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3화
청소를 마치고 나서 텅 빈 테이블을 보다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챙겨 온 교과서와 노트 등을 올려놓았다.
일단 무엇이라도 올라가 있으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물었다.
“시간 어떤데?”
이것저것 빠진 질문이었으나 난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약속한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어요. 1시간 정도만 같이 공부하다가 가면 될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알겠어.”
에르네스트는 짧게 대답하곤 다시 빙글 돌아 본래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같이 게임을 하면서도 그는 아나스타샤와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었다는 듯 짓궂게 농담을 던지기도 하면서 즐거워했지만, 지금 보면 아직도 미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결국 콩쿠르 신청이 마감될 때까지 제 컨디션을 내지 못하고 헤매다가 포기해버린다면 그는 정말로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 그리고 그 스스로에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 상황만 놓고 보자면 전혀 다행일 것이 없었다. 여전히 언제라도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 주는 것 자체가 내겐 무척 인상적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거친 말다툼까지 불사하며 깊은 대화를 하려는 것은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했고, 그 진심의 일부는 분명 아나스타샤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머리에 열이 올라 흥분한 아나스타샤는 말다툼을 할 땐 그의 모든 말을 부정하고 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그녀를 라이벌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주었단 것을.
난 그게 분명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방법은 거칠었어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것일 테고.
만약 귀찮게 일을 벌이기 싫다는 이유로 에르네스트가 아나스타샤를 나 몰라라 등한시했다면 난 그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그에게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감사함을 느낀다.
나중에 선물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으로 웃으며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낀 에르네스트가 이쪽을 보며 입모양만으로 물었다. 뭔데, 라는 말이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란 뜻으로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무슨 선물이든 간에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해야 재미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선물을 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대충 사 왔어.”
2시간 내내 엉망진창으로 지기만 해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내기 이행을 하러 갔다 온 리처드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음료수뿐만이 아니라 가볍게 먹을 과자들도 사 온 걸 보니 역시 그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지금 이렇게나마 분위기가 나아질 수 있었던 건 모두 리처드 덕분이었다.
내가 한 건 그저 그에게 메시지로 언질을 준 것뿐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는 아주 현명하게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설마하니 그 순간에 더 부추기는 식으로 맥 빠지게 만들 줄은 몰랐다. 나였으면 절대로 쓰지 못할 방법이었다.
“고생했어요. 리처드.”
“여기 패배자 동지가 한 명 더 있어서 괜찮았어.”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줄래?”
리처드가 싱겁게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발끈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분노가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해결하고도 리처드는 앞장서서 게임을 제안하며 모두를 한곳으로 엮었고, 대부분의 게임 결과가 자신의 패배라는 걸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지는 걸 알더라도 피하지 않는 승부사의 정신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의 독특한 희생정신도 느껴졌다.
리처드는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난 그가 흥미 위주로 좇으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사명감 또한 가지고 있는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다음엔 제가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엉?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에요.”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리처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공짜 식사는 언제라도 환영이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우린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 그럭저럭 잘 이해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사 온 음료수를 각자 앞에 놓아준 다음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공부 시작한 거니?”
“아뇨, 아직.”
“펼쳐놓은 건?”
“하는 척이에요.”
“아하하하, 그게 뭐야.”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자기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며 노트를 꺼내놓았다.
그녀 역시 바로 공부를 시작하기엔 아무래도 싱숭생숭한 모양이다.
하지만 게임을 하고 놀 때랑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리처드는 다시 류보비를 보며 아까 가르쳐주다 만 걸 마저 가르쳐주겠다며 펜을 들었고,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작성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발렌티나도 교과서를 뒤적였다. 나와 아나스타샤도 딴짓을 하고 놀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우린 스터디룸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시간을 잠시나마 보냈다.
정확하게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시간을 확인한 나는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오후 시간 아무 때나 내가 편한 대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지만, 그건 마카로프의 시간을 내가 멋대로 유용하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찾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내가 테이블 위에서 시선을 떼어놓자 곧바로 발렌티나가 반응했다.
“왜 그래? 타티아나.”
“아, 그게…….”
“일어나려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스튜디오에 가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살짝 고민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녹화 건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지금 에르네스트와 함께 움직일 예정이라는 것도 신경 쓰였다.
스튜디오에 간다고 무신경하게 툭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우린 모두 자유롭게 모인 학생들이었으므로 각자의 바쁜 스케줄에 맞춰서 활동해야 했다.
때문에 스터디룸에 오가는 일에 대해선 서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게 된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곤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오늘은 이쯤 하려고 해요.”
“2시간 놀고 1시간 공부하고, 말도 안 되는 효율이네. 진짜로.”
“1시간 동안 집중했으면 괜찮은 것 아닐까요?”
“집중했어? 난 전혀 못 했는데. 으아.”
사실 나도 그리 잘 집중하진 못했다.
눈은 노트를 보고 있는데도 자꾸 다른 친구들은 뭘 하고 있는지 자꾸 신경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중하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궁금해졌다는 듯 아나스타샤도 펜을 내려놓더니 물었다.
“어디 가니?”
모두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갈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어쩔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튜디오에 가려고 해요.”
“아…… 그래.”
