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96화 (896/1,277)

##  896화

그 어떤 말에도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단호한 태도로 피아노를 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마디 더 했다. 이번엔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마음대로 하든가.”

“마음대로 할 거야. 신경 쓰지 마.”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다시 대꾸했다. 불쾌해하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네스트는 당장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꾹 눌러 참는 듯 보였다.

이윽고 그는 뒤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난 하던 거 마저 좀 볼게. 얼마 안 걸려.”

그리고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있는 컴퓨터 앞으로 휙 가 버렸다. 그 걸음걸이는 거침없고 빨랐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답답해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일단 에르네스트는 지금 열이 오른 채로 아나스타샤와 더 대화하다간 또 싸울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야기할 시간은 더 있을 테니 차분히 대화할 궁리를 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아나스타샤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살짝 건드리면 감전이라도 될 것처럼 잔뜩 곤두서 있었다.

누가 어떤 노력을 하든 아나스타샤는 싸울 태세를 하고 있었다. 설득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경계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일단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난 지금이야말로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

“응.”

“에르네스트도 아마 오늘 피아노를 칠 생각이 없었을 거예요.”

난 작게 속삭이지 않고 똑바로 앉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듣더라도 상관없었다.

되레 이 상황 자체가 아나스타샤를 도망치지 못하게 할 테니.

방금 전에 피아노 칠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고 꼼짝도 하지 않았던 아나스타샤는 내 말에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방금 그 연주는 생각 없이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말이니? 신곡을 준비해 온 거잖아.”

“작곡 프로그램으로 만들던 신곡은 있었죠. 프로듀서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고. 하지만 실험이란 말까지 써 가면서 연주하진 않았어도 되는 것이었어요.”

“방금 우리 똑같은 것 들은 거 맞지? 난 전혀 못 느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추측이에요.”

같은 것을 들었고, 그의 연주엔 구조적 한계 외의 모자람 등을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난 충분히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그동안 치료에만 전념하면서 피아노는 연습하지 않았다.

지금 불완전한 한 손만으로 애를 쓰는 것보단 차라리 치료를 빨리 하는 쪽이 낫다는 것을 그도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만약 오늘 피아노를 칠 예정이 있었다면 내 레슨을 견학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세프 선생님에게 조금 더 진지한 레슨과 상담을 받고 이후에 나와 함께 연습실에서 미리 연습도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완벽주의자인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스튜디오에 와서 연주한 건 그리 계획적인 일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리처드가 물었다.

“그럼 네 추측에 의하면 에르네스트는 오늘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무리했다는 거네?”

“예. 아마도.”

“왜?”

“그건 모두 아실 거라 생각해요.”

내 말에 그는 조용히 침묵했다.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모르겠다며 의아함을 표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극적이고 화려한 퍼포먼스로 우리를 고취시키고 속이려 했다.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하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러나 그가 정말 무엇을 바랐는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리처드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고, 막연하게 떠오르던 것들이 비로소 정립되었는지 발렌티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하게 프로듀서와 함께 있는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지만, 곧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난 우리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이어 말했다.

“지금 어렴풋이 느끼시는 것들에도 의미를 나눠 주세요. 그리고 지금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피아노 치러 갈 때부터 생각난 건 있었지.”

“그런가요? 음, 발렌티나는요?”

“……나도.”

에르네스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피아노 실력을 선보이고, 멀쩡하지 않음에도 멀쩡하다고 강한 척을 했다.

그건 우리 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난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은 이유일 한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는요.”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일견 모른 척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아까 에르네스트가 연주해 보라고 도발했을 때도 단호하게 무시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피해버리려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난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지간히 강한 그녀도 내 시선을 그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무슨 말인지. 저 애가 왜 그랬는지도. 내가 이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는 것도.”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나스타샤는 오늘 하루만 해도 너무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듯 보였다.

결국 하나둘 견디지 못하고 내려놓게 된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평소 에너지 넘치는 모습과 달리 축 처진 그 모습에 아련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난 마음을 조금 독하게 먹기로 했다.

저녁 식사까지 함께 있기로 했지만, 지금 제대로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한다면 중간에 그녀가 빠져나갈 것 같단 직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대충 정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나스타샤는 아예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쓴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내가 한동안 저 애를 피아노 실력으로 이겨보겠다고 집중하고 있었던 건 다들 알고 있는 거네?”

“……예.”

“알지.”

우리의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낮게 자조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둔탁하면서도 명료했다.

“그리고 이젠 내가 평생 저 애를 이길 일이 없을 거란 것도?”

리처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도 아나스타샤의 이런 태도엔 불만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왜 평생인데?”

