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94화 (894/1,277)

##  894화

원래 에르네스트와 함께 가기로 했던 건, 나도 스튜디오에 녹음으로 볼일이 있고 그 역시 볼일이 있다면 자동차 한 대로 움직이면 편하니 그렇게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다섯 명이나 되자 어떻게 하더라도 한 번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론 시간을 내어 소로킨이 리무진을 가지고 와 준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복잡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발렌티나가 함께 가고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이래서야 에르네스트가 혼자 가는 것보다 못했다. 더 불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웃었다.

오늘은 모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낫다는 데엔 그 역시 동의를 보내왔다.

그렇게 나와서 각자 차를 타고 에우테르페 레코즈 모스크바 스튜디오로 향했다.

“사탕 드시겠어요?”

“아니, 단 거라면 아까 너무 많이 먹어서.”

뒷좌석은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아나스타샤는 음악적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스튜디오에 간다는 것이 불편한 듯 보였고, 발렌티나는 그런 그녀를 가까이에서 케어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듯 보였다.

물론 난 두 사람을 그냥 끌고 가서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내가 책임지고 잘 챙겨야 하는 건 차에 오른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사탕을 권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난 조금이나마 즐거운 이야기들을 하려고 애썼다.

발렌티나도 얼른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며 조금이라도 어색함을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우리 사이에 어색함 같은 건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덕분에 스튜디오에 도착할 때 즈음엔 모두들 각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나스타샤는 보다 편해진 얼굴로 웃었다.

내려서 보니 아직 택시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도로를 쭉 훑어보더니 말했다.

“조금 기다릴까? 금방 오겠지?”

“그럴까요.”

날씨가 추우니 스튜디오 안에서 기다려도 괜찮겠지만 우린 일부러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꼬마 눈사람이나 하나 만들어 볼까.”

아나스타샤는 건물 옆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선 눈을 꾹꾹 뭉치기 시작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눈을 만지는 걸 보니 말리고 싶었지만, 그 모습에서 그녀가 스튜디오에 올라가서도 피아노를 만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코트에 손을 찔러넣고 지켜보기만 했다. 발렌티나도 딱히 눈사람을 만들 생각은 없는지 내 옆을 서성였다.

하지만 갑자기 장난기가 올라왔는지 발렌티나는 눈을 쥐고는 살금살금 아나스타샤의 뒤로 갔다.

물론 예리한 아나스타샤에게 딱 걸려서 붙잡힌 건 한순간이었다.

아마 목 뒤에 눈을 넣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시도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앗, 악! 으악! 차가워!”

“이렇게 하려고? 응?”

“얘 좀 말려 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발렌티나의 팔을 꽉 잡고는 뭉친 눈을 목에 가져다가 마구 문질렀다.

발렌티나는 온몸을 비틀며 도망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등에 집어넣지 않은 것이 그녀의 마지막 자비였다.

두 사람이 노는 광경을 보는 건 좋았으나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싶어서 말리려고 다가설 때였다.

택시 한 대가 길가에 서더니 남자애 두 명이 내렸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였다.

두 사람은 내리자마자 비명을 질러 대는 발렌티나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 해, 쟤들?”

“……슬슬 말릴까요?”

하지만 억지로 말릴 것 없이 아나스타샤는 기다리던 두 명이 온 것을 보고는 은근슬쩍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팔을 뒤로 숨기며 물러났다.

발렌티나는 자기가 당한 것이 억울하다는 듯 마구 따졌지만 아나스타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난 발렌티나에게 다가가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괜찮아요? 발렌티나.”

“아직도 차가워. 너무해…….”

“저도 말리려고 했다간 똑같이 당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진짜 진짜 너무해!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는 것 아냐!?”

발렌티나는 잔뜩 투정을 부렸지만 내가 차가운 목 뒤를 손으로 쓸어주는 것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난 앞장서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이 스튜디오엔 직원이 그리 많지 않다. 베로니카 과장님은 외근을 나가서 자리에 없는 것 같고, 그렇다면 있는 건 사장이자 프로듀서인 마카로프뿐이었다.

메인 컨트롤룸으로 향하자 구부정하게 컴퓨터를 보고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고개를 들더니 우릴 반겼다.

“타티아나 어서 오…… 친구분들도 오셨군요?”

먼저 전화를 할 걸 그랬다. 예상하지 못한 인원들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다행히 모두 용건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예, 견학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하하하, 괜찮고말고요. 앉으시죠.”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금방 작업하던 내용을 저장만 하고 가겠다며 테이블 쪽으로 손짓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는 사이 리처드는 스튜디오 안을 쭉 둘러보더니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설 좋은데?”

“그렇죠?”

“저기 스피커만 봐도 알겠어. 돈 좀 썼네.”

돈 좀 쓴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를 가운데에 놓고 양 구석에 커다랗게 서 있는 두 대의 스피커는 각각 수백만 루블이 넘어가는 고가의 장비였다.

난 리처드가 저런 비현실적으로 비싼 스피커를 바로 알아본 것이 신기해서 물어보았다.

“스피커에 대해 잘 아시나요?”

“아니, 별로.”

