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1화
순간적으로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경직되었던 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으리라. 곤란해하는 눈빛이 스친다.
하지만 지금 정말 곤란한 건 내 쪽이었다.
난 그녀의 동의 없이 슬럼프에 대한 사안을 에르네스트에게 알렸고, 그것에 대해서 오늘 그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계속 걱정하고 있어서 크게 당혹스럽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보자마자 물어볼 줄은 몰랐다.
지금 끼어들기도 어색했다. 오랜만에 봐서 콩쿠르 준비에 대해 묻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
난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만약 내가 끼어들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조건 끼어들어 말릴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곧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다시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와서 뭘 묻느냐는 투였다.
“나도 준비 중이지. 방금 전까지 우리가 뭐 하다가 왔을 것 같니?”
“연습?”
“맞아.”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허공에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테이프나 CD가 돌아가는 것 같은 제스처였다. 혹은 다른 무언가가.
“너도 녹음은 따로 안 했고?”
“나 원래 그런 거 안 해.”
다른 이유는 무엇을 내놓더라도 변명과 같다. 그것을 잘 아는 아나스타샤는 아예 딱 잘라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도 테스트 정도는 하는 편이었지만,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 태도에선 그리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전에 내게 이야기를 들은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문제를 껴안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척한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짧은 침묵 사이 그가 많은 것을 계산한다는 것이 보였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그의 입장, 여기 모인 친구들의 관계성, 아나스타샤의 자존심.
그 모든 것을 계산해서 에르네스트는 어디까지 어떻게 파고들어야 하는지 판단한다.
그 결과는 가벼운 농담과도 같은 한마디로 이어졌다.
“자신 있나 봐?”
잘 참고 있던 아나스타샤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그녀는 일부러 그 균열을 뭉개듯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모니터링용 샘플 녹음을 하건 안 하건 그게 자신감이랑 무슨 상관이니? 내 연습방법에 참견하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해서. 큰 콩쿠르니까.”
“……딱히 너한테 뭔가 말 할 만한 건 없어.”
그녀는 삐딱하게 다리를 고쳐 짚었다. 장난스럽게 받아치고 있긴 하지만 조금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이 보였다.
이쯤 하면 안 될까.
난 에르네스트에게 모든 걸 해결해달란 뜻으로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응원을 부탁했을 뿐이니, 그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지금 그 부탁을 들어주면 된다.
지금 표면적으로나마 응원한다고 해 준다면 아나스타샤도 잘 이해할 테니 일단 두 사람 사이는 그걸로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다음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해도 될 일이고.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쉽게 물려나려는 생각이 여전히 없어 보였고, 아나스타샤는 그 기색을 눈치챘다.
피곤하다는 듯 한쪽 어깨를 늘어뜨리며 아나스타샤는 이어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투였다.
“아무리 큰 콩쿠르라 하더라도 기본에서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평범하게 준비 중이야.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진 곡들을 주어진 자유도 내에서 준비하는 거지. 우리가 늘 하던 거.”
“간단명료하네.”
아나스타샤의 말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우리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들이 기본으로 잡고 가야 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평범한 건 좋지. 그렇게 말하던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돌연 대화의 거리를 휙 좁혔다.
“그래서 그 준비 상황은?”
“하는 중이라니까?”
“늘 하던 걸 하는 중이니까 대충 알잖아, 우리는.”
콩쿠르 준비가 잘 되어 가는지 아니면 망했는지 그건 스스로 판단하여 바로 알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판단을 친구에게 털어놓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자존심에 직결된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에르네스트의 말에서 아나스타샤는 비로소 정당히 짜증을 낼 근거를 찾아냈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몰라.”
슬슬 지겹다는 눈빛이 에르네스트에게 향하다가, 그의 팔을 보고는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콩쿠르에 참가하지 못하는 에르네스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 볼 수 있잖니? 그 결과로 특별한 걸 찾았다면 가지고 가 보고, 그저 주어진 것들에 국한된 시시한 결과라면 그만두는 거지.”
아나스타샤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으니 내가 할 말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나온 말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콩쿠르 참가는 언제든 그만둬도 상관없다.
아직 신청서를 낸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이번엔 나가지 않기로 결정해도 상관없다. 우린 내년에 겨우 열일곱 살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 슬럼프가 단지 쇼팽 콩쿠르에 국한되는 단발적인 슬럼프에서 끝나지 않고 길어진다면 정말 심각해질지도 모른다.
특히 내년엔 졸업을 앞두고 연주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 마지막 순간을 슬럼프 속에서 지내려면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졸업은 물론이고 음악원 진학 등 그녀의 인생 전반으로 문제가 퍼져나가게 된다.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아찔한 일이다. 그런데도 난 어쩐지 모르게 그녀가 그렇게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단 직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그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콩쿠르에 신경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비단 나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에르네스트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역시 아나스타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녀의 자유라는 걸 잘 안다. 우리가 참견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콩쿠르를 피하는 것이 곧 여유를 가지고 슬럼프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더더욱 목을 조르게 될 것이란 걸 에르네스트는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던 그는 아무것도 모른단 태도를 싹 지워버리곤 아나스타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네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준비해서, 그 특별한 결과를 이미 얻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말한 일반론은 전부 깔끔하게 무시한다.
