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9화
에르네스트는 동요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무표정하게 앉아있었지만, 사실은 이 상황에 꽤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
그는 그저 단순히 아나스타샤의 슬럼프에 대한 대증적 조언만 오가리라 생각했다.
리처드는 그런 면에서 꽤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리처드가 갑자기 깊은 이유에까지 찌르고 들어왔고, 혹시 둘러대고 숨기려나 싶었던 아나스타샤는 그냥 리처드에게까지 자신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오픈해버렸다.
때문에 타티아나가 빠지고 없는 지금 이 자리만 놓고 보자면, 정말 기묘한 상황이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광경이 앞에 펼쳐져 있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네 사람은 머뭇거렸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나마 자유로운 입장인 리처드였다.
“그럼 제3자인 내가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당사자들이 모두 앉아 있는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부담을 짊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자리에 다 모여 있으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리처드는 티스푼을 양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일단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너희는 여러 면에서 라이벌 관계라 할 수 있겠네.”
“라이벌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여러 면? 어떤 면인데.”
피아니스트로서든가 연적으로든가 여러 가지 관계들이 그와 아나스타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전부를 지금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않고 일단 살짝 말을 돌렸다.
그러나 리처드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지 마. 교내에서 은근히 떠돌던 소문들 알지? 너랑 타티아나의 관계에 대해서.”
“…….”
“이젠 그게 전 사회에 번졌다고. 뭐,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한데…… 넌 사실상 모른 척만 하고 있잖아.”
“그만.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계속…….”
“아니, 이젠 알겠어. 네가 아나스타샤를 신경 써서 그랬다는 걸.”
그 말에 에르네스트는 반박하지 못했고, 리처드는 이 정도면 설명이 끝났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하지만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할 말은 많았다.
얼핏 리처드의 말만 들으면 에르네스트가 공정하길 원해서 이 상황까지 끌고 왔다고 느껴지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단지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아나스타샤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했다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차라리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사고를 겪는 바람에 아나스타샤가 죄책감으로 움츠러들고, 타티아나는 연민인지도 모를 감정으로 다가오면서 어지러워지긴 했지만.
“아무튼.”
어째서 이렇게까지 복잡해졌는지 이젠 다 파악한 리처드가 이번엔 티스푼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니 너희 둘은 라이벌로서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을 텐데…… 단순하게 봤을 때 가장 쉬운 건 일단 피아노였을 테고.”
약간 어이없다는 어투이기도 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사실 피아노는 피아노일 뿐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있어서 세상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수없이 많다.
피아노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는 건 그저 피아니스트끼리의 우열일 뿐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함께 지내면서 모두들 어느샌가 물들어버렸다.
피아노의 가치는 한없이 격상되었고,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다 따져보더라도 가장 공정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피아노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로 귀결되더라도 불만을 가지거나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역시 피아노뿐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암묵적인 의견의 일치를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대결로 성사되기도 전에 어느 정도 결론이 나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미 아나스타샤는 의지가 없는 것 같네.”
의지가 없다는 말은 매서운 창과 같다. 선생님한테 듣는 게 아닌데도 아나스타샤는 그 한마디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자포자기한 아나스타샤는 크게 상처받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음대로 말하라는 듯 말했다.
“그래, 나 의지 없어.”
“에르네스트는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고.”
“…….”
왜 화가 나는지 에르네스트는 스스로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타티아나가 병원을 구해 주고 시큐리티를 배치하는 등 약간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책임을 지려는 것이나, 제대로 맞서보지도 않고 빙빙 돌던 아나스타샤가 결국 나중에서야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는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처럼 다 놓아버린 것.
그리고 겪고 있는 불확실한 현실까지.
여러 가지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나마 타티아나가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잘 해주고 있어서 에르네스트는 이 이상 흔들리지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만약 타티아나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면 정말 에르네스트도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일단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한마디 정도는 해둬야 함을 느꼈다.
“하나만 말할까.”
조용히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말했다.
“여전히 너희는 내 팔을 보면 움찔거리지. 난 그게 싫어. 연민이나 책임감으로 대해지고 싶지 않아. 그러니 가만히 있겠지만, 내년에 팔이 다 낫고 콩쿠르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은 나도 몰라.”