리처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귀찮은 이야기는 바로 잘 모른다고 피해버리는 건 그의 버릇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스튜디오에 있는 부스나 장비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싶어졌다.

아는 대로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있는데, 일을 마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 차는 어떻게 드릴까요.”

그는 리처드와 발렌티나를 보며 물었다. 때문에 대답 역시 리처드가 했다.

“캐모마일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캐모마일? 타티아나가 주로 마시는 차인데, 다들 그것만 마십니까?”

“오늘 마셔보니 좋더라고요.”

리처드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심신안정에 대한 걸 역시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잠시 우리끼리 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프로듀서가 각자 앞에 차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도 챙겨선 우리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때다 싶어 난 얼른 그에게 말했다.

“늦었지만 소개 드릴게요. 프로듀서.”

서로 처음 보는 사이라면 내가 중간에서 소개해주는 것이 정석적이다.

계속 이 타이밍만 재고 있던 난 적절하게 리처드와 발렌티나를 소개해주었고 반대로 두 사람에게도 다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 대해 전했다.

그렇게 내가 가볍게 소개를 마치고 나니,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리처드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악수했다.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라고 합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카르카로프입니다. 이야기라 함은……?”

“타티아나가 얼마나 대단한 프로듀서인지 자랑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죠.”

“하하하, 자랑까지 했습니까?”

그리고 발렌티나도 얼른 끼어들어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점잖은 태도로 리처드가 건네는 말들은 기분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고 발렌티나의 활발한 모습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좋게 보인 모양이다.

처음 보는데도 세 사람은 그다지 서로를 어려워하지 않고 금방 친밀해졌고, 난 약간 안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이 찾아왔는지 궁금해하던 프로듀서는 정말로 오늘 용건이 있는 건 나와 에르네스트뿐이라는 걸 듣고는 재차 물었다.

“그럼 오늘은 정말 견학하러 오신 겁니까?”

“예. 전 이번 콩쿠르는 패스하고 조용히 졸업할 예정이라서, 그런데 그냥 흥미가 조금 생겨서요.”

“흥미가 생겼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흥미를 좇는 것에 의미를 많이 두는 건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어쩐지 취미가 잘 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어 프로듀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다음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요즘 어떻습니까? 오늘 녹음할 수 있겠습니까?”

저번에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쓴소리를 하기도 했었기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나스타샤가 원한다면 편의를 봐주겠다는 부드러운 의사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짧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녀를 가만히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슬럼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어떻게 할 것이냐며 캐묻거나 안달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는 우리를 죽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언제라도 생각이 드신다면 말씀해 주시죠.”

“그럴게요.”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적당히 선을 그으며 자신의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듯한 뜻이었다.

프로듀서도 그 정도는 이해했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그는 이런 상황도 여러 번 겪었을 테지.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는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럼…… 먼저 누구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그와 난 동시에 서로에게 손짓했다.

“먼저 하세요.”

“네가 먼저 해. 난 얼마 안 걸리니까.”

“그러니까 빨리 끝내시면 되잖아요?”

“…….”

사실 누가 먼저 하든 별 상관은 없었지만, 난 에르네스트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바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알겠어.”

에르네스트는 일어나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모니터를 앞에 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마우스를 움직이기도 했다.

가만 보니 작곡 프로그램에 있어서 물어볼 것이 있는 듯했다.

난 바로 보고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았으나 리처드는 궁금해했다.

“저거 뭐 하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작곡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이젠 혼자서 다룰 수 있긴 하지만, 조금 더 심도 있는 기능들을 물어보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 그래? 손으로만 작곡하는 줄 알았는데.”

“어떤 방식이든 다룰 수 있으면 좋잖아요?”

클래식 작곡가라고 해서 꼭 책상에 앉아 오선지에 작곡을 하란 법은 없었다.

그건 편견이었다. 클래식 역시 컴퓨터로 작곡하면 정말 편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자주 사용했다.

음악만 놓고 보면 정말 고전적이고 고급스러운 어휘를 잘 쓰는데도, 신기술을 사용하는 데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쓰는 편이다.

다재다능하다 보면 가리는 것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인가 보다.

그에 비해 태블릿 컴퓨터로 악보 정도만 받아 볼 줄 아는 나는 그가 하는 일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문가 같네, 에르네스트.”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에르네스트는 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충분히 전문가 같아 보였다.

팔에 있는 깁스가 여전히 눈에 걸리긴 하지만, 저것도 내년이 되면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그때가 기다려졌다.

그땐 에르네스트가 부스에 앉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내 기다림보다 빠르게 에르네스트는 움직였다.

“……?”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문밖으로 나갔다.

뭔가 가지고 오려는 건가? 하지만 아직 한 팔밖에 쓰지 못하는 그를 생각하면 걱정부터 든다.

대신 가져와달라고 부탁하면 여기 나설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데, 왜 에르네스트가 나갔는지 궁금해할 즈음이었다.

“!”

“쟤 피아노 쳐도 돼?”

난데없이 스튜디오의 거대한 스피커에서 웅장한 피아노 소리가 터져나왔다. 난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찻잔을 쳐서 떨어뜨릴 뻔했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선 싱글 부스가 보이는 유리로 향했다.

그곳엔 에르네스트가 오른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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