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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92화 (892/1,277)

##  892화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마시고 나서 아나스타샤는 한층 더 풀이 죽었다.

우울했다.

가뜩이나 연습실에서의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을 에르네스트가 건드리는 바람에 스터디룸에 오자마자 말다툼을 벌이고,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하고 식어버린 다음엔 류보비로부터 이해한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마음이 더더욱 복잡했다.

아나스타샤는 류보비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결국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기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걸 끝내 부정할 순 없었다.

결국 문제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앞으로 에르네스트를 영영 이길 수 없을 것이란 예감 따위는 차치하고 일단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그저 계속 주변을 귀찮게 할 뿐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음악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더 매섭게 몰아세웠다. 초조함과 무기력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힐긋 에르네스트를 보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가 쪽을 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발렌티나와 함께 차만 홀짝이던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 에르네스트. 괜히 짜증내서.”

마지못해 하는 사과가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아나스타샤는 미안해하고 창피해했다.

스스로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의기양양해하지 않고 깔끔한 태도로 대답했다.

“괜한 짜증이 아니란 건 아니까 괜찮아.”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넘어가 주면 안 되니? 꼭 짚고 간단 말야.”

“글쎄.”

괜히 한마디 더 주고받는 것으로 분위기는 쉽게 풀어졌다.

에르네스트는 팔짱을 끼고 기울여 앉았고,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뭐, 전부 네가 예상하는 대로야. 요즘 소리가 잘 안 나서 미치겠어.”

“그럴 때도 있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콩쿠르 신청 접수를 코앞에 둔 지금이라서.”

“슬럼프가 여유 있을 때 친절하게 찾아오면 그게 슬럼프겠냐.”

“…….”

“이틀 정도 남았다고 했지?”

“그 안에 못 하면 의미 없어.”

시시한 결과라면 그만두겠다고 했던 의지는 확고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도 어떻게든 DVD 심사 정도는 통과할 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기준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듯 팔짱을 풀었다. 딱딱한 목소리를 내려놓고 그 역시 사과해왔다.

“나도 미안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널 더 자극했네. 마지막까지 해보겠다고 하는데도 쉽게 믿기 어렵더라고.”

“전해 들은 이야기? 아, 타티아나한테서?”

“…….”

그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지만, 굳이 그럴 것도 없었다. 이미 아나스타샤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한 후였으니까.

그런데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살짝 끼어들며 대신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대신 변명 같은 걸 하게 될까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미리 알리지 않고 제멋대로 전해서 죄…….”

“아니야, 이제 사과 그만하자 우리. 돌아가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있잖니?”

모두 서로에게 미안한 부분들이 있었다.

타티아나는 마음대로 에르네스트에게 아나스타샤의 상태를 알렸고, 에르네스트는 섬세하지 못하게 그 부분을 캐물었으며, 아나스타샤는 심하게 신경질을 냈었으니까.

그러니 타티아나는 모두 미안함을 느끼며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냥 모두에게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뿐이야. 그걸로 마무리하면 안 될까?”

“……그래도 될까요.”

“난 그게 좋아.”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는 말은 약간 서늘하게 들릴진 몰라도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이미 과할 정도로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뒤로 물러나면 서로의 얼굴이 잘 안 보이게 될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어떠한 반박도 않았다. 어쩐지 생소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이전보다 더 말조심을 하게 된다면 아나스타샤는 조금 슬플 것 같았다.

“…….”

매서운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투명한 유리에 보호받는 모두는 그 바람에 직접 맞닿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흔들리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 사과하고 이해가 오갔음에도 한 번 무거워졌던 분위기는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색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간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덕분이었다.

모두가 눈치를 살피며 이다음 디딜 곳을 찾는다.

아나스타샤 역시 여기 있는 6명이 어색함만으로 이 자리를 마무리하지 않을 방도를 찾아 고민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일단 여기에 있는 기본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공부를 하자고 책을 펴 들었다간 얼마 못 버틸 것이 분명했다.

그때 제일 먼저 의견을 낸 건 리처드였다.

“공부할 분위기도 아니고…… 에르네스트도 있겠다. 오늘은 게임이나 하면서 놀까?”

놀기는 뭘 노냐는 듯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모두가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럴까요? 저 저번에 했던 그 그림 연상 게임 하고 싶어요!”

“뭐더라?”

“딕싯?”

제일 먼저 류보비가 리처드의 의견에 찬동했고 이어서 머뭇거리는 참가가 이어졌다.

***

이곳 스터디룸은 학생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타티아나 주도로 모인 친구들이 거의 맡아놓고 쓰는 공간에 가까웠다. 클럽 활동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누가 참가하더라도 타티아나는 환영하겠지만, 이미 구성원들이 확립되어 있는 지금 용기있게 끼어들 학생은 드물었다.

특히 여기 에르네스트나 리처드같이 쉽지 않은 아이들까지 있다면 더더욱.

때문에 오랫동안 한 공간을 쓰면서 이곳엔 이것저것 가져다 놓은 사적인 물건들이 쌓여 있기도 했다.

카드와 보드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난리났네.”

“그러게.”

6명의 친구들이 딕싯, 할리갈리, 달무티 등 이것저것 게임들을 바꿔 가며 논 테이블 위는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스터디룸이 아니라 보드게임 카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원래 어색해진 분위기를 다시 되돌려놓고자 30분 정도만 놀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슬슬 치울까?”

“그래.”

아나스타샤는 자기 앞에 있는 카드 뭉치를 모아선 탁탁 테이블에 쳐서 대충 정리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비슷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야, 카드 다시 똑바로 정리해 놔.”

“똑바로 했잖아?”