이전부터 했었던 생각이었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은 짐짓 태연하게 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에르네스트를 마주할 때면 조심스럽다.
지금은 무엇을 하더라도 연민과도 같은 정에 기대어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근처에서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팔이 다 나아서 두 사람이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어진다면, 그땐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의 옆에 다시 바로 서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딱히 봐주고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아나스타샤가 지금 이런 모습을 계속했다간 그때가 되어서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아나스타샤.”
지금 네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계속될 수가 없어.
아나스타샤가 끝내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단지 그녀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타티아나도 덩달아 흔들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미래를 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기회? 네가 나한테 주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아니,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지. 너랑 내가 공정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뜻이야.”
지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아마 세상 수많은 관계들 중에서도 이런 관계는 정말 특수한 경우겠지.
하지만 특수한 만큼 형태가 무척이나 불안정했다. 만약 시간이 더 흐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무너져버릴 관계였다.
에르네스트의 마지막 말에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이죽거리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가 연주를 개시한 것이다.
“…….”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들을 때마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심지어 이것이 제대로 된 홀이 아닌 부스에서 녹음을 하며 펼쳐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신묘하게만 들렸다.
에르네스트도 오래 전 데뷔해서 여러 연주회를 거치고 음향에 대한 공부도 했지만, 타티아나가 대체 음향적인 부분을 어디까지 감안하며 건반을 컨트롤하고 있는 건진 미처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누가 듣더라도 너무 대단한 연주였다.
한창 심각한 이야기를 하던 네 사람은 한순간에 말을 잃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사실 음악이 아닌 다른 주제 위에 타티아나를 올려놓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아무리 멋대로 떠들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일반적이지 않은 음악을 다루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팔에 힘을 주면서 그러한 생각들을 떨쳐내었다.
작곡을 할 때도 종종 머릿속에 파고들던 생각이었다. 그는 타티아나를 경외심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면 영원히 그 옆에 나란히 하는 일이 없을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며 그녀의 곁에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건 부상을 입은 지금도 그를 움직이는 큰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부스 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나스타샤였다.
음악이 살짝 잦아들었을 때, 리처드가 펜을 쥐었다. 그가 쓰는 글은 에르네스트 쪽에서도 보였다.
[그래서, 아나스타샤. 네 목표가 뭐야?]
다시 시작된 필담은 약간 붕 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리처드는 다시 종이를 가져가선 이어 적었다.
[콩쿠르에 나가기로 했던 것 말야.]
아나스타샤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일견하더니 답장을 적어선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봐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피아노로 에르네스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거였지.]
과거형이 되어버린 그 대답을 에르네스트는 그냥 보기만 했다.
리처드는 고개를 저으며 그 아래에 썼다. 두 사람은 테이블 가운데에 종이를 놓고는 번갈아가며 빠르게 필담을 주고받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대화를 온전히 다 볼 수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곤 없는데?]
[그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잖아. 우리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리처드의 마지막 글에 아나스타샤는 펜을 든 손을 움찔했다.
그 말대로였다.
에르네스트를 상대로 공정하게 이기고 싶다는 게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나스타샤에게 그게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건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해야만 한다.
모두 조용히 그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대화의 맨 밑에 써내렸다.
[……타티아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내가 되는 것.]
그건 에르네스트가 생각하는 목표와 똑같았다.
어쩌면 피아니스트로서 운명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동질감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리처드도 웃으며 그 밑에 적었다.
[잘 말했어.]
아나스타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자신의 생각으로 있던 단어들을 문장으로 적어내고 나니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을 다시금 돌이켜보는 듯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친구들 앞에서 이런 말을 썼다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운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기 그 누구도 아나스타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용기있고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으며 또 배려심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와 친구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친구라면 지금 역할은 딱히 필요하지 않다.
리처드가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었다.
[거기에 에르네스트가 필요한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는지 아나스타샤는 펜을 쥐고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종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그 밑에 짧게 적었다.
[아니.]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음악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방음 부스를 뚫고 나오는 잔향마저 온 스튜디오를 진동시킨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친구를 구할 때 그녀가 보이는 힘은 평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하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이 집중력에서 비롯된 무언가라고 판단해왔지만, 어쩌면 초인적인 능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친구를 건져올리기 위한 소리와도 같이 들리는 그 음악에 반응하듯 아나스타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