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1화
타티아나의 마지막 곡이 끝나고, 모두들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말과 글로 나누었던 대화들을 정리하고 이 이후의 이야기를 타티아나 앞에서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각자 생각이 많았던 탓이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고민이 많았다.
단순한 라이벌에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내용까지 파고들면서 아나스타샤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에 따라 어느 정도 스스로 갈피를 잡은 것 같았다.
물론 그 결과가 도피나 외면이 아닌 긍정적인 방향일 것이라 에르네스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돌발적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 걱정스럽긴 했다.
지금 타티아나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
“일단 이거부터 치우자.”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가 의자에서 일어서는걸 보며 에르네스트가 일단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이 필담 내용들을 타티아나에게 직접 보인다 해서 큰 문제가 있진 않겠지만, 전체적인 대화의 맥락 없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적힌 단어의 뭉치들로 그녀를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아나스타샤와 더 조용하고 준비된 곳에서 처음부터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
때문에 종이들을 거둬서 노트 사이에 끼워넣으려고 하는데, 리처드가 그를 제지했다.
“어떻게 할 건데?”
“……왜? 가지고 가서 버리려고.”
“어차피 없앨 거라면 여기에서 없애. 우리가 모두 함께 한 대화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 뚱하니 바라보자 리처드는 앞에 있는 디저트용 접시에 물을 부었다.
그리곤 어디서 가져왔는지 라이터를 꺼내더니 찰칵 하고 불을 켰다.
“태우자고?”
“그게 깔끔하잖아.”
이해는 안 가지만 그가 말하는 깔끔하다는 말엔 설득력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리처드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종종 그가 뜬금없이 꺼내는 말들은 들어줘서 손해 볼 일이 별로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는 종이 한 장을 그 앞으로 내밀었고, 리처드는 냅다 불을 붙였다. 발렌티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 데는 것 아니야? 조심해.”
“잘 하면 괜찮겠지.”
아무래도 한 손으로 하는 게 불안해 보이나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작았던 불꽃이 서서히 커지며 열기가 느껴진다.
그는 불꽃의 방향을 조정하며 종이를 모서리 끝까지 다 타도록 잡고 있다가 접시 위에 잘 내려놓았다.
“…….”
모두가 나누었던 이야기는 재가 되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비록 현실에서의 형태는 잃었지만, 그것은 보다 더 명료하게 기억 속에 남아서 이전까지의 모든 대화들과 합쳐졌다.
고개를 드니 아나스타샤가 마침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다음 종이를 집어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종이를 태우는 것에 대한 동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표시라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 종이를 태우는 도중 타티아나가 테이블 옆으로 왔고, 곧바로 파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연주를 하면서 타티아나 역시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였다.
평소의 신중하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연주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선 타티아나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아나스타샤를 끌어들였다. 그 부름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다.
타티아나가 흩뿌려 놓았던 음악들은 뇌리에 잔류하며 공기를 진동시키지 않고도 꿈틀거린다. 에르네스트는 넋을 놓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그 눈빛에선 굳은 결심이 느껴진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두 사람이 당당히 마주볼 수 있는 곳은 분명 콩쿠르 무대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역시 이러한 제안이 올 것이란 걸 어느 정도 예상했음이 분명했다.
자신 있게 타티아나 옆에 서길 원한다고 말했던 아나스타샤는 보다 도발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고,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애들은 서로를 잘 알지…….’
결국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여기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경쟁을 입에 담았음에도 타티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선 아나스타샤의 뒷목을 감싸며 이마를 가까이 했다.
눈을 감고 이마를 가까이 한 채로 두 사람은 한동안 무어라 속삭였다.
친애와 우정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행동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복잡한 관계를 의식하지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눌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어쩌면 이런 장면에 이상함을 느끼거나 질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기 무의식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 달리 그의 마음속은 평안하기만 했다.
그는 이미 타티아나가 어떤 사람이고, 또 아나스타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그리고 반대로 두 사람이 에르네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
라이벌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사고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원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형태라면 그래도 받아들일 만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연적으로서의 관계다.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도 평안하게 있을 수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절대로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를 제대로 승복시키겠단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고, 또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물론 타티아나의 죄책감이나 집착, 연민 등을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약한 부분을 꿰뚫어보고 멋대로 하는 건 에르네스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행위였다.
때문에 그는 타티아나의 가장 강한 면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종종 인간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사람으로서 에르네스트는 서고 싶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오던 그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타티아나가 곧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단지 친구의 의욕을 되살려주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만으로 보긴 어려운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각이 많던 건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럼 둘 다 퀸 엘리자베스로 가고…… 난 혼자서 쇼팽이야?”
발렌티나가 혼자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타티아나가 당황해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발렌티나도…….”
“아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 그냥 해 본 말이야.”
자신에겐 그 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발렌티나는 한 손을 젓더니 장난스레 웃었다.
“너희가 가서 경쟁하는 사이 난 편하게 쇼팽 콩쿠르에 남아 있어야지. 히히.”
