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7화
소파에 푹 파묻힌 채로 아나스타샤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축 늘어졌다.
다른 친구들이 보고 있으니 얼른 일어나야겠단 생각은 들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가 부스로 나가버리고, 중간에 애매하게 서 있던 에르네스트도 겸연쩍은 듯 어슬렁거리더니 결국 아나스타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역시 타티아나가 조용히 하라고 한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경고에 가까웠다. 더 이상 아나스타샤를 자극하지 말라는 경고.
‘……신경 쓰지 말래두.’
마지막에 꽤 정나미 떨어지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도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운동신경도 없고 몸이 약한 터라 평소 무언가 강하게 쥐는 것도 잘 못하지만, 종종 깜짝 놀랄 정도의 힘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와, 친구들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여전히 계단에서 타티아나가 순간적으로 아나스타샤를 끌어당겼던 일을 아나스타샤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타티아나는 해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그녀를 자극해서 피아노 앞으로 내몬다면, 더더욱 강하게 반발하여 질리게 만들 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못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옆에서 누가 말린다면 독하게 대해서 상처를 입힐 각오까지 되어있었다. 그게 타티아나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라도 한듯 조용히 있던 타티아나는 말이 아니라 물리력을 사용해서 아나스타샤를 침묵시켰다.
그대로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겨 소파에 묻어버린 것이다.
“…….”
거의 땅에 고꾸라진 기분으로 아나스타샤는 온몸의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나스타샤는 어릴 적 호신술도 꽤 배운 적이 있었다.
같이 배우던 또래 여자애들은 아나스타샤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남자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균형감각도 없고 힘을 쓰는 요령도 잘 모르는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를 쓰러뜨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해냈다. 계단에서 아나스타샤를 낚아챘을 때와 같은 그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이번에도 끌어낸 것이다.
‘그 애가 움직이는 건 해야만 할 때…….’
피아노 앞에서,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위험할 때 타티아나는 움직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아나스타샤는 우울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얌전히 떠날까 생각했던 것도 이런 바보같은 모습을 타티아나가 보지 않았으면 해서였는데, 여러 설득과 자기합리화에 넘어가서 맴돌았던 결과는 결국 이렇게 되었다.
“…….”
울적한 기분으로 아나스타샤는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마이크를 통해 타티아나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주에 앞서 준비 중인 것 같았다.
다시 이번엔 에르네스트를 돌아본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삐딱하게 팔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면 하고픈 말이 여전히 많아 보이지만, 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하란 말을 충실히 지키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것 봐, 그냥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지 그랬니. 그럼 타티아나한테 혼날 일도 없었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목적을 알아버린 후로 에르네스트는 필요 이상으로 아나스타샤를 신경 쓰고 있었다.
거기엔 그녀를 연적으로서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명목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남자애였더라도 정말 에르네스트가 지금처럼 했을까?
여전히 우습게 보고 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더 문제는 우스운 게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에르네스트와 마주보고 있는 것도 거북했다. 그가 싫은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를 보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하지만 지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도, 연주를 막 준비하는 타티아나를 두고 자리를 뜰 순 없었다.
적어도 아나스타샤에겐 지금 앉아서 다음 이어질 연주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가까스로 몸을 조금 일으켜서 찻잔을 들었다. 입술을 조금 축이고 나니 앉아 있을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자세로 앉은 아나스타샤는 들려올 음악을 기다렸다.
혹시 그녀가 쇼팽을 연주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나스타샤의 슬럼프의 해결을 돕기 위해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게나 열성이니까, 아마 타티아나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그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쇼팽을 연주하면 더더욱 헤맬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쇼팽 연주를 자주 하지 않지만, 가끔 연주하는 그 곡엔 정말 그녀의 에센스라 할 수 있는 해석이 들어차 있어서 듣는 모두를 홀리는 면이 있다.
그 음악의 수준은 너무나도 높다. 아나스타샤가 지금 제대로 듣고 이해해서 자신의 발전역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적으로나마 연주할 수 있는 지금의 상태마저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을 가지고 아나스타샤는 양손을 꽉 쥐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
혹시나 했던 불안과 달리 타티아나가 처음 꺼내든 곡은 쇼팽이 아니었다. 저번에 들었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용 프로그램 그대로였다.
그 음악에서조차 타티아나의 다정한 면이 느껴진다.
얌전히 듣고 있으라며 경고하고 피아노로 향했지만, 지금 강압적으로 쇼팽을 쏟아냈다면 아나스타샤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이 연주에 담겨 있었다.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음악은 분석을 거칠 것 없이 그냥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나스타샤는 손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을 풀고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들어본 것이라 그런지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리허설 없이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연주해서 녹음한다면 30분 정도 걸린다.
일단은 연주는 그냥 듣고, 연주가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해 봐야 했다.
타티아나도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으니까 에르네스트와 싸우지만 않고 잘하면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첫 번째 목적을 그렇게 삼기로 했다.
“…….”
그렇게 생각하며 친구들을 다시 돌아본다.
타티아나의 프로그램을 스튜디오에서 처음 듣는 발렌티나와 리처드는 벌써 그녀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선 넋이 나가 있었다.
물론 타티아나가 직전에 보인 서늘한 태도를 기억하는지라 여전히 얼굴엔 묘한 불안감이 머물러 있지만, 그래도 음악만큼은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데에서 안도를 얻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확인한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자연스레 에르네스트에게로 향했다.
