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0화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도록 갈무리한 에르네스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난 노심초사하며 그 뒤를 따랐다.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다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모두의 인내심 덕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일을 혼자 안고 가기로 결정했고, 그렇다면 우리 역시 협조해줘야만 했다.
강하게 버티며 곁에 있어줬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피아노 소리는 결국 방향성을 잃어버렸고,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은 것 같았다.
“…….”
에르네스트에게 상황을 알린 건 내게 뾰족한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난 발렌티나에게 아나스타샤를 맡겨 놓은 상태였다. 며칠 더 지난다 하더라도 무언가 방법을 찾아내진 못했을 것 같다.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이 상황을 알고 약간이나마 아나스타샤에게 동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해결책이 되리라 불식간에 떠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단순히 돕고 싶단 생각보단 아나스타샤에게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에게 알린 게 괜한 일이 되어버린다.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을 준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중간에서 내가 잘 버텨주었어야 했는데, 지금 그 역할을 잠깐 놓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단 직감이 든다.
‘어쩌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며 난 여러 상황을 상정했다. 아마 에르네스트도 스터디룸에서 바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가 늦게나마 적극적으로 말려야 할 테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생각하면 할수록 목이 뻣뻣하게 굳고 생각들이 뒤엉키는 기분이 든다. 난 다만 멈춰 서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발을 앞으로 옮겼다.
그렇게 스터디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에는 리처드와 류보비가 책을 가운데에 놓고 있었다.
리처드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그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류보비도 뒤늦게 반응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선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에르네스트 오빠!”
“안녕.”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에르네스트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면서 말했다.
“잠깐 얼굴 비추러 왔어.”
“아직 등교하시는 건 아니고요?”
“그건 조만간.”
정해지지 않은 약속일 뿐인데 그 말만으로도 류보비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에르네스트가 사고를 겪은 후로 류보비도 꽤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근래 들어 몇 번 에르네스트를 보고 나서야 많이 안도한 것 같았다.
절대로 힘들다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에르네스트는 옅게 웃더니 책상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리처드 오빠가 수학 숙제 가르쳐 주고 있었어요.”
“오.”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소리를 낸 에르네스트는 곧 짓궂게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네가 애들 가르쳐주기도 했던가?”
“2년은 된 것 같은데. 너 기억력에도 문제 있는 거 아니냐?”
“글쎄? 기억력 테스트라도 해 볼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리처드의 말은 조금 도를 지나치기도 했지만, 되레 친밀하게 굴었다면 더 어색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리처드가 예전부터 말도 잘 못하던 한승우를 도와주던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에르네스트가 한 번 본 악보를 거의 정확하게 외워버릴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을 지녔다는 걸 안다.
때문에 여기 있는 누구도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분위기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장난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안 티격태격하던 것도 잠시, 리처드가 장난은 이쯤 하자는 듯 말했다.
“일단 거기 앉아. 그냥 서 있다가 갈 거 아니면.”
“…….”
이전 같았으면 리처드도 절대로 이런 장난에서 져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깁스를 하고 있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이 눈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늘 아랑곳 않고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리처드도 꽤 예리함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제안에 에르네스트는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보이지 않는 시소를 타듯 리처드가 일어서선 자연스레 전기포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잠깐 정도는 서비스해 주겠다는 태도였다.
“잠깐 쉬었다가 하자. 류보비. 차 뭐 마실래?”
“네! 전 캐모마일이요!”
“타티아나도?”
“예.”
“알았어.”
에르네스트의 주문은 듣지도 않고 그는 바로 물부터 끓였다.
당연히 자존심이 강한 에르네스트도 그에게 차를 부탁하지 않았다.
하여간 두 사람 다 왜 이러나 싶다가도,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
그러나 이 광경에 즐거워하는 건 잠시뿐이었다.
지금은 리처드와 류보비밖에 없어서 에르네스트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휩쓸려도 별말 않고 있지만, 이따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오면 그때부턴 정말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지금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들이 오가고 있을지 상상이 잘 안 간다.
혹시 아나스타샤가 오자마자 다짜고짜 콕 짚어 슬럼프에 대해 묻진 않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등허리가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건 차를 끓이던 리처드에게도 보인 모양이다.
그는 찻잔을 몇 개 닦아 내려놓고는 물이 끓는 동안 잠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메시지가 왔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난 순간적으로 리처드 쪽을 쳐다볼 뻔했다가, 그가 말로 묻지 않고 메시지로 물어본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답장했다.
[아직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안 오신 거죠?]
[응.]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지?
지금 아나스타샤가 슬럼프인 상태고, 그걸 알게 된 에르네스트가 어떤 이유로 화가 나 있다는 걸 리처드에게 메시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난 더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에르네스트에게 알린 것이 잘못이 아닐까 싶어 살짝 후회 중이다.
당연히 리처드에게까지 모든 걸 이야기하자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리처드까지 화를 낸다면 정말로 감당이 안 된다.
때문에 살짝 겁이 난 나는 그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고 스마트폰 화면만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내가 한참이나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답장을 하지 않자 리처드가 다시 물었다.
[뭔데 그래.]
일단 그냥 넘어가긴 글러버린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상황을 수습하게 될 일이 생기더라도 리처드에겐 미리 언질을 줄 필요성을 느꼈다.
놀라지 않도록 조금만 이야기해 주더라도, 그는 눈치가 빠르고 노련한 부분이 있으니 현명하게 잘 대처할 것 같았다.
[이따가 두 사람 왔을 때…… 혹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제가 끼어들 수도 있어요. 그때 류보비를 부탁드릴게요.]
[?]
[별일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염두에 두셨으면 해요.]
