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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98화 (898/1,277)

##  898화

아나스타샤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소파를 짚고 일어나려는 행동과 팔을 뻗어 에르네스트를 제지하려는 행동이 이상하게 얽혀서 그냥 허우적거렸을 뿐이었다.

필담을 나누었던 종이 두 장은 각각 리처드와 발렌티나의 손에 쥐어졌다.

두 사람 역시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종이를 건넬 줄은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으나, 아나스타샤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종이로 내렸다.

허락을 구하는 것보단 지금 빨리 읽고 차라리 나중에 화를 내도 받아주겠단 심산이 눈에 보인다.

휘갈겨 쓰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필체가 좋은 편이었다.

내용도 그리 많지 않았고, 종이를 읽는 눈동자를 보니 순식간에 다 읽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의 종이를 바꿔 보기까지 했다.

두 장에 나눠서 대화가 분산되어 있는데다가 스마트폰 메시지로 주고받은 말들도 있으니 아마 전체 내용을 정확하게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단락적으로 쭉 늘어놓고 보기만 해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엔 문제가 없다.

“…….”

아나스타샤는 분함과 배신감 등으로 목 근처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진지하게 둘이서 이야기하던 걸 동의도 없이 다른 친구들에게 공유한 것도 화가 나고, 그걸 또 아무렇게나 읽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 명 모두가 미웠다.

오늘 분위기적으로 민폐가 많았다고 생각은 하고, 때문에 미안함도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피곤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잘못하고 있진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그의 잘못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며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멋대로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경솔할 줄은 몰랐다. 따지지 않고는 못 참을 것 같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도 다시 한번 작게 말할 뿐이었다.

“괜찮아.”

“…….”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곳이 스튜디오만 아니었다면 소리를 질러도 몇 번이나 질렀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아나스타샤는 방금 전까지 따지려고 했던 마음이 힘을 잃고 흩어져버렸음을 느꼈다.

이미 여러가지에서 자포자기했기 때문인 걸까.

이젠 무어라 말하기도 싫은 기분을 느끼며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필담으로 나누었던 대화도 떠올렸다.

‘정말 괜찮다고……?’

아나스타샤가 다른 두 사람에게 들키기 싫은 건 에르네스트를 존경한다고 했던 것 정도였다.

이 필담을 주도한 건 에르네스트였고, 아나스타샤는 곤란하면 그냥 답장을 주지 않고 종이를 밀어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리 걸릴 것이 없었다.

그에 비해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특출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힘을 얻었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들을 많이 했다.

정말 자존심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한 느낌이다. 거기엔 타티아나가 강하게 얽혀 있다.

이전과는 태도가 분명 다르다.

자존심이 강한 에르네스트는 평소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한 발자국 정도 남았음을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에르네스트에게 직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한 상태다.

발렌티나에게도 마찬가지. 그러니 두 사람 앞에선 숨길 것 없이 정말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더라도 그리 문제될 건 없었다.

남은 건 리처드였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필담 기록을 다 읽은 리처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테이블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학교에서 그와 복도를 거닐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늘 권태로운 표정으로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듯 다니고 있지만, 그는 사실 정확하게 주변을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도 어쩌면 이해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도 이제 와서 아나스타샤가 먼저 사근사근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녀는 명백히 괴롭힘당하는 쪽이었으니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는지, 또 화를 낸다면 어떻게 내야 할지 가늠해보면서 아나스타샤는 날카로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런데 리처드는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게 뭐야, 아나스타샤. 존경한다고까지 말 할 줄이야?”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 리처드.”

“아니 왜? 보기 좋아서 그러는 건데.”

“너…….”

다짜고짜 놀리기 시작할 줄은 몰라서 아나스타샤는 당혹감을 느꼈다.

진짜로 테이프라도 가지고 와서 저 입을 일단 막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리처드는 나지막이 웃었다.

“뭔가 놀릴 분위기가 아니긴 하네.”

그리고 종이를 팔랑거리며 이어 말했다.

“이렇게 잘 이야기할 수 있으면 말로 할 때도 싸우지 말고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해. 너희 둘 다.”

반성의 여지를 느낄 만한 따끔한 한마디이긴 했지만, 리처드가 하는 말이다 보니 설득력이 떨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마음대로 잘난 척을 하게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이가 없네, 리처드. 너야말로 에르네스트랑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내가 그랬나?”

“오늘은 안 그랬니?”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리처드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목 옆을 긁적이며 말하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 피식 웃더니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

“저 자식 얼굴만 보면 열불이 뻗쳐서.”

“나도 그래.”

“그럼 우린 같은 입장이네.”

“……하나도 든든하지 않네.”

리처드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보니 당연히 가만히 있던 한 사람은 화가 날 만했다.

조용히 참고 듣는 것 같던 에르네스트가 결국 못 참았는지 이를 악무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당사자 앞에서 열불이 나니 어쩌니…… 그냥 이야기 이쯤 하고 다들 나갈까? 밖에서 진짜 끝장 볼래?”

“와우. 큰일이네. 석고 주먹은 못 이기는데.”

“너 그러다가 죽는다 진짜.”

을러대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에르네스트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요즘 성격을 죽이고 많이 점잖아지긴 했어도, 본래 에르네스트는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그를 자주 상대해 본 리처드는 적당히 놀리다가 빠지는 방법을 잘 알았다.

