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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87화 (887/1,277)

##  887화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의 상태부터 살피고, 그가 괜찮다는 것을 파악한 후에야 난 조금 여유를 가지고 앞을 볼 수 있었다.

세 명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있었다. 난 차분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냐.”

“그래, 앉으려무나.”

“안녕.”

그런데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세 번의 인사가 돌아오니 어딜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치 포멀한 회의 자리에 도중에 참가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두 분이 말씀 중이신 것 같으니까 에르네스트 옆에 있을까? 그러나 에르네스트도 지금은 구세프 선생님 옆에서 대화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나도 미하일 선생님의 옆으로 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확신 없이 약간 눈치를 살피면서 살금살금 미하일 선생님 쪽으로 향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흘리시더니 말씀하셨다.

“이 녀석 레슨이 있다면…… 이야기는 이쯤 할까.”

“그러지.”

레슨 시간을 침범할 생각은 없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은 깔끔하게 말씀하시며 일어나려 하셨다.

그런데 난 사실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선생님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듣고 싶었다.

레슨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모여서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시겠다는 분을 내가 붙잡을 수는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차 한 잔 더 하고 가지 않겠나? 타티아나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뭘?”

“어떤 이야기라도.”

난 깜짝 놀란 눈으로 미하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내가 직접 하기 어려운 말을 대신 해 주었을 뿐이라는 듯 옅게 웃으셨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들어 주셨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난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선생님들께서 어떤 이야기 나누셨는지 궁금해요.”

“……그러냐.”

막 일어나던 구세프 선생님이 털썩 앉으셨다.

그사이 미하일 선생님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하셨고, 다시 레슨실 안에 훈훈한 기운이 돈다.

구세프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시더니, 이윽고 고저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별 이야기는 안 했다. 그냥 올해도 다 지나가고 있는데 네가 해야 할 일은 똑바로 하고 있는지 들어보러 온 차에 에르네스트 녀석도 왔을 뿐이지.”

“할 일이요?”

“많지 않나? 많을 건데?”

기본적인 학교 활동은 물론이고 여러 곳에서 오는 러브콜에 응대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의 한 종류였다.

그리고 중점적으로 시간을 쏟고 있는 부분은 단연 콩쿠르였다.

필요한 정보들을 모으기도 하고, 그 준비의 첫걸음인 DVD 녹화엔 가장 많은 집중력을 투자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제안한 음반 녹음까지.

“많아요.”

“그래, 뭐…… 잘 하고 있다고는 들었다. 듣자하니 음반도 내기로 했다면서?”

그 이야기는 이미 미하일 선생님에게 드렸다. 그걸 전해 들으신 듯하다.

물론 그 음반이 작년에 냈던 무명의 음반의 리메이크라는 건 정말 몇몇 사람들 말고는 모른다.

난 구세프 선생님께서도 그 내용에 대해 아시는가 싶어 물어보았다.

“예. 혹시…… 들어보셨나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

내지도 않은 음반을 어떻게 들어보냐며 인상을 쓰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니 역시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다.

작년 음반도 못 들어보신 것 아닐까?

난 음반을 내고 나서 작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진 긴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해 드릴 생각에 벌써부터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내가 가끔 선을 넘는 일들을 하면 황당해하시곤 하는데, 이번엔 얼마나 놀라실까?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흥미진진해하는 티를 너무 많이 내면 혹여나 눈치채실지도 모른다.

난 빠르게 미하일 선생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오늘도 선생님께서 저번에 짚어주신 부분들, 다시 피드백해 왔고요. 아마…… 기대하신 것과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하하하. 그거 아는지 모르겠구나 타티아나. 난 네가 기대와 다를 거란 말을 할 때 가장 기대된다는 걸.”

그러고 보니 미하일 선생님 역시 내가 특이한 일을 하면 절대 혼내거나 하지 않고 되레 응원해주시는 분이셨다.

만약 선생님이 날 결국 감당 못하겠다고 하셨다면 내가 정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난 지도 선생님만큼은 잘 만난 것 같다.

반드시 기대를 뛰어넘는 연주를 보여드리겠다는 뜻으로 미소를 짓자 선생님도 날 마주보고 웃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준비해 온 곡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는 몇 곡이더라? 까먹었네.”

“네 곡이에요.”

“적당하네.”

에르네스트는 당장 내년에 있을 콩쿠르엔 참가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기 앞에서 콩쿠르 언급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인상을 쓰고 다녔다면 난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미리 염두에 둔 에르네스트는 일부러라도 스스로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려고 했다.

내가 특별히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난 그러한 배려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반대로 그에게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을 놓치지 않았다.

“저기 에르네스트는…… 요즘 어떠신가요? 상태는?”

“얼마 전에 봐서 알잖아? 좋아지고 있어.”

“오늘은요?”

“어제보다 더 좋아.”

그는 괜히 왼쪽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했지만 정말 괜찮지 않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다음 달엔 슬슬 통원으로 바꿀까 해. 학교에도 나오고. 언제까지 병실에만 틀어박혀서 곡만 쓰고 있을 순 없잖아.”

“깁스를 풀 때까지만이라도…….”

“물론 이러고 다니면 귀찮게 굴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난 신경 안 써.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나보단 너한테 관심이 많지 않아? 전에 왔을 땐 기자들이 아예 학교 앞까지 찾아왔다고 했었고.”

에르네스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들이 학교로 찾아왔다는 것에 대해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냥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이미 겪어 본 일들이기 때문인 걸까.