마치 친구끼리 경쟁할 일 없으니 마음 편하게 콩쿠르 무대에 서겠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무대가 작은 곳도 아니고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무대라면 그녀의 말도 조금 오만한 감이 있다.
그런 부분을 짚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리처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거기 너 혼자 나가는 거 아니야. 괴물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하지만 핀잔처럼 들리는 말에도 발렌티나는 아랑곳않고 받아쳤다.
“거꾸로 그 사람들이 경악하게 만들어 줘야지. 어린 괴물이 나타났다고 말이야.”
설마하니 너무 경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염려했던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야말로 발렌티나를 허투루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발렌티나는 그런 큰 무대에 서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멋지게 자신의 음악을 할 방법을 찾아내었고,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건 피아니스트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마음가짐이었다.
멍하니 보던 타티아나가 가느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발렌티나가 준비하던 곡들을 들어본 적 있었죠.”
그리고 곧 그녀는 확신이 가득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요 며칠 아나스타샤랑 연습하면서 더 좋아졌어.”
“후후, 기대되는걸요.”
타티아나의 그런 말은 보통 말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연주로 직결되곤 한다. 그녀는 피아노를 두고 잘 참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타티아나도 발렌티나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로 확인하지 않고 아껴놓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준비된 무대에서 잔뜩 기대하고 들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겠다는 듯 타티아나가 말했고, 발렌티나 역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충만한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대화에 섞인 피아노와 콩쿠르에 대한 주제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자연스레 다른 한 사람에게 향했다.
“일단은…… 아나스타샤.”
“응.”
“아무 곡이나 하나 쳐 보지 그래?”
리처드가 평소 그답지 않게 넌지시 제안했다.
오늘 이후로 아나스타샤가 슬럼프에서 벗어날 것이란 믿음은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결국 소리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 확인하더라도 여전히 엉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모두가 알아보더라도 진심으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해줄 수 있었다.
리처드는 어떻게 되더라도 아나스타샤가 지금 피아노를 한 번쯤 연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기대 어린 시선을 받고 아나스타샤는 잠시 주저했다.
“글쎄…… 쇼팽 말고는 요즘 연습한 게 별로 없는데.”
쇼팽 콩쿠르에 나갈 생각뿐이었던 그녀의 최근 레퍼토리는 당연히 쇼팽의 곡들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슬럼프에 강한 영향을 많고 물들어 있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것들을 다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재조립하기 전에 이곳에서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 다른 곡이라면 당장 쳐도 괜찮을 것 같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었다.
“칠 만한 게 하나 있긴 해.”
연습도 별로 안 했음이 분명함에도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향했다.
부스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내는 데엔 2초도 걸리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로 향했다.
“무슨 곡을 연주할 것 같아?”
“글쎄, 쇼팽은 아닌 것 같고…… 알캉?”
“연습 한 번 없이 알캉이 되겠어? 저 애가 아무리 테크닉이 좋아도.”
“그럼 베토벤이라든가. 저 애 베토벤도 잘 하잖아. 리스트나.”
발렌티나와 리처드가 여러 가지 추측을 꺼냈고, 에르네스트도 조용히 그 말들에 자신의 추측을 얹었다.
일단 지금은 타티아나가 방금 연주했던 네 개의 곡들이 워낙에 강렬했다.
아나스타샤도 그것을 의식하고, 또 같은 콩쿠르에 나가기로 한 것을 생각한다면 타티아나 쪽을 따라갈지도 모른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모두의 추측을 완벽하게 깨뜨려 놓았다.
다단조의 근엄한 목소리. 마치 중무장한 군대의 행진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나온다.
‘……한 손?’
아나스타샤는 모든 것을 왼손 하나로만 구사하고 있었다.
혹시 서주만 그렇게 되는가 했지만, 이어지는 모든 음악이 마찬가지였다. 한 손으로 해낼 수 있는 극한의 테크닉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근래 들어 한 손 연주곡들을 여럿 알아보던 에르네스트는 이 곡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카를 라이네케의 피아노 소나타 op.179.
‘작정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곡이 나올 수가 없어.’
그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기울였다.
당연히 피아니스트가 평소 이런 곡을 따로 연습할 리가 없고, 준비한다면 그것은 특수한 목적을 필요로 할 때뿐이었다.
타티아나가 무대에서 한 손으로 고도프스키의 엘레지를 연주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가 이 피아노 소나타를 왼손에 움켜쥐고 있었음을 에르네스트는 알아차렸다.
에르네스트를 한 손만으로라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사실 아까 전에 에르네스트가 도발했을 때 꺼내들었다면 충분히 그 위력을 발휘했을 만한 곡이었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공격성이 온전히 에르네스트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전쟁터에서 떠밀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병사에 불과했었다면, 지금은 보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전장을 찾아갈 수 있는 장군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민하지 않았다.
오늘 많은 이야기들을 공유한 에르네스트에게 이 정도 더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음악을 펼쳐 나간다.
“…….”
솔직히 조금 방심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당분간 그녀의 음악과 맞붙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이 음악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에너지는 그가 연주한 음악에 비하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만만찮은 피아니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