“농담이지. 이런 농담이라도 안 하면 어색해서 말을 하겠냐?”

“…….”

아깐 놀릴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으면서 아주 돌아가면서 가지고 놀려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지금 상황에 꽤 즐거워하고 있었다.

진짜로 다투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이 상황 자체를 유익하게 생각하고 이어나가려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보이는 태도를 정확하게 읽어내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싸늘한 눈빛으로 리처드를 노려보았고, 거기에 발렌티나까지 합세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했다는 눈초리다.

리처드는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필담 쪽으로 주제를 옮겨갔다. 노련한 솜씨였다.

“아무튼…… 네 이야기 이렇게 보면, 힘든 상황에서 타티아나 덕에 최선을 다해주고 있는 중이고…… 그래. 네가 아마 혼자였다면 절대로 지금처럼 음악가로서 활동할 순 없었겠지. 그건 내가 확실하게 알아.”

“…….”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그만큼 영향을 받아 잘 해냈으면 하는데 지금 슬럼프란 말이지. 내가 보기엔 지금 여기에서 나만 모르는 퍼즐조각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실실 웃으며 장난이나 치고 있지만, 리처드는 분명히 여기 모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을 꿰뚫어보고 있다.

아까 전 다 같이 모여 앉아 있었을 때 아나스타샤가 우울하게 했던 말들에서 전체 퍼즐의 윤곽을 파악했단 직감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섬뜩함을 느끼며 팔짱을 조금 더 공고히 했다.

리처드가 슥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퍼즐조각의 행방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딱히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어떻게 생각해? 아나스타샤.”

아까 고민했었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지금 아나스타샤가 처해 있는 표면적인 상황은 극심한 슬럼프로 인한 콩쿠르 참가 불가였고,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당연히 피아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들어가려면 퍼즐조각이 필요했다.

여기 모인 친구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지금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혼란과 절망적인 무력감을 설명하려면 그것을 확실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리처드가 묻는 것은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에게 가지는 특별한 감정에 대해서였다.

“…….”

지금 만약 잘 모르겠다고 모르쇠로 대답한다면 리처드도 더 캐묻지 않고 그냥 넘어가 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려 노력해 주겠지.

아나스타샤는 피아노가 있는 부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타티아나가 바로 다음 곡을 연주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이크를 통해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면 대화할 시간이 있다.

리처드가 원하는 퍼즐조각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해 본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본 터라, 약간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는 단순한 말이 나왔다.

“나 사실 지금 좋아하는 애 있어.”

“갑자기? 음, 미안한데 난 유학생활 중에 연애는 하지 않기로 정했거든.”

“…….”

아나스타샤는 리처드를 향한 살의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물론 지금도 장난을 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살려두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 정도로 짜증이 난다.

하지만 진지하게 마음을 먹고 던진 말이 이렇게 농담에 흐트러지자 되레 다음 말은 더 하기가 편했다.

“제발 웃기지 좀 마. 여자애니까.”

“난 남자인…….”

“너한테 말하려고 했던 내가 미친 거지.”

아나스타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진지한 태도를 하라고 신경질을 내기도 싫을 정도다.

이따가 에르네스트와 함께 편을 먹고 리처드를 어딘가에 묻어버렸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건 리처드가 지금 아나스타샤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적인 이야기이니 놀란다 하더라도 실례가 아니라 당연한 일인데도, 리처드는 놀라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애라고 했을 뿐인데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옆에 있는 발렌티나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단순히 여자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그러니 대상을 특정하는 것도 너무나 쉬웠을 것이다.

너무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리처드를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그를 쉽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예상과 많이 엇나가는 반응에 아나스타샤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런 그녀 대신 발렌티나가 조곤조곤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리처드, 이제 장난 그만 쳐. 아나스타샤는 진지하니까.”

“넌 알고 있었던 거야? 발렌티나.”

“……응.”

“언제부터?”

“꽤 오래전.”

발렌티나는 정말 오래 전부터 아나스타샤를 응원해준 사람이었다.

그것도 부담스러워서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도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의 강력한 아군 중 하나였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리처드는 이어서 인상을 쓰고 앉아있는 에르네스트에게도 물었다.

“에르네스트 넌?”

“난 이야기 들은 지 얼마 안 됐어. 직접 듣기 전엔 그냥 어렴풋이.”

그는 할 말만 딱 이야기했다. 이전에 나누었던 긴 이야기에 대해선 일언반구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계속 일관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것들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을 그는 아깝다고 생각한다.

상대하지 않는 쪽이 훨씬 편할 텐데도 그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렇게 이루어진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 구조를 이제 제대로 알게 된 리처드는 짧은 감상을 한 마디 남겼다.

“너희 상황 정말로 복잡하구나.”

말 그대로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복잡함 자체를 이해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미 늦었긴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괜한 부담을 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빠지려면 지금 빠져.”

“너야말로 날 놓아줄 거였으면 아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그냥 둘러댔겠지.”

“이미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아니니?”

“대충은.”

리처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가만있었던 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아나스타샤가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흥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쓰지 않고 진지하게 대했다.

“네 우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제 알았으니까…… 해결책을 찾아볼까.”

“……딱히 해결책을 찾아달란 건 아니었는데.”

“글쎄,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르지?”

리처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아나스타샤는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가슴이 벅차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네 명이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녀로선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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