“그게 거기가 맞아?”

티격태격하는 친구들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2시간이나 놀긴 했지만 그 덕분에 그동안은 피아노도 슬럼프도 잊고 웃을 수 있었다.

며칠 만에 거의 처음으로 진짜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았다.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고.

하지만 게임 결과는 살짝 못마땅했다.

“아나스타샤, 리처드. 너희는 지금 치우고 있을 게 아니라 내기 이행이나 하러 갔다 와.”

테이블 위를 치우던 아나스타샤는 손을 멈추고 허리를 들었다. 동시에 리처드와 눈이 마주쳤다.

“…….”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게임들을 하면서 당연히 내기가 동반되었다.

총점을 나누어서 가장 하위인 두 사람이 음료수를 사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게임마다 난이도나 비중에 대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점수 가산에도 가중치를 둬야 하겠지만, 막상 2시간 동안의 내용을 보자면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이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음료수를 사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리처드는 본래 안 좋았던 운이 오늘따라 더더욱 최악이었고, 아나스타샤도 오늘은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데다가 받는 카드마다 억울할 정도로 나쁜 카드들뿐이어서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평소 게임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운이 안 좋았던 건 처음인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이것도 전부 슬럼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괜히 짜증을 전가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타티아나가 약간 걱정스럽단 눈빛으로 이곳을 보고 있었기에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란 뜻으로 손을 흔들어보이곤 지갑만 들고 스터디룸 밖으로 나왔다.

뒤이어 나온 리처드는 그녀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지는 건 오랜만이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 아니야?”

“그런가?”

그리고 두 사람은 자판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는 리처드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지금 그래도 모든 것이 잘 수습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란 생각을 했다.

만약 아까 에르네스트와 둘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정말 훨씬 더 심한 소리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회 역시 훨씬 더 많이 했겠지.

아나스타샤는 이제야 간신히 말한다는 듯 리처드를 불렀다.

“아깐 고마웠어.”

“뭘?”

“……적당히 말려줘서. 덕분에 분위기도 좋아졌고.”

2시간이나 지난 일을 왜 아직도 말하냐는 듯 리처드가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오늘 일을 며칠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타티아나가 그만큼 그녀의 피아노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에르네스트도 전해듣자마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 들었다.

그는 이전에도 아나스타샤가 과하게 죄책감을 가지는 것을 굉장히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두 사람에게 약한 모습만 보인 것이 되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축 가라앉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에 비해 난…… 정말 꼴불견이네.”

“미안하다 이야기는 서로 안 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아무튼 말야.”

리처드는 별말 않더라도 모든 걸 듣고 있었다.

조금 더 창피해진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발을 옮겼다.

그런데 천천히 걷던 리처드는 점점 더 발걸음을 늦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처럼 둘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으니,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뭐니?”

아나스타샤가 허락하자 리처드가 물었다.

“소리가 잘 안 난다고 했었지? 소리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데?”

“그…… 아니, 알잖아?”

뭘 물어보더라도 친절하게 대답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도 순간 답답함을 느꼈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진 아까 이야기로 다 이해한 거 아니었어?

발을 멈추고 비스듬하게 선 아나스타샤는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나스타샤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에서 이미지를 이끌어내거나 감정을 흔드는 그런 거.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가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넌 그 애들처럼 못 하는 게 문제라는 거네?”

“그런 말이 아닌…….”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건가? 답답한 마음에 살짝 짜증이 올라옴을 느끼던 아나스타샤는 곧 리처드가 지금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문제가 시작되어 영향을 주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 가장 어린 류보비까지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리처드가 알아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걸 자기 입으로 인정하기 싫었다.

때문에 살짝 인상을 쓰며 말하기 대꾸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는데, 길게 이야기하긴 싫어.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야.”

“그런데 다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잖아.”

리처드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말 순진하게 묻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알기에 그 너머의 해답을 끌어오려고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알고 지낸 지는 정말 오래되었지만, 사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리처드를 잘 모르겠단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아까 내가 흥미진진하다고 말했던 건 너희가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서 연관성을 봤기 때문이야.”

“그게 뭔데?”

“에르네스트가 문제인 거겠지.”

인정하지 않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듯 리처드가 말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라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리처드는 천천히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엔 반박하기 어려운 객관성이 담겨 있었다.

“목표를 가진 피아니스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넌 잘 보여줬어.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처럼, 넌 한 사람을 찍어누르기 위해 집중했지.”

“…….”

“오해하진 마. 그게 잘못되었단 게 아니니까. 뭐든간에 목표를 확실히 하고 결과를 낸다면 괜찮은 것 아니겠어?”

리처드는 전혀 비난조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되레 그는 아나스타샤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흥미와 찬사가 섞인 목소리에 아나스타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듣고만 있자 리처드가 말을 이었다.

“그 결과로 네가 기교파 피아니스트로서 우리 중 가장 뛰어나게 되었다는 건 모두가 알아.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네 음악엔 방향성까지 부여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그것만 잘 유지했더라도 네 목적을 한 번쯤은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다다를 수도 있었던 곳을 어렴풋이 이야기하던 리처드의 목소리는 허공 어딘가를 떠돌다가 갑자기 눈앞의 현실로 확 떨어진다.

“그런데 고무줄처럼 팽팽한 텐션을 유지하고 있던 네 음악성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그만해. 제발.”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힘들어. 왜 돌아가면서 괴롭히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지금?”

“네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을 너무 가깝게 놓고 보진 않았으면 좋겠어.”

“……뭐라고?”

“잘 생각해 봐.”

그 말만을 남기고 리처드는 다시 훌쩍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나스타샤의 뇌리엔 그의 말이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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