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9화
레슨을 마치고 노트나 악보에 적을 필요도 없었다. 난 이미 모든 것을 음악으로 받아들인 후였다.
다만 그 외에도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서, 미하일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다.
“곡은 이쯤하면 되겠지. 녹음 샘플을 들어보는 것도 다음까지 해 올 수 있겠니? 타티아나.”
“예. 가능하다면 오늘 바로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 해 올게요.”
“하하하.”
레슨은 이틀 뒤였지만 빨리 해도 괜찮은 일은 굳이 미룰 필요가 없었다. 바로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해서 시간을 잡아 볼 생각이다.
지금 막 손에 쥔 이 음악을 음반에 녹음해서 스피커로 틀면 또 어떤 소리로 들릴지 나 역시 기대하는 바가 컸다.
방금 레슨을 마쳤는데도 손아귀가 근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전화부터 할 기세를 보이자 미하일 선생님은 껄껄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셨다.
“시간이 많다고 할 순 없겠지만…… 너무 급하게 하진 말고. 여유를 가지고 하거라. 타티아나.”
딱히 성급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의 눈엔 그래도 내가 콩쿠르 준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시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편안하게 말씀하시며 내 어깨와 팔에 붙어 있던 무언가를 가볍게 털어내 주셨다.
그저 그뿐만인데도 마음이 훨씬 차분해짐을 느낀다.
내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 미하일 선생님은 책상으로 돌아가선 안경을 쓰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 레슨 시간에 보자.”
“예, 선생님.”
난 예의를 갖춰 인사했고, 에르네스트도 내 뒤를 따랐다.
그가 코트를 챙겨들길래 도와줘야 하나 싶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깁스를 한 왼팔을 코트 소매에 넣지 않고 그냥 어깨에 걸쳐버렸다. 오른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코트를 그냥 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니 저래선 추위보단 멋에 더 신경을 쓴 느낌이다.
본인이 상관없다면 괜찮지만…… 그래도 거의 영하권의 날씨이니 추위를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에르네스트는 추위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복도로 먼저 나갔다.
“…….”
살며시 레슨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그는 옆에서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무언가 하는 것 같진 않고 시간을 보고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살짝 다가가서 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
“응?”
“바로 돌아가실 것 아니죠?”
구세프 선생님께서 일부러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바로 가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마치 괜찮다는 대답을 강요하듯 올려다보았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글쎄. 넌?”
“저요?”
“그래. 이후에 일정 어떻게 되는데?”
갑자기 거꾸로 질문을 받으니 살짝 헷갈렸다. 오늘 내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던 레슨이 방금 바로 끝나버린 탓이었다.
잠시 주춤하자 그가 자신의 질문에 알아서 대답을 덧붙였다.
“아까 들으니까 스튜디오에 간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음…… 어디로 가는데? 에우테르페 레코즈?”
“예, 그렇죠?”
“그런 거면…… 나도 지금 생각해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물어볼 게 있긴 한데.”
“정말요?”
“응. 작곡 관련해서. 그분은 특히 디지털 장비를 다루는 데엔 프로잖아.”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실 프로듀서와 연주자의 입장보단 작곡가 대 작곡가의 입장에 가까웠다.
컴퓨터를 사용한 작곡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신디사이저를 선물해주기도 한 이후로 가끔 만나서 도움을 주고받거나 작업물을 교류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에르네스트는 프로듀서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복도 저편으로 까딱였다.
“지금 가는 거면 같이 가고.”
나 역시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가야 할 상황이라면 가는 길에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편할 테니까. 뒷좌석엔 늘 자리가 비어 있다.
그리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테고, 각자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 역시 내가 책임지고 병원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들떠서 그런 생각을 하던 난 덜컥 하며 마음 속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 역시 나와 같은 기분으로 같이 가자고 권유한 것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분명 즐거울 테니까. 하지만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움직여도 되는 건가.
음악에 집중하면서 멀리 미뤄놓았던 복잡한 이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입을 틀어막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어놓는다.
때문에 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에르네스트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가볍게 말했다.
“녹음하는 데 방해같은 거 안 할게. 그냥 이야기만 조금 하고, 네가 녹음하는 거 구경만 할 거야. 어차피 부스 안이니까 방해도 못 하잖아.”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든다.
그는 단지 음악가로서 내 연주를 견학했었고, 거기서 무언가를 얻어내었다.
이어서 스튜디오에서도 음악가로서의 일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었다.
내가 거기에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미뤄야 할 이유가 한 가지 있긴 했다.
점심을 먹고 아나스타샤 그리고 발렌티나와 헤어지면서 이따 보자고 했던 약속이 기억났다.
그냥 인사치레였다고 생각하고 메시지로 내일 보자고 해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난 되도록 친구들과 한 약속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음, 지금 말고 이따 조금 늦게 가면 안 되나요? 일정이 있으신가요?”
“일정? 아니? 전혀.”
“그럼 방과후에 같이 가요.”
에르네스트는 어쨌든 스튜디오에 가기만 한다면 별 상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난 괜히 더 변명하듯 말을 이어 붙였다.
“저희 일도 중요하지만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잖아요? 그리고…… 오랜만이지 않나요? 학교에 오는 것.”
“그렇긴 한데.”
“그럼 스터디룸에 잠깐 앉았다가 가세요.”
