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2화 (902/1,277)

##  902화

아나스타샤를 슬럼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긴 했지만 난 오늘 그녀를 바로 피아노 앞에 앉힐 생각이 없었다.

그녀도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연습이 되지 않은 모자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긴 싫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이 정도에서 끝내고 혼자 충분히 연습한 뒤에 봐도 늦지 않다.

때문에 난 그녀와 콩쿠르 무대에서 마주하기로 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약속들도 건넸다.

연습이라면 얼마라도 도와줄 테니 퀸 엘리자베스에 낼 DVD 녹화는 다른 날을 잡아서 같이 하자고.

에르네스트를 묶어두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에게도 내 약속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콩쿠르에 나간다면 반드시 우승을 목표로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내 약속을 미소로만 받았다.

리처드가 앞장서서 아나스타샤에게 연주를 제안했을 때,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말리지 않았다. 다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첫 건반을 누르자마자 내 걱정은 완전히 불식되었다.

‘역시 준비하던 곡이 있었어…….’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카를 라이네케의 이 피아노 소나타는 나도 잘 안다.

얼마 전 가을 연주회 무대에 고도프스키의 엘레지를 선곡했을 때, 같이 후보에 있던 곡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깊게 연구하고 선택할 순 없었지만, 난 이 소나타의 기본적인 흐름과 해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음악이 내 공부보다 한참 위에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

카리스마 있는 맥동이 아나스타샤의 부활을 증명한다.

얼마 전 그녀의 쇼팽에서 들었던 그 무게감 없는 허무한 소리가 아니다.

한 손으로 연주하는데도 분명한 가치관과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아나스타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곡을 바라보며 해체하여 자신의 해석으로 정립했는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아카데믹함이 돋보인다.

난 이것이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향해 겨누기 위해 갈아 놓은 하나의 창날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아마 준비한 건 한참 전이겠지. 적어도 가을 연주회 전후 정도일 것이다.

한 손만 쓸 수 있게 된 에르네스트에게 극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외면하거나 연민하지 않고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꺼낼 수 있는 무기 하나 정도는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에르네스트를 의식하고 또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진지하게 보려고 하는지 이 음악만으로도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또 이 음악을 아나스타샤가 아까 전 에르네스트와 맞설 때 꺼내든 것이 아니라 지금 꺼냈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느꼈다.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을 텐데…….’

한 손으로 정정당당히 에르네스트와 맞상대할 목적으로 아나스타샤가 분명히 한 곡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에르네스트는 예상했던 것 같다.

알캉의 오른손 연습곡 등을 언급했던 것처럼.

그때 아나스타샤가 이 곡을 연주했다면 에르네스트와 정정당당한 대결이 되었겠지.

여기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어쩌면 우위를 잡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피아노 연주는 정신적인 요소에 영향을 정말 크게 받는 만큼 이만한 연주를 하진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충격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었을 터다.

에르네스트가 다신 함부로 자신을 몰아세우지 못하도록.

그러나 그녀는 참고 참으며 그냥 넘기려 했다.

난 그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음악을 원하는 형태의 도구로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손에 쥔 음악을 쉽게 휘두르지 않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 왔던 일들을 아나스타샤는 더 현명하게 겪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

두 개의 주제가 다채롭게 변화하며 하나로 이어지고, 이윽고 첫 악장이 끝났다.

소나타 전체를 연주할 생각은 없는지 아나스타샤는 손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엔 충분한 만족감과 성취감이 실려 있었다.

겨우 4분 남짓의, 한 손으로 연주하는 곡으로 그녀는 많은 것들을 증명해냈다.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그리고 언제라도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연주자로서 무시무시한 기량과 강인함을 지녔음을.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그녀는 음악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건 정말로 위협적이었다. 콩쿠르에서의 경쟁 상대인 나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에게도.

옆을 슬쩍 보니 에르네스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얼굴로 부스 쪽에 집중을 쏟고 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그 곡 뭐야? 어? 처음 들어.”

요 며칠간 아나스타샤와 고생했을 발렌티나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두서없이 말했다.

“카를 라이네케의 피아노 소나타예요. 1악장만 연주했네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아? 너도 같이 연습했었어?”