“왜냐면 저 애가 사고를 겪지 않고 쇼팽 콩쿠르에 나갔을 때의 실력을 이제 우리는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우리가 딱히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리고 우린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요 몇 년 동안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한 것은 그에 걸맞은 목표가 명확하게 그녀의 앞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실력 향상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토록 빠르게 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라이벌이란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하지만 거의 최고조의 상황에 이르러서 아나스타샤도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이 상황을 유리하게 생각할 정도로 무심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 회복해서 다시 피아노로 맞붙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고가 없었더라면, 에르네스트가 1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대로 써서 콩쿠르에까지 나가서 어떠한 결과를 냈다면 이보다 훨씬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고.

영원히 그녀는 상상 속의 무결한 에르네스트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건 절대 이길 수가 없다.

“…….”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때문에 난 아나스타샤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슬럼프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되레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문제와 해결방안 등을 몇 번이고 돌이켜 본 후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준비를 마쳐야 하는 콩쿠르 신청은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슬럼프의 원인에 대해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 너희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내 심리적인 위축은 저 애를 라이벌로 생각하기 어려워지면서 생긴 거야. 콩쿠르에도 아마 못 나갈 거야.”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음악에 집중해서 콩쿠르에 나가길 바라고 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정말 시야가 좁고 가까운 앞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아까 리처드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리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두 사람이 우리가 없는 곳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평소엔 시크한 편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 연주자들을 그냥 두고 보진 못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슬럼프를 겪었을 때도 무작정 참견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정말 신경을 많이 써 주었지만, 이번엔 별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드도 결국 알아서 하라는 듯 의자를 뒤로 빼며 다리를 쭉 뻗었다.

아나스타샤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걸로 그녀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저 애는 날 가만두지 않겠지?”

“…….”

에르네스트는 어쩌면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직접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고 당사자인 에르네스트가 그런 걸 느낄 필요는 없다고 우린 생각하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앞에서 늘 강한 태도만 보이려는 부분이 그 증거였다.

물론 아나스타샤도 그걸 잘 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면에선 나보다 조금 더 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따가 조금 짜증을 낼게.”

“……예?”

깜짝 놀라 묻자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저 애도 내 신경은 안 쓰는 게 좋아. 모든 면에서. 그러니까 진저리나도록 만들면 조금 매정하게 굴 수 있겠지.”

“아나스타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마찬가지야. 타티아나.”

오늘 있었던 일련의 일들로 아나스타샤는 또 무언가 마음속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일부러 힘을 더 쓴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에 더 힘을 실어준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은 편해진, 하지만 무언가 내려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만 나 같은 건 내버려둬. 그러면 아마 나도 쓸데없는 미련 가지지 않고 내년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이해하니?”

솔직히 난 그녀에게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었다.

나도 조금만 더 흔들렸더라면 그녀와 별다를 것 없을 것이란 걸 너무나 잘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연이 오지 않고, 에르네스트가 내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나야말로 아나스타샤보다 훨씬 심각하게 슬럼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냈다고 해서 아나스타샤에게 잘난 척하며 왜 이겨내지 못하냐고 다그칠 순 없었다.

조용히 침묵하자 아나스타샤가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이해한다고 생각할게.”

조용한 대화만이 오갔을 뿐이지만 분위기는 이를 데 없이 싸늘해져 있었다.

발렌티나는 잔뜩 움츠러든 채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고, 리처드는 그냥 모르겠다는 듯 두 발을 쭉 뻗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금방이라도 가겠다고 할 태도였다.

오늘은 이제 여기까지인가 생각할 때였다.

“다 했어.”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하던 에르네스트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착 가라앉은 테이블 분위기를 보자마자 바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는 듯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

“왜 그러니.”

“저번에 네가 여기서 연주한 녹음이 아직 남아있는데, 내가 들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프로듀서가 네 허락 받아 오래. 허락해 줘.”

“……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감정을 싣고 확 들끓어 오른다.

아까 일부러 짜증을 내겠다는 말은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있었고,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자극하려고 작정한 사람이었다. 싸움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다.

아나스타샤가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알려줘서 고마워. 당장 지워버릴게.”

“어차피 지울 거면 내가 들어봐도 되잖아.”

“네가 그걸 들으면 뭐? 또 조롱이나 하겠지. 난 그런 거 이제 싫어.”

“……야. 내가 언제…….”

에르네스트도 정말 화가 나기 시작하는지 인상을 쓰며 아나스타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선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갑자기 무슨 힘이 난 건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쉽게 내 손에 이끌려 도로 소파에 파묻혔다.

“……??”

당황한 아나스타샤는 꼼짝도 못했다. 난 고개만 슥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녹음하러 갔다 올게요.”

에르네스트가 다 했다고 하니까 다음엔 내 차례다.

난 이어서 에르네스트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조용히 들어 주세요. 아시겠죠?”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나스타샤를 가만두지 않으려던 에르네스트도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멈칫했다. 그 역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녹음하겠다고 알리고는 그대로 부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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