그 난폭한 일축에 아나스타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니?”
“지금은 우리가 늘 하던 걸 반복할 때가 아니라, 이미 찾아낸 특별한 무기를 더 날카롭게 연마해야 할 시기라는 거지.”
“…….”
에르네스트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묻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상황을 에르네스트에게 알렸냐고.
난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사과하거나 용서를 빌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정말 우리 모두가 우스워지는 일이다.
단지 난 며칠 전 그녀의 연주에서 확실하게 문제를 느끼고, 정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몇 초 정도 날 보던 아나스타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이렇게 되리란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약간 포기한 듯 다시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반박하지 않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만약 내가 문제없이 쇼팽 콩쿠르에 나갈 수 있었더라면, 어떤 칼날을 마주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는데…… 이제 와서 기본 운운이라……. 구태의연하게 기본을 말할 이유가 없는데. 네 실력 정도 되면.”
“어느 때나 기본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 하잖니?”
“내 앞에서까지?”
그 말은 아나스타샤의 신경을 굉장히 거슬렀음이 분명했다.
지금까진 별로 논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가면서도 적당히 언제라도 빠져나갈 준비를 하며 한 발 뒤로 빼고 있었지만,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는지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바로 맞받아쳤다.
“네 앞? 무슨 앞? 너 정말 웃긴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네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어머, 누가 옆에 많은데?”
“그렇게 갖고 놀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 우린 라이벌 아니었던가?”
“와,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셨어요? 정말로? 언제부터죠?”
“언제부터인진 너도 잘 알잖아.”
“옆에 다른 애들 있다고 말조심하는 거 봐. 아하하.”
갑자기 공세가 역전되었다. 깔깔거리며 웃던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향해 직접 한 발 내딛기까지 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짓궂은 장난을 가끔 하긴 해도 본격적으로 화를 내는 일은 정말 드물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화를 낼 때면 정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섭다.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빛이 불타는 듯 맹렬했다.
그러나 깁스를 한 팔을 책상 위에 걸치고 있는 에르네스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정말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쩌지.
난 지금 끼어들어 봤자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란 걸 느꼈다.
아깐 문제가 커질 것 같으면 앞뒤 따지지 않고 일단 무조건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모닥불 정도가 아니라 기름통에 막 불이 붙은 것 같은 지금 이런 상황에선 물을 끼얹는다고 진화될 일이 아니었다.
되레 내가 어설프게 말리려고 하면 양쪽에서 합심해서 날 배제하고 정말 본격적으로 싸우려 할 게 분명했다.
아나스타샤의 옆에 있는 발렌티나도 많이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도 어지간해선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끼어드는 편인데, 지금은 역효과만 날 것 같다는 걸 느낀 듯 했다.
슬쩍 보니 류보비는 갑자기 무서워진 상황에 울상이 되어 울기 직전이었고, 나도 울고 싶어졌다.
그때였다.
“아나스타샤.”
가만히 앉아 있던 리처드가 슬쩍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휙 돌아보더니 신랄하게 물었다. 누구든 상관없이 가만두지 않을 태세였다.
“응? 너도 할 말 있니? 리처드.”
“길게 이야기할 거면 앉아서 할래? 흥미진진한데.”
“…….”
리처드는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한 표정으로 옆자리를 가리킬 뿐이었다.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고 진심으로 더 해 보길 바란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면 맥이 쭉 빠진다.
나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딱 맞붙은 두 사람은 당연히 훨씬 더 심하리라.
아나스타샤는 상황에 너무 아랑곳하지 않는 리처드를 한동안 멍하니 내려다보더니 온몸의 힘을 풀어놓았다.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진 모양이다.
축 늘어지며 그녀는 리처드가 가리킨 자리에 순순히 앉았다. 우린 모두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려주었다.
얼마 안 지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이 향…… 캐모마일이야?”
“맞아. 한 잔 줄까?”
“부탁해도 되니?”
“타 줄게. 발렌티나도?”
“응…….”
오늘은 정말 리처드가 서비스하는 날이었다.
그는 두 사람분의 차를 더 타기 위해 일어났고,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잠깐 그와 눈을 마주했다가, 이번엔 길게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려버렸다. 창피함과 언짢음 등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돌아본 쪽에도 내가 앉아 있었고, 방황하던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아직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류보비에게 가 닿았다.
미안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놀랐니? 류보비.”
“아…… 네, 조금요…….”
“미안해, 미안. 내가 요즘 좀 신경이 날카로워서. 목소리 톤 조절이 안 되네.”
“아니에요…… 이해해요.”
“응? 이해?”
“네, 그…… 저도 에르네스트 오빠가 다치고 나선 불안했었으니까…….”
류보비 역시 여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냥 콩쿠르 준비에 대한 스트레스로 이야기를 맺으려던 아나스타샤는 그런 식으로 피할 순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