 밝아진 그의 표정을 보며 마주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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