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0화 (900/1,277)

##  900화

연주를 할 땐 오로지 연주만.

어떤 목적으로든 피아노 앞에 앉았다면 최우선적으로 집중력을 쏟아야 하는 건 음악뿐이다.

난 그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원칙은 종종 흔들릴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

지금까지 손에 각인시켜온 음악을 그대로 펼쳐내는 데엔 문제가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계속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의 상황이 신경 쓰였다.

일단 부스에 오기 전 살짝 압박을 하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다 보통 성격이 아니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리처드와 발렌티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네 사람이 폭발해버리더라도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일부러 아나스타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쇼팽을 피하고 기존의 프로그램을 무난하게 연주하며 시간을 벌고자 했지만, 그조차도 그리 쉽지 않았다.

연주하는 내내 난 혹시나 테이블 쪽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오진 않을까 신경을 쏟아야만 했다.

살짝 어깨가 움츠러들었다는 게 느껴진다.

‘이러면 안 돼.’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턱을 당긴다. 자연스레 어깨가 내려가며 릴랙스된다.

혹시나 지금 내가 연주를 망친다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적어도 연주만큼은 문제없이 해내야만 했다.

천천히 뇌리에서 부스 너머의 모든 일들을 지워내고 더더욱 깊게 침잠하며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음악을 쌓고 다시 그 음악에 영향을 받으며 영원히 되풀이되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이러한 몰입은 전신의 긴장도를 컨트롤하는 것에 이어 정신의 방향을 컨트롤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해 준다.

들려오는 음악이 없을 땐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일이 많았지만, 적어도 피아노 앞에서 난 온전한 피아노 연주자로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난 첫 번째 연주를 마쳤다.

- 좋았습니다. 타티아나.

“다행이네요.”

손을 떼어놓고 나자 부스 안에 설치된 스피커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녹음을 정돈하며 좋았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감탄이 담겨 있었다. 음악에 예민한 그의 칭찬은 믿을 만하다.

일단 듣기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면 되었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시름 놓는 것을 본 프로듀서는 뒤늦게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 그런데 저번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네요? 막혔습니까?

“…….”

우리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엔 별 관심 없다는 듯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무슨 마음으로 여기 앉아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직 녹음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나스타샤와, 그런 그녀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무리해서 더 피아노 앞에 앉은 에르네스트.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금 격돌할까 싶어 일단 무작정 분위기를 식힐 필요를 느끼고 나선 나.

우리 세 사람은 계속해서 답을 찾지 못하고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낫기 전까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게 답답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엔 창피해서 대충 둘러댔다.

“그런 건 아니고…… 집중을 조금 못했네요.”

- 친구분들이 있어서?

그는 재미난 것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짓궂게 다시 물었다.

우리의 두 배는 더 산 그가 보기엔 우리가 하는 것들이 재미있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여유있는 태도에 난 살짝 기분이 상해서 일부러 대충 답했다.

“……글쎄요. 아, 지금 보니 모두들 이야기하고 있네요.”

- 나눌 말이 많은가 봅니다.

“지금 변변찮은 제 음악으론 논할 만한 거리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 글쎄요, 그럼 다른 대화일지도 모르죠.

토라진 목소리로 말해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웃기만 했다.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창 너머에 있는 프로듀서, 그리고 그 등 뒤 먼 곳에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실내이긴 하지만 꽤 먼 거리여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당연히 그 소리가 싱글 부스의 방음자재들을 뚫고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걸까.

방금 연주했던 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또다시 에르네스트가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괴롭힐 것 같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 음악을 근거로 그녀를 더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일단 피아노를 더 쳐서 저 대화를 끊어놓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러 고민을 하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재차 흘러나왔다.

- 미안하지만 타티아나. 저도 지금 여기선 저기 네 사람이 무어라 속닥거리는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청력이 안 좋아져서.

“아, 그……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안 들렸을걸요.”

- 하지만 이 멀리서도 표정은 읽을 수 있죠. 하나는 확실한 것 같군요.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프로듀서는 다른 대답을 가지고 왔다.

- 손을 놓아 버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 약간은 위태롭게 기울어져서 돌아가더라도……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군요.

그 말이 정답일 것이란 확신이 든다.

멀리 보이는 친구들의 모습은 무게감 있고 진지하다.

내가 고민하는 만큼 저 아이들 역시 고민하겠지. 그리고 각자 현명한 대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적분하여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비로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난 다시 프로듀서를 돌아보았다.

- 그러니 타티아나가 해 주실 건 하나뿐입니다. 아시죠?

“……집중해 볼게요.”

- 좋습니다.

그가 다시 녹음 준비를 하고 큐사인을 내렸다. 동시에 난 피아노 건반을 휘둘렀다.

이번엔 조금 더 음악에 잘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을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그리고 리처드와 발렌티나가 들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더더욱 충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보여야 했다.

다시 음악이 내부에서 빙글빙글 돌며 서서히 증폭되어간다. 점점 더 몰입하며 깊이는 깊고 수준은 높게 스펙트럼을 펼쳤다.

