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88화 (888/1,277)

##  888화

옆에선 구세프 선생님과 에르네스트가 보고 있다.

지금 입장을 바꾼다면 이 레슨이 어떻게 보일지 떠올려보았지만, 나 혼자선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난 그 기분에 잠식되기 직전에 빠르게 다시 눈앞의 피아노에 집중했다.

직접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생각하다간 슬럼프에 빠지고 말 것 같단 직감을 느꼈다.

두 사람 앞에선 아무것도 못 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가 겪는 슬럼프는 나 역시 똑같이 겪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도 모르게 흔들려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 충분히 상황과 입장 등을 고려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모두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바라는 건 피아노 연주자로서 제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뿐. 내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것뿐이다.

내가 준비가 되었다는 듯 미하일 선생님을 돌아보자,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일단 녹음용 연주부터 볼까.”

“예.”

긴 이야기가 오갈 것도 없었다.

레슨의 진행에 대해선 세상의 수많은 사제들만큼이나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인 형태라는 것은 존재했다.

그중 가장 흔한 방식이라면 일단 학생이 준비해 온 과제곡을 쭉 연주한 다음, 선생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치 테니스를 하듯 짧은 구간들을 주고받으며 착실하게 해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이었다.

끊어지지 않도록 학생이 랠리를 잘 받아나간다면 그 레슨은 조금 더 길어지기도 하고, 중간에 도저히 받지 못하고 연거푸 실수한다면 그 구간은 혼자 해 와야 하는 숙제로 남는다.

나와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도 그 형태는 평범하고 흔한 케이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속도가 조금 빠른 편이다.

“…….”

난 건반 없이 페달을 꾹 눌러보며 감각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 공간과 피아노를 파악하는 데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름의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때문에 진짜 콩쿠르 무대의 심사위원이라고 생각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최선을 다해서 한 곡을 연주하고 나니 선생님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한 말씀만 하셨다.

“다음은 열고 해 보자꾸나.”

“예.”

선생님이 피아노를 만지는 일도 없고 악보를 짚으며 지적하는 일도 없었다. 단지 이번엔 창문을 활짝 열었을 뿐이다.

찬바람이 휙 불어온다. 거의 영하에 가까운 추위가 순식간에 온기를 빼앗아간다.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서서히 허리를 폈다.

예전 같았으면 이것만으로도 난 제 컨디션을 못 냈을 것이다. 냉증이 있는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금방 기침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았다. 찬 공기가 적당히 내 몸을 식히며 이 공간을 느끼는 내 감각을 보다 넓혀주었다.

살짝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문이 열린 것만으로도 이곳의 조건은 완전히 바뀌었다.

닫히지 않은 공간의 공기는 쉽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무겁다. 이 공기를 정교하게 진동시키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기악 연주자들은 주어진 공간 조건에 적합한 음질과 음량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난 그 부분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 연구와 연습을 거듭해왔고, 지금은 피부로 느껴지는 아주 미세한 차이도 구분하여 세심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신경을 집중하여 몸을 움직인다. 건반을 조금 더 과감하게 쓰고 페달에도 여유를 주었다.

이전의 해석과 살짝 달라졌지만 마이크가 아닌 홀을 매개로 하는 무대를 상정한 연주에선 이 정도의 사운드가 필요하다.

내가 다루는 음악은 꿈틀거리며 변화했다.

“…….”

한 번의 미스도 없이 똑같은 곡을 다른 조건에서 연주했다. 난 연습해 온 것을 잘 전달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내 만족은 선생님의 만족이기도 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일어나셔선 곧장 창문부터 닫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말했던 대로 기대 이상의 완성도구나. 네 나름의 해석이 기틀을 확실히 잡았다는 게 느껴져서 기쁘단다. 아주 기발한 울림이었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된 무대나 스튜디오에서 연주한다면 훨씬 더 강렬하게 살아나겠어. 우선 녹음부터 확인하는 게 좋겠지?”

“예.”

“이대로 해서 다음에 가져오너라. 들어보자꾸나.”

닫힌 공간이라는 비슷한 조건이긴 했지만 이 레슨실과 최고급 녹음 부스는 그 사운드가 완전히 다르다.

미하일 선생님은 녹음된 파일까지도 꼼꼼하게 확인해주려 하셨다.

그렇게 첫 번째 한 곡은 두 번의 연주로 깔끔하게 끝냈다.

앞선 곡의 잔향을 지워버리듯 곧 연습실 안에 침묵이 가라앉으며 모든 소리를 잠재웠다. 난 그 위로 두 번째 곡을 흘려보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다. 손가락을 조금 풀어 가볍고 선명하게 물결을 그렸다.

닫힌 공간에서의 파동은 쉽게 뭉개지고 흐려진다. 난 모든 것을 고려하여 다시 소리를 빚는다.

연주가 끝나고, 이번엔 짚어주실 부분이 있는지 미하일 선생님이 건반 위로 손을 올리셨다.

“이 부분만 살짝 들어보겠니.”

그리고 선생님은 내가 연주했었던 한 구간을 빠르게 연주하셨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등의 주문은 없었다.

선생님은 그저 내 연주에 조금 더 깔끔하게 들어맞는 퍼즐 조각을 하나 제안하셨을 뿐이다.

난 잠시 생각 후에 선생님이 건네주신 조각을 그대로 똑같이 연주하여 내 연주에 끼워넣어 보았고, 그것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선생님은 내 음악에 그리 깊게 간섭하지 않으신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일만 없다면 어지간해선 자유롭게 두시는 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로운 음악을 존중해주시는 선생님이 가끔 제안하시는 음악은 단순히 취향으로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 순간 필요한 음악이었다.

고도로 집약된 연구가 농축되어있는 한 방울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수십 년 동안 만들어낸 한순간을 난 지금 이어받은 것이다.

