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5화
우리는 은연중에 에르네스트가 당분간 피아노를 완전히 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지만 피아노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그가, 한 손만을 써서 무언가를 연주하리라곤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었다.
오른손만을 사용하는 곡을 연주하려 할 수도 있긴 하지만, 클래식 세계엔 왼손을 위한 곡들은 꽤 많아도 오른손을 위한 곡은 드물었다.
과거 수백 년 동안의 곡들을 합쳐 봐도 열 곡이 채 안 되며, 대부분은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했다.
오른손만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왼손으로 하는 것보다 불리하고 어렵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론 당연히 멜로디를 만드는 오른손을 쓰는 것이 음악을 구성하는 데에 유리하리라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음악이라고 판단하는 데에 큰 기준이 되는 것은 멜로디가 아닌 박자였다.
멜로디 없는 박자만으로 음악을 만드는 건 가능하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왼손을 쓰는 쪽이 그 박자를 만드는 데에 더 유리하고, 또 강한 엄지손가락을 써서 멜로디 라인을 찍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반대로 오른손만 쓰면 필연적으로 멜로디가 화려해지기 마련인데, 그러면 음악 전체가 불안정해지는 일이 만연해진다.
이런 현실은 작곡가이기도 한 에르네스트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때문에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그가 불안정한 음악을 구태여 시도하리라곤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려놓았다.
‘베이스를 아예 포기하고?’
에르네스트가 시도하는 음악은 파격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피아노를 반으로 뚝 잘라 왼쪽의 음들은 과감하게 포기해버린다.
오른손은 베이스를 건드리지도 않고 오로지 멜로디 라인만을 다채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박자를 포기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가 구사하는 절묘한 연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심상에 박자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난 정확하게 에르네스트가 그리는 음악을 투영해내고,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왼손으로 그의 베이스를 맡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레퍼런스를 자주 들어볼 수 있는 기존의 곡들이라면 이렇게 멜로디만 듣고 음악의 완성도가 충분하다 느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가 연주하는 이 곡은 신곡이었다.
난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런데 모두 당혹스럽다는 듯 서로를 한 번 바라본 뒤엔 에르네스트의 연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클래식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이 동시에 자신의 상식이 깨어지는 기분을 느낀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
처음 듣는 곡과 신기에 가까운 연주.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오른손이 여전히 압도적인 역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 등을 느끼며 난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연주자로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순식간에 내 긴장을 녹여 없앤다.
목과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난 찻잔을 들었다.
‘어떻게…….’
입술을 축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하고 나니 그 너머의 인과에까지 생각이 향한다.
그사이 연습을 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걸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난 사람들을 써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병원의 시큐리티는 빅토르와 닿아 있고, 에르네스트의 치료계획이나 활동계획 등 역시 내게 보고되고 있다.
그렇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가 몇 주간 피아노를 만진 일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 내가 알았을 것이다.
물론 그사이 피아노를 치려 했다고 한들 내가 개입하고 간섭하진 않았겠지만, 분명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에 가까웠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들려오는 음색에 문제는 전혀 없다. 에르네스트의 에너지는 한 손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져왔다.
다만 불안감은 내 마음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왜 지금 오른손만으로 연주를 하는 걸까.
혹시라도 치료에 차질이 생겨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직감하고 지금부터라도 한 손으로 해내고자 하는 거라면?
분명 그의 담당의는 치료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어간다고 했고, 에르네스트 역시 오늘 말하길 모든 것이 좋다고 했었지만 실제로 어떤진 알 수가 없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가정들이 마구 떠오른다.
그 와중에도 에르네스트의 음악은 마치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파고들어선 자꾸만 내가 어려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1분 남짓 되었을까.
음악이 멈춰도 난 박수를 치거나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짧은 곡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지쳐버렸다.
말끔하게 들리는 음악의 위력에 감탄하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일부러 더 신경을 곤두세우려 한 탓이었다.
무작정 좋다고 생각해버리면 에르네스트가 정말 어떤 이유로 오른손만으로 음악을 연주했는지 알 수 없게 될 것만 같아서, 난 그것이 두려웠다.
여러 복잡한 생각으로 문 쪽을 보고 있자, 이윽고 연주를 마친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태연하게 들어오다 말고 다섯 쌍이나 되는 시선을 마주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모두 나 같은 생각으로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에르네스트는 무슨 상황이냐는 듯 물었다.
“왜 다들 그렇게 보고 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발렌티나가 빠르게 물었다.
“신곡이야?”
“어…… 신곡이긴 한데 그냥 실험 중이야.”
“실험?”
“응.”
발렌티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무거워져버렸다.
실험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실험을 떠올려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왼손을 영영 쓰지 않고 오른손만으로도 연주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라면, 그건 지금 성공적이라 해서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더 고민과 불안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태연한 모습으로 왼팔을 툭툭 치기까지 하며 말했다.