그 결과로 움직이는 내 손끝은 건반을 아주 짧고 정확한 속도로 터치했다. 그렇게 울리게 된 소리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 음악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보일 수 있고, 함께 하자고 권유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만족감을 느끼며 또 한 번 피아노로 음악의 경계를 살짝 건드렸다는 감각을 느꼈을 때였다.

불현듯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깃들었다.

음악에 몰두하면서 전신을 던져넣고, 그 위에 뜬 상념이 지금껏 결정내리지 못한 모든 것들을 단번에 풀어낸다.

아나스타샤가 라이벌로 삼았던 에르네스트를 꺾고 증명과 만족을 얻으려 했던 모든 기획이 무너졌다고 한다면, 그 뒤를 내가 맡아주면 될지도 모른다.

“…….”

물론 난 에르네스트에 비하면 정말 나약하고 허무한 사람이다.

실력으로만 놓고 보자면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 다다랐을지 모르지만 에너지의 밝기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라이벌이란 단지 실력을 견주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맞붙어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에너지에서 만들어진다.

그런 부분에서 난 아나스타샤의 에너지를 피아니즘으로 갈고 닦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진 몰라도 라이벌이 될 순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날 정말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거기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지향점 같은 존재로 보는 시선 역시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여러 면에서 난 그녀와 직접적으로 연주자로서 마주하기엔 부적절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바꿀 수 있다.

아나스타샤와 조금만 타협을 보면 된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란 건 그녀도 잘 알 테니, 내가 잘 설득만 한다면 따라와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

1초도 안 되는 사이, 어떠한 진리처럼 난 그렇게 모든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사이에도 내 음악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되레 더더욱 날카롭게 울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난 종종 명상처럼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다시 천천히 건반을 어루만지면서 난 연주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곡은 보다 확실한 이유를 두고 연주하게 되었다.

‘이 음악이 곧 설득이 되겠지.’

아나스타샤가 어째서 에르네스트를 꺾으려 하는지 그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궁극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나겠지. 그 두려움은 좋아한다는 감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난 그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친구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반대로 그 사이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생각이 앞서서 가로막고 두려움이 목을 틀어쥔다.

짓다 만 매듭들이 우리 관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두려움에 억눌려 있을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두려움을 이겨내길 바라는 것처럼, 나 역시 이겨내야만 했다.

다시 한번 더,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도.

그 필요성을 담아 난 손끝에 힘을 쏟았다.

피아노가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소리를 터뜨린다. 눈앞이 찌릿거릴 정도의 압력이 느껴진다.

그것을 즐기며 난 다시 손을 내리쳤다.

“……후.”

남은 곡들의 연주를 마치고 나니 그동안 숨을 한 번도 못 쉬었던 것처럼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스 안 마이크에선 마른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치는 소리였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일단 뒤에 연주한 두 곡만큼은 당장 DVD에 담아도 될 정도로 잘 만들었음을 확신하고는 천천히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시 모두가 있는 메인 컨트롤룸으로 돌아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양손을 내린 채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날 보고도 고개만 까딱할 뿐이었다. 그냥 음악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 같다.

다음으로 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약간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

친구들은 라이터를 들고 종이를 태우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불탄 종이를 끝까지 잘 타도록 빙그르 돌리더니 요령 있게 물이 담긴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잿가루가 물에 내려앉는 걸 보고 나서야 난 물어볼 수 있었다.

“……무엇 하고 계시나요?”

“아무것도 아냐.”

그냥 불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단 건가요?

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가 모두를 위한 테라피라도 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살짝 힘이 풀린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내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는 걸 그 눈빛에서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아나스타샤.”

“뭔데?”

“쇼팽 콩쿠르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면, 그냥 그만두세요.”

딱 잘라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의 눈이 커다래졌다.

난 곧장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로 오세요.”

지금 신청서와 DVD 제출까지 며칠 남았는지,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난 그녀가 다시금 본모습을 되찾는 방법은 이것뿐이라 생각했다.

크게 뜬 눈으로 날 올려다보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민한 그녀는 내 말을 깊게 꿰뚫어본다.

“친구로서 같이 가주겠단 말은 아닌 것 같네?”

“그곳에 가면 저흰 경쟁자예요.”

난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전 음악을 듣고 그녀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면, 아마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린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음악 하나만 가지고도 마주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논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태도도 조금씩 변화되어갔다.

에르네스트가 왜 그녀를 자극하며 몰아세우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나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느낀다.

“도망치지 않으실 거죠?”

“정말 잔인하네, 타티아나.”

도전적으로 묻자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순간 가슴이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상처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되레 그녀는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것에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단지 그 눈빛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니?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그리고 난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을 거야.”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나와 같지만, 그 목표는 달랐다.

“내가 퀸 엘리자베스에 간다면 목표는 무조건 우승이야. 네가 아니라.”

훨씬 멀고 분명한 목표를 그녀는 비로소 자각한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가 뒤쫓던 에르네스트 대신이 될 수 있길 바랐지만, 이미 그녀는 날 한참이나 앞질러 가 있었다.

하지만 난 섭섭함이나 아쉬움을 느끼긴커녕, 너무나 크고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오늘 처음으로 난 아나스타샤에게 진심으로 밝은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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