제가 제대로 잘 전수받은 게 맞나요?

다시 연주를 마치고 돌아보자 미하일 선생님은 말없이 환한 미소만 보이셨다.

창문을 열고 하는 다음 반복 연주에서 선생님은 내게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으셨다.

물론 다음에 다시 곡을 준비해 올 땐 보다 더 깔끔하게 만들어 와야겠지.

선생님께서 바로 인정해주셨다는 것엔 보람과 기쁨을 느꼈지만, 난 절대로 여기에서 만족하여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발전한 완벽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시간을 확인하시더니 웃으며 말씀하셨다.

“잠깐 쉴까? 타티아나.”

“전 괜찮아요.”

“그럼 계속 가 볼까.”

선생님도 흐름이 끊기는 건 싫으셨나 보다.

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다음 곡을 떠올렸다.

최근 집중적으로 다루는 곡들은 열 곡도 넘는다. 예선과 본선은 물론이고 예비로 준비하는 곡들도 많은 까닭이다.

잘 정돈해 놓지 않으면 그 곡들은 전부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얽히며 내 신경을 분산시켜버린다.

가장 처음으로 건반을 짚는 자세 자체를 기억하고, 그대로 손을 내린다.

그 순간 머릿속에선 다른 선율들이 잠잠해지고 한 음악만이 고개를 든다.

세 번째 곡이 연습실에 천천히 깔리기 시작한다.

“…….”

일반적으로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번에 레슨받기에 적절한 곡은 많아 봐야 두 곡 정도였다.

내면화한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와 달리 내면화 그 자체에 집중하는 레슨 시간엔 그만큼 소모되는 집중력과 체력이 크다.

한 곡만 하더라도 짧으면 5분에서 길면 30분까지도 가는데, 몇 번만 반복하며 음악을 주고받다 보면 정말 순식간에 시간이 전부 흘러버린다.

심도 있게 파고들어야 할 곡이 세 곡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학생 입장에서도 부담이 크고 선생님 입장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제대로 곡을 파고들지도 못하는 비효율적인 레슨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여러 곡을 준비해야 한다면 차례대로 준비하고, 레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성된 곡은 혼자 연습하면서 알아서 가지고 가는 것이 평범한 방식이었다.

나와 미하일 선생님도 처음엔 그렇게 했었다.

하지만 난 연주자로서 빠르게 복귀하려는 욕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준비에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레슨 시간엔 빠르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하일 선생님 역시 내게 필요한 교육들만 중점적으로 짚어주시면서 레슨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 곡만 가지고는 내가 레슨받은 것을 이해하고 다음 준비를 해 올 때까지 할 것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딱 10분 만에 끝내버리고 멍하니 있다 보면 당연히 다른 곡도 봐 주겠단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지금 난 서너 곡 정도는 한 번에 레슨을 받아도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말이 잘 통하고 레슨 방식도 잘 맞다 보니 이렇게 여러 곡을 쥐고 있어야 하는 콩쿠르를 준비할 땐 그것이 큰 장점이 되었다.

“…….”

레슨을 모두 끝마치기까진 1시간 남짓 걸렸다.

예선용으로 준비한 곡들과 본선에 올릴 두 곡을 레슨받았는데도 정해진 시간보다 빠르게 끝난 것이다.

물론 긴 소나타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속도엔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구세프 선생님도 혀를 내두르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난치는 줄 알겠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 추운 날씨에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질 않나 딱히 지시도 없이 반복해서 연주하질 않나, 조금 이상해 보일 것 같단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1시간을 보낸 난 이전의 나와 또 다른 음악을 분명하게 손에 쥐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니 구세프 선생님과 에르네스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하며 날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엔 에르네스트가 한 깁스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지금 얼마나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을까.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은 마음이 아주 조금 들자마자 심장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먼저 레슨을 견학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또 아무 말 없이 차분히 들어 준 그에게 내가 먼저 아픔을 전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아픈 걸 참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일 테니까.

정말로 내가 두 사람을 이해하고 생각한다면 침착하게 목적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목 밖으로 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눌러 참으며 물었다.

“견학할 만한 보람이 있었나요?”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어.”

피아노 연주자로서인지 아니면 작곡가로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무언가 느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아쉬움이나 상실감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요청에 응해 준 내게 향하는 고마움과, 음악을 향한 의욕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 강인함을 새삼 느끼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이런 레슨을 할 줄은 몰랐어. 우리 선생님은 고지식한 분이라 한 번에 한 곡도 똑바로 못 할 거면 다음 건 시작도 말라는…….”

“시끄럽다. 에르네스트.”

두 사람은 예전에 했던 레슨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는지 또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레슨을 못 한 지도 꽤 되었겠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에르네스트라면 반드시 복귀해서 레슨을 받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지금 이 레슨실엔 자리하고 있었다.

난 그 믿음에 힘을 조금 보태었다.

“다음엔 에르네스트의 레슨도 견학하게 해 주세요.”

“응?”

“아셨죠?”

이미 소원과 약속 등으로 그를 묶어 놓았다는 걸 알면서도 난 다시 한번 그렇게 약속해주길 요구했다.

이건 정당한 거래이기도 하니까, 그가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에르네스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레슨을 마무리 짓자마자 먼저 자리를 정리하신 건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대충 볼 일은 다 봤다는 듯 바로 코트부터 챙겨 든 선생님은 에르네스트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난 가마. 다음에 보자.”

“다음에요?”

“딱히 오늘 할 것 없지 않냐고 했던 건 네 녀석 아니었나?”

레슨 전에 들었던 말을 시큰둥하게 되돌려 준 구세프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휙 저었다.

“친구들이나 더 보고 가든가 해라.”

“…….”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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