“이거 다 나을 때까지 재미있는 걸 조금 해보고 싶어져서.”
그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혹시나 했던 걱정들이 기반부터 무너져내렸다.
에르네스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왼손이 회복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릴 리가 없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마카로프 프로듀서.”
“……정확합니다.”
“그럼 확인해보죠.”
그 말이 나오자마자 프로듀서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멀리서 확인한 모니터 화면엔 두 개의 파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곧 그 파형들은 소리로 재생되었다.
“……아.”
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 재생되고 있는 음악은 두 가지였지만 곧 하나였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방금 연주했던 음악에 전자음원으로 베이스를 채워넣고 있었다.
디지털로 재합성된 하나의 음악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물로 재생되고 있었다.
당연히 컴퓨터가 낼 수 있는 음원엔 한계가 거의 없었으므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과 비슷한 규모의 대규모 베이스가 뒤편에 웅장하게 깔린다.
그 위로 흐르는 에르네스트의 음악은 깜짝 놀랄 정도로 두드러지는 화려함을 드러냈다.
현란하게 휘몰아치는가 하면, 잠잠하게 잦아들기도 한다. 난 에르네스트가 왜 이 음악이 실험용이라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전자음원의 조화로 음악적 스펙트럼을 어디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실험해보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왼손만을 보조하는 소극적인 실험이었다면 더더욱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예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할 정도로 대규모의 반주를 덧붙여버리니 난 그가 도저히 불안 속에서 이 곡을 시도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건 그가 완벽하게 복귀했을 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의 일부분이었다.
이 결과 속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떻게 박자를 맞추셨는지 모르겠군요. 모니터링 이어폰도 없이…….”
“귀에 음원이 들리면 멜로디에 영향이 가서. 일단은 그냥 해 보고 안 되면 쓸 생각이었습니다.”
“하…….”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난 에르네스트가 컴퓨터가 연주하는 음악과 정확하게 박자를 맞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연주를 하려면 이어폰 등을 사용해서 음악을 재생시켜 놓고 거기에 맞추게 된다.
협주곡을 연습할 때 오케스트라의 음원을 틀어놓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적막 속에서 피아노만 연주했고, 그것은 정말 찰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1분 남짓한 짧은 곡이라 하더라도 0.1초의 오차가 두세 번만 쌓이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악이 어긋나버렸을 텐데, 그걸 그냥 시도해서 한 번에 성공시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도 음악의 템포를 정확하게 컨트롤하는 데엔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건 시도해 본 적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보고 있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가 듣기엔 어때?”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가 치료에 집중하면서도 그사이 작곡에 집중하고, 또 새로운 시도들을 잔뜩 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대단하고 감사하다.
리처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실험용 신곡치고는 너무 퀄리티 높은 거 아니냐?”
“영화 음악 듣는 느낌이야.”
“전자음원이 섞여서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아요. 클래식적 어법에 충실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훌륭한 피아노 협주곡이죠.”
난 그가 연주하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차분히 정리하며 말했다.
지금은 마치 모리스 라벨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던 것처럼, 에르네스트가 그저 오른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추구하는 완성도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나중엔 훨씬 더 견고한 곡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에르네스트.”
“정확해.”
그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실험용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건 그저 실험일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멈추지 않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말 테지. 그 미래를 예감하며 난 마주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그에게 한마디씩 이야기할 때였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에게 칭찬을 건넸다.
“네 한 손이 나보다 낫구나.”
그러나 그 칭찬을 들은 에르네스트는 기뻐하지 않았다.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는 아나스타샤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진 우리 역시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쩌면 무심결에 음악가로서 진심을 말한 것뿐일지 모르겠지만, 우린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실언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뭐…… 그게…… 그렇게 정확하게 맞춰서 하는 건 정말 엄두도 안 나는 일이니까. 인간 메트로놈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하니?”
에르네스트가 보인 무시무시한 실력 중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가장 대단했던 건 역시 듣지 않고 컴퓨터와 박자를 맞춘 일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듣더라도 둘러대는 말처럼 들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고 가만히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 난 아직 한 손으로도 멀쩡해. 이 정도로 말이지.”
“……뭐?”
“그러니까 해 보지도 않고 낫니 어쩌니 하지 말고, 너도 연주해 보든가. 한 손으로.”
다분히 도발적인 어투였다.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뭘 하라는 건데?”
“오른손으로 하는 거 있잖아. 알캉이 쓴 곡 중에서도.”
그의 말에서 난 알캉의 대연습곡 op.76의 2번을 떠올렸다. 세상에 많지 않은 오른손 전용 곡 중 하나였다.
아마 알캉의 곡들을 연주하는 아나스타샤라면 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난 오늘 피아노 칠 생각 없어.”
“그래?”
에르네스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짧게 대꾸했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선 실망감이 약간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