난 목소리로 그를 잡아끌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올 거예요. 다른 분들도 계실지도 모르고. 모두들 에르네스트를 보고 싶어 해요.”
그는 학교에 오더라도 수업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오후에 잠깐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만 보고 돌아가는 일도 많았다.
난 그의 병문안도 자주 가는 편이니 상관없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섭섭하게 느낄 만도 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에르네스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까.”
우린 거의 동시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스터디룸으로 향하면서 말없이 한참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어깨에만 걸친 코트는 망토처럼 자유롭게 휘날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이 없는 소맷자락이 힘없이 펄럭인다.
난 괜히 불안해할 필요는 없음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옆에 다가섰다. 얼굴을 보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는 마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옆에 선 날 보더니 물었다.
“그 애들도 연습 잘 하고 있지? 어때? 네가 보기엔.”
지금 그가 물어볼 만한 친구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둘뿐이었다.
스터디룸에 모이는 또 다른 두 친구인 한승우와 리처드는 내년 국제 콩쿠르에 나가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난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움찔했다가, 일단 그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이야기부터 천천히 꺼냈다.
“며칠 전에 발렌티나의 연습을 본 적이 있었어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쇼팽 연주는 정말로 훌륭했다.
지금까지 여러 회차의 쇼팽 콩쿠르를 봐 오면서 분석한 종합적인 수준과 그녀가 쥔 음악의 완성도를 가늠해본다면, 예선은 무난히 통과하고 본선 역시 어렵잖게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선은 정말 세상 어떤 천재들이 나와 자웅을 겨룰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감히 예측하기 힘들지만.
당연히 직접 말하기엔 너무 건방진 말이었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부끄러워져서 난 얼른 덧붙였다.
“주제넘은 평가이지만요.”
“그 정도면 충분히 겸손한 것 아니야? 수상할 거라고 장담한 것도 아닌데.”
“진심을 말씀드리자면, 수상하면 좋겠네요.”
“그래, 나도 그래.”
에르네스트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경쟁자들이 만만찮을 테니. 쉽진 않을 거야. 일단 아나스타샤부터 어마어마한 실력자니까.”
“…….”
“왜 그래?”
아나스타샤의 이야기가 나오니 내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상함을 알아챈 에르네스트가 내게 물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까? 어차피 지금 발렌티나가 옆에 붙어서 계속 같이 연습해 주고 있으니 금방 좋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도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갈 때 보인 모습은 꽤 급해 보였다.
무언가 진전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급하게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여러 생각이 들어 복잡했다. 그러나 이 생각들을 전부 털어놓고 상담할 순 없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질 알면 알수록 에르네스트에겐 전달할 수 없었고, 난 그녀와 매듭지었어야 할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에르네스트가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하도록 둘러댈 만한 기술이 내겐 없었다. 결국 난 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응?”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나요?”
난데없는 말에 에르네스트가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그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장난으로 듣지 않겠단 눈빛이었다.
“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많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만 내가 믿는 건 우리들을 이어주는 어떠한 관계가 결코 틀린 길로 향하진 않을 거란 것뿐이었다.
난 늘 불안함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늘 믿음과 책임감으로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었다.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뿐이다. 난 조심스럽게 그에게 청했다.
“아나스타샤에게 힘내라고 한 번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정말 이런 것이야말로 주제넘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아니, 잠깐만. 무슨 말인지 설명부터 해 줘.”
“…….”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작정 부탁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난 내가 직감하거나 연주에서 받아들인 복잡한 인과 등을 말하지 않고 그저 현상만을 그대로 전했다.
“아나스타샤의 피아노에서 무게감이 전부 사라졌어요. 슬럼프인 것 같아요.”
“……진짜?”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으며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 전 연주회를 떠올리는 듯 눈을 살짝 찡그리던 그는 다시 생각해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저번에 들었을 땐 괜찮았는데.”
“무대에 오르는 건 같이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지난 연주회에서 아나스타샤의 옆엔 콰르텟의 사람들이 있었고, 2부는 내가 혼자서 전체를 맡기도 했다.
그녀는 책임감으로 무대에 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미하일 선생님께선 내게 책임감으로 무대에 서는 일은 피하라고 조언해주셨던 적이 있었다.
난 다행히 그 후로 세연과 에르네스트에게 힘을 얻어 보다 진취적인 목적을 지니고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섰던 아나스타샤에겐 그 후폭풍이 닥쳤다.
쇼팽 콩쿠르에 설 목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나스타샤의 소리는 완전히 흩어져 있었다.
발렌티나가 힘을 써 줘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사실 그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 콩쿠르는…… 애를 먹는 것 같네요.”
난 그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듬성듬성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에르네스트는 그 애가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 않았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슬럼프에 가장 큰 열쇠로 가까이하고 있는 건 에르네스트밖에 없었다.
“생각 좀 해 볼게.”
그는 짧게 이야기하고는 삐딱하게 서선 깁스 위를 툭툭 쳤다.
조용히 기다리면서 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 위로 점점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는 지금 화를 내기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난 황급히 말했다.
“에르네스트. 미안해요.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그냥 제가 이야기해 볼…….”
“아니야. 괜찮아.”
에르네스트는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며 태연한 척했으나, 난 그 태도 뒤에서 많이 화가 났음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괜한 소리를 한 걸까.
그냥 지금이라도 나가자고 해야 하나.
난 정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