일단 이렇게 말해 놓으면 리처드가 끼어들어서 같이 싸우거나 하진 않겠지. 그렇게만 해 주어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리처드는 그 후로 답장이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더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손끝에서 힘이 스르륵 빠진다.
난 도대체 뭐 하는 걸까.
본의가 아니었지만 에르네스트를 자극해서 신경 쓰게 만들고, 리처드까지 끌어들였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자신의 슬럼프가 다른 누구에게 더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을 테지.
그녀를 위한 생각이었지만 만약 더 악화되기만 할 뿐이라면, 난 정말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실망할 것 같았다.
“…….”
일단 지금까지 상황은 어쩔 수 없으니, 늦게나마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직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잠시 후, 리처드가 찻잔들을 각자 앞에 가져다주었다.
“차 마셔.”
“……뭐냐 이거. 나도 캐모마일이야?”
“그래. 넷 다 캐모마일이야.”
“왜?”
“귀찮아서.”
리처드는 별 의미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지만 어쨌든 차를 타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는지 별말 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보통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이럴 때 홍차나 커피를 마시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카페인을 더 마셔서 좋을 것이 없기도 하다.
리처드가 내 쪽으로 슬쩍 눈짓했다.
캐모마일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되는 허브차라는 건 그도 잘 안다. 내가 보낸 메시지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한 걸까.
“…….”
그리고 정말 캐모마일의 효능이 있었는지 에르네스트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눈에 보일 정도로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한풀 죽은 눈빛으로 찻잔을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눈에 힘을 주더니 다시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야, 리처드. 너 여기 다른 거 더 탄 건 아니지?”
“타긴 뭘 타.”
“그냥 카페인이 없어서 그런가. 잠 오네…….”
그 말에 난 깜짝 놀라 리처드를 보았다. 설마?
하지만 그는 진짜로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처음엔 혹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의심과 걱정의 눈초리로 에르네스트를 유심히 바라보던 난, 이윽고 그가 정말로 그냥 피곤했을 뿐이라는 걸 눈치챘다.
긴 치료로 그 역시 계속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신경이 과열되어 있었을 터였다.
스스로 잘 느끼진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자신을 과하게 다루는 경향이 약간 있었다.
같은 음악가로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종종 지치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곤 하니까.
하지만 이럴 때만이라도 조금 편안하게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며 차만 마셨다. 난 측은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살짝 제안하려 했다.
“에르네스트, 정 피곤하시면 잠시…….”
그런데 막 말을 거는 타이밍에 스터디룸 밖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난 그 소리를 듣자마자 두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약속했던 대로 연습을 마치고 스터디룸에 모였다.
두 사람은 에르네스트를 보고는 조금 놀라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발렌티나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다들 안녕!”
리처드와 류보비가 그 인사를 받아 손을 흔들었고, 막 졸기 직전이었던 에르네스트는 자세를 일으켜 세우며 인사를 받았다.
아나스타샤도 그를 보고는 인사해 왔다.
“간만이네. 에르네스트.”
“……그런가. 저번에 왔을 때 보고 나선 처음이지?”
자연스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바로 에르네스트의 옆에 앉았고, 이어지는 대화는 이렇게 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무던한 어투로 아나스타샤가 그의 안부를 물었다.
“팔은?”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렇지. 큰일이니까…….”
씁쓸하게 중얼거리긴 했으나, 아나스타샤의 목소리는 꽤 안정되어 있었다.
생각처럼 그렇게 어려워하거나 이야기를 피하려고 하진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조금 나아졌을까?
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에르네스트를 중점으로 이야기해 나갔다.
“우선 올해 보내고…… 내년도 지나가면 훨씬 좋아지지 않겠니.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 에르네스트.”
“그래,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었어. 내년 내내 재활만 해야겠지.”
일단 외적으로 아나스타샤는 이미 태도를 잘 정리해서 에르네스트를 대하고 있었다.
다만 피아노에 있어서 날카롭게 갈아놓은 창을 쓸 곳이 없어지자 슬럼프에 빠졌을 뿐이다.
에르네스트도 평범하게 말을 받아 주면서 자신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 쿨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곧 에르네스트는 자기 이야기는 이쯤이면 되었다는 듯 공평하게 두 사람에게도 주제를 돌렸다.
“너희는 요즘 어떤데?”
“뭐? 우리?”
“그래.”
주춤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너희는 내년에도 나가야 할 무대가 있잖아.”
그 목소리엔 그저 진지한 무게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의 태도는 처음부터 굉장히 일관적이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무대에 나가지 못하는 것에 우리가 혹시라도 영향을 받을까 봐 그것을 제일 우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궁금해하고 있었고.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발렌티나가 빠르게 끼어들며 말했다.
“물론 잘 준비하고 있지! 내일모레쯤 해서 DVD 녹화하고 신청하려고.”
“모레?”
“응.”
“그럼 대충 준비는 다 끝났겠네. 발렌티나. 혹시 샘플 녹음 있어? 모니터링용으로 녹음했던 게 있다면 들어보고 싶은데.”
명쾌하게 이야기하던 발렌티나는 멈칫했다. 음악을 들어보는 쪽으로 주제가 흘러가면 그리 좋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챈 모습이다.
“어…… 샘플?”
“타티아나가 그러던데. 네 연주가 정말 탁월했다고. 나도 궁금해져서.”
“미안해, 모니터링하려고 녹음했던 건 곧바로 다 지워 버려서.”
“아, 그래?”
발렌티나의 대답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기다렸다는 듯 아나스타샤 쪽으로 초점을 돌렸다.
“그럼 아나스타샤 너는?”
“…….”
아나스타샤는 조금 피곤하다는 듯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