예상했던 대로 아나스타샤는 약간 난처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몇 시간 전에 음악 건으로 언성을 높였던 기억이 나는지 내 시선을 피한다.
나 역시 그녀에게 지금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무덤덤하게 이야기해야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약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리처드도 보던 책을 덮으며 관심을 보였다.
“스튜디오? 콩쿠르용 DVD 제작하려는 거야?”
“예, 그에 앞서 레슨용 샘플 녹음을 하려고 해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나도 보러 가도 돼?”
난데없는 말에 난 조금 당황했다.
정말 가끔 필요할 때 말고는 다른 사람의 연습 등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그가 갑자기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뜻밖의 일이라 그런지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그러셔도 괜찮아요. 어, 끝나고 나면 저녁 식사도 하실래요?”
“아까 말했던 거?”
“오늘이라도 상관없다면요.”
“난 좋아.”
심지어 난 약간 당황한 나머지 저녁 약속까지 잡았다.
내게 흥미를 보이는 것이라면 응당 그리해야 한다는 묘한 강박과, 오늘 그에게 고마웠던 감정과 궁금증 등이 이것저것 합쳐진 까닭이었다.
물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는 건 이어진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말했던 게 뭔데? 밥을 왜 사줘?”
“아, 그게…….”
물론 리처드가 같이 간다고 해서 그와의 선약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어차피 애초에 했던 약속은 같이 스튜디오에 가는 것까지뿐이었고, 그 이후에 정해진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에게 실수를 했단 기분을 느꼈다.
적어도 식사를 왜 사야 하는지에 대해선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다 보고 있는 상황에서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스스로의 경솔함을 원망하면서 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벌어진 모든 것들을 싹 끌어모아 가는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에르네스트도 같이 가는 거였죠!?”
“어? 어.”
“그럼 전부…… 아니, 여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기 계신 분 모두 다 같이 가요.”
“……???”
모두가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제안을 했다는 건 알지만, 난 이렇게 된 김에 오늘 마지막까지 여기 있는 친구들과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게임과 공부 등으로 분위기가 많이 풀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아나스타샤를 중심으로 뒤숭숭한 분위기는 남아 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마지막까지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 짓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모두 다 같이 맛있는 식사라도 한다면 조금 더 기분 좋은 하루로 기억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즉흥적으로 해낸 생각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바로 찬성한 건 아니었다. 발렌티나가 고민해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도?”
“……안 될까요?”
“녹음하는 거라며? 우린 지금 녹음할 일 없는데.”
가는 곳이 스튜디오라 발렌티나는 그게 걱정인 모양이었다.
걱정인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차라리 아나스타샤를 다시 한번 데리고 가는 것도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시선을 피하는 지금보단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시는 정도로 괜찮아요. 본격적인 목적은 저녁식사에 있기도 하고요.”
난 다시 한번 넌지시 물었다.
“어떠신가요?”
“난 괜찮은데…….”
발렌티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면서도 옆자리의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싫다고 말한다면 발렌티나도 같이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갈게.”
그녀도 오늘 보인 모습에 대해 많이 후회하고 있음을 느낀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아나스타샤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트와 다투고, 리처드의 중재를 받아들이면서 그녀도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만약 둘 중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그녀는 온갖 변명을 다 대서라도 스튜디오에 가려 하지 않았을 테지.
마음이 편치 않을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면서도 그녀가 결국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동의를 구하고, 마지막으로 난 류보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받았다.
“전 안 될 것 같아요.”
난 깜짝 놀랐다.
다른 친구들이라면 모를까 류보비는 반드시 가겠다고 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혹시나 싶어 난 다시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런 게 아니라면 함께 했으면 해요.”
“…….”
“부모님께 전화도 제가 드리고, 좋은 곳에서 저녁 식사도 하고 나면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
혹시 부담감 등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 없음을 다시 확실하게 말해주었지만, 류보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되레 그녀는 보다 확고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만 빠질게요. 지금 바로 선생님도 만나러 가야 하고, 저녁에도 일이 있어서요. 언니오빠들 재미있게 보내세요. 이야기들도 나누시고요.”
그렇게 담백하게 이야기를 마친 류보비는 진짜로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며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잡아야 하나 고민할 때, 리처드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보자, 류보비.”
“오늘 공부 가르쳐줘서 고마웠어요. 게임도 재미있었고요. 리처드 오빠.”
오늘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는 듯 류보비는 귀엽게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저도 오빠처럼 똑똑해졌으면 좋겠어요.”
“난 나이를 많이 먹었을 뿐이지 성적 엄청 나빠. 나 닮으면 안 돼. 저기 모범생들한테 배워.”
“그래도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난 오늘 류보비가 생각 이상으로 의젓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리처드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무엇을 할지도. 그리고 거기에 류보비는 자신이 빠져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말을 조심하게 되니까.
난 류보비를 더 이상 붙잡지 못했고, 그녀는 코트를 주섬주섬 입더니 모두를 다시 쭉 둘러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여기서 봐요!”
야무지게 인사한 후 류보비는 가방을 들고 폴짝 뛰었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10학년 5명만이 자리에 남았다.
“우린 가 볼까.”
어떻게 할지 정해졌으면 슬슬 움직이자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