연주에 집중하던 그는 시선을 눈치채고는 아나스타샤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엔 불만이 아주 가득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
아예 도발에 넘어가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있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할 건데? 아까 타티아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까지 들은 데다가, 지금은 음악이 연주되고 있으니까 정말 한 마디도 못 하겠지?
묘한 장난기가 들어서 아나스타샤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정말로 열이 받았는지 에르네스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의 노트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그 위에 무어라 마구 쓰더니 북 찢어선 아나스타샤의 앞으로 쭉 밀었다.
그 위엔 [장난칠 생각 있으면 이따가 피아노 쳐.]라고 적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팍 썼다.
‘미치지 않았니?’
타티아나가 조용히 하라고 한 게 입만 다물고 있으란 뜻인지 알아? 이런 거 하지 말란 뜻이잖아.
심술궂게 입술을 달싹이던 아나스타샤는 앞의 종이를 힐끔 보기만 하고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런 유치한 공작에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무시하고 얼굴을 돌리고 있자 잠시 후엔 무언가 날아와 그녀의 옆얼굴을 때렸다.
이번엔 진짜 참을 수가 없어서 휙 돌아보니 대체 한 손으로 어떻게 접었는지 종이비행기가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 종이비행기를 펼쳐 보니 '펑' 하고 폭탄 터지는 폭발음을 커다랗게 써 놓았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도 펜을 꺼내선 종이 위에 빠르게 써서 돌려보냈다.
[그만 괴롭혀.]
[뭘 괴롭혀? 내가 무슨 어려운 말이라도 했어? 지금 한 손으로 필담 주고받는 것도 어려운 나도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왜 넌 못하는데.]
내가 했으니 너도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비겁하다. 왜냐하면 에르네스트와 그녀는 정말 모든 것이 다 달랐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참으려 했던 짜증이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펜을 움직였다.
[넌 긍정적이잖아. 앞으로도 그럴 테고.]
[내가 그렇게 보여?]
[실제로 그렇잖니? 스스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부족한 부분은 컴퓨터를 써서 채운다는 게 누구나 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세상의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렇게 컴퓨터만으로 작곡을 하기도 하지만, 에르네스트처럼 한 손밖에 못 쓰는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열의를 다해 하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초인적인 인내와 긍정적 마인드가 있지 않고서야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는 그 점을 절대 얕잡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비행기로 날아온 종이에도 글을 써선 대충 접어 휙 날려보냈다.
[내가 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못 했을 거야. 난 사실 널 진짜로 존경해.]
에르네스트와 격차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앞으로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고만 있었지만, 문제는 불리한 것이 아님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생각치 못한 진지한 말을 마주하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리곤 조용히 답장을 써서 돌려주었다.
[그건 내가 특출나서가 아니야.]
묘하게 재수 없는 말처럼 보이지만, 겨우 그런 유치한 생각에서 비롯된 답장이 아님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남은 종이에 길게 적었다.
[만약 올해 초에 내가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스튜디오에서 컴퓨터 작곡을 심도 있게 배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병원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너희가 연주하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렇게 아나스타샤 쪽으로 보내고는 잠시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이어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다음으로 메시지가 그녀에게 향했다.
[나도 다르지 않아. 절대로 못 했을걸.]
차라리 긴 말을 스마트폰으로 쓰고 짧은 걸 필담으로 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메시지로 날아온 이 말이야말로 정말 에르네스트에게 있어선 어려운 말이라는 걸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어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지금 너희가 날 어떻게 보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상당히 억지를 쓰고 있는 중이야.]
아나스타샤가 진심을 말한 만큼 에르네스트도 꽤나 진지한 태도였다.
평소 그가 정말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히 그만큼 완벽주의적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런 큰 사고를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만큼 이성적으로 에르네스트는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존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은 그만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종이에 짧게 한마디를 적고는 두 장 모두 돌려주었다. 이걸로 끝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해냈잖니.]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답변이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아나스타샤가 어떠한 행동을 하기 전에, 한 장이 더 날아들었다.
[내가 받았던 모든 걸 타티아나는 너에게도 공평하게 나누어주려고 하잖아.]
들려오는 연주를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있다가, 답장 없이 다시 종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에르네스트의 말이 전부 옳다는 건 안다. 그가 아나스타샤를 우습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진실되게 이야기하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그건 바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어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가 다시 정갈한 필체로 말했다.
[타티아나뿐만이 아니야. 당장 네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봐.]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지금 여기에 둘밖에 없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옆을 보니 리처드와 발렌티나는 관심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체 필담으로 무슨 말들을 주고받는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멈칫하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다시 적었다.
[저 애들도 널 오랜 시간 봐오면서 네가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너희가 날 겪어 온 것처럼, 나 역시 날 판단해온 시간이 있어.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하지만 바뀌었지.]
아나스타샤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펜을 쥔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무지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타티아나가 마침 한 곡을 마무리 짓고 음악이 멎었다.
그때, 에르네스트가 양옆으로 살짝 눈짓하더니 말했다.
“괜찮아. 다들 널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는 앞에 있는 종이들을 휙 거둬선 리처드와 발렌티나에게 줘 버렸다.
아나스타샤는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으로 얼이 빠져 있다가 급히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