대수롭잖게 말하는 그를 보며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요즘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인터뷰했었어요…….”

“응. 그것도 봤어.”

“어,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야 그냥 아무데나 다 나오던데.”

난 인터뷰 등을 하고 나서 이후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조금 익숙해졌지만 그걸 다시 확인하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내가 한 말이나 사진 등을 다른 곳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부끄러웠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에게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더 이상 듣기 힘들다는 뜻으로 귀를 막으려고 하자 에르네스트는 장난기가 샘솟았는지 슬그머니 더 다가오며 물었다.

“텔레비전 출연해 달라고는 안 해?”

“……안 나갈 거예요.”

“왜?”

“나중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이라도 하면 나갈게요.”

그 정도 되는 규모의 콩쿠르에서 우승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겠지. 그 전엔 생각 없었다.

자꾸 물어보면서 괴롭히지 말란 눈빛으로 째려보니 그는 이쯤 하겠다는 듯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즐거워하는 기색은 그대로였다.

“그거 재미있겠는데.”

“재미요?”

“아니, 그냥.”

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난 쓸데없는 일에 넘어가진 않겠다는 의사를 똑똑히 표시했다.

에르네스트는 짧게 웃더니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며 말했다.

“아무튼…… 네가 바쁘게 잘 하는 만큼 나도 열심히 해봐야겠어.”

“치료와 재활에 집중해주시는 거죠?”

“그건 기본이고. 요즘은 작곡 열심히 하고, 공부도 하고 있지. 기말 시험은 쳐야 할 것 아냐?”

“시험 치시려고요?”

“그럼 안 쳐?”

내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 아직 여기 다니고 싶은데?”

치료와 재활에 1년 가까이, 그리고 완벽하게 피아노 앞으로 복귀하기까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1년하고 반 정도밖에 안 남은 중앙음악학교 생활은 사실 그에게 있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피아노를 못 치더라도 학교에 나와서 수업을 받고 시험을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생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 듯했다.

난 그가 그런 마음을 가져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렇네요. 후후.”

“뭐…… 뒤쳐지지 않으려고 해도 이번 학기 수석은 네가 가져가겠지만.”

“빼앗아 보세요.”

“어떻게? 너 어차피 바쁜 와중에도 최선을 다 할 거잖아. 아니면 봐줄 거야?”

“절대로 안 봐드리죠.”

“이거 봐.”

단호하게 대답하자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킥킥거렸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는 그 나름대로 가야 할 방향을 잘 찾아가고 있다는 직감이 든다.

난 조금 더 안심하며 차분하게 에르네스트를 응원할 수 있었다.

당장 잘할 수 있는 건 아마 작곡이려나?

그의 작곡 실력은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라 파리 음악원의 교수님에게도 인정받은 바 있었고, 무대에서 초연된 작품들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작곡가로서 이미 그는 충분한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재활과 함께 작곡에 열중하는 건 정말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렇게 마음먹은 지 3초도 되지 않아서 그가 부탁해 왔다.

“그러니까 나 오늘은 견학할 수 있게 허락해 줬으면 해. 타티아나.”

“……예?”

“이제 레슨 해야 하잖아? 저기서 볼게.”

같은 곡으로 피아노 연구를 하면서 레슨을 견학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 역시 그의 레슨을 구경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곡에 집중할 것처럼 이야기하던 그가 내 레슨엔 왜 신경을 쓰는지 잘 모르겠다.

“마음대로 하세요…….”

“고마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 싶다고만 하더라도 난 딱히 그의 요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신곡을 가지고 와서 초견으로 곧장 연주해 달라고 해도 해 줄 의욕이 잔뜩인데, 레슨을 견학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네스트는 싱긋 웃더니 이번엔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딱히 오늘 저랑 뭐 더 할 것 없으시죠? 선생님.”

“이 녀석이 말을 해도…….”

구세프 선생님은 버릇없는 말투가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썼지만 결국 작게 턱짓하며 말씀하셨다.

“없다. 뭐, 네가 견학이나 할 생각이라면 나도 보고 갈련다.”

그리고 선생님은 앉아 있던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고, 에르네스트도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그가 손을 밑으로 향했다.

“그럼 앉으시죠.”

“네가 앉아라.”

“저 환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앉으시죠.”

“나도 노인네 아니다. 네가 앉아.”

두 사람은 의자 하나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의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저기 미하일 선생님이 앉아 계시던 사무용 의자도 있으니 거기 앉아도 되련만, 두 사람 눈에는 피아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간이 의자만 의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무도 앉지 않고 멀쩡한 의자를 두곤 둘 다 서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괜히 왜 고집을 부리며 잔뜩 긴장감을 끌어 올려 놓고는 화살끝을 내 쪽으로 돌리는지 모르겠다.

조금 억울한 기분으로 머뭇거리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이 상황이 재미있으신지 크게 웃으시더니 레슨용 피아노 앞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그럼 레슨 시작할까? 타티아나. 저기 두 사람은 없는 사람이라 치고.”

“…….”

그 누가 있더라도 신경을 안 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심지어 옆의 두 사람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피아노 선생님인 구세프 선생님과, 피아노 연주자로선 물론이고 작곡가로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에르네스트였다.

흡사 콩쿠르 심사를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긴장감이 주어지자 내 손가락은 보다 빠릿하게 반응하면서 순식간에 건반을 만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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