“아뇨, 세상에 한 손 연주곡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발렌티나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러더니 자기는 왜 그 몇 곡도 안 되는 곡들을 공부를 안 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에르네스트가 겪은 사고와 큰 관계성이 없는 발렌티나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냥 마음 아파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그녀를 달래며 웃었다.

아나스타샤가 의자를 밀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동시에 리처드 역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일어날까? 아나스타샤를 맞이하러.”

나나 에르네스트가 연주를 끝마치고 왔을 땐 모두들 그냥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당연히 나도 그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우린 다 같이 일어나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옆쪽에 섰다. 프로듀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자를 빙글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아나스타샤가 돌아왔다.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던 그녀는 우리 모두가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살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미소를 보였다. 방금 어땠냐는 듯이.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냈다.

“브라바.”

“아주 좋았어.”

“그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훌륭했어요.”

아나스타샤는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다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녀의 시선은 의자에 앉아 있는 프로듀서에게 향했다.

그는 얼마 전 아나스타샤에게 혹평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결선까진 갈 수 있을 것이라 했으니 혹평이라기엔 미묘하지만, 그 말은 아나스타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수십 년간 클래식 음악과 연주자들을 가까이해 오면서 쌓은 경험에서 비롯된 객관적인 시선과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학교 선생님들처럼 레슨을 해 주진 않지만, 그의 말은 예비 심사라 하도 무방할 정도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심사를 기다리는 연주자처럼 그에게 물었다.

“어떨까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조금 짧긴 한데…….”

“충분했습니다.”

물론 연주가 끝난 시점에서 이미 프로듀서의 평가는 내려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이럴 땐 과감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짧게 그가 평했다.

“음반 내지 않겠습니까? 아나스타샤.”

“……예? 갑자기요?”

“몇 달 전의 아나스타샤는 불안해하고 또 확신이 없었죠. 마치 핵폭탄 단추를 앞에 두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의 비유는 약간 황당하게 들렸지만, 사실 얼마나 우리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 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정확한 비유였다.

몇 달 전이라 하면 아나스타샤가 음반 녹음을 하겠다고 이곳을 찾아왔던 때였다.

나 역시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녀는 녹음하지 않았다.

난 차라리 한 번쯤 녹음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스스로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얼마 전에 내 두 번째 음반을 이야기했을 때, 아나스타샤도 그 옆에 있었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같은 제안을 하지 않았고 아나스타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 몇 번 아나스타샤를 봤던 기억들을 떠올리듯 미소를 짓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목적을 차치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녹음을 해도 충분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말이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샤는 녹음은커녕 연주조차 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었지만, 지금은 보다 여유를 찾은 모습으로 미소를 보였다.

“……생각해 볼게요. 그건.”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DVD 녹화에 집중하셔야 하는데, 그것도 사실 음반 작업이나 다름없으니. 우선은 그쪽에 집중하시는 게 좋죠. 물론 저도 돕겠습니다.”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솔선해서 그녀를 돕겠다 나섰다.

우리가 이렇게 스튜디오에서 음악들을 연주하고 데이터로 남기는 것 자체를 프로듀서가 돈과 바꿀 수 없는 무언가라 생각하며 기록하고 있다는 건 안다.

그러나 그게 우리가 감사해하지 않을 이유는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준비되는 대로 잘 부탁한다며 예의바르게 말했고 프로듀서는 껄껄 웃으며 이어 말했다.

“사실 이제 와선 이런 생각도 드는군요. 처음부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맞았다고.”

“그런가요?”

“쇼팽 콩쿠르처럼 한 작곡가에만 국한하기엔 아나스타샤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의 폭이 너무 넓습니다.”

굉장한 칭찬에 아나스타샤가 답잖게 말문이 막힌 듯 머뭇거렸다.

그 쇼팽에서 오랜 기간 애를 먹었는데도 이런 칭찬을 듣는다는 게 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쇼팽에 근본적인 무게감과 부담을 느끼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단지 슬럼프를 길게 함께 하면서 감을 약간 잃었을 뿐이니까,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좋아질 것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단지 그녀가 지닌 음악의 가치를 높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어떤 곡들을 준비해갈진 모르겠지만, 기대가 되는군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해할 것 없이, 아나스타샤는 이미 굉장히 높은 수준의 피아노 연주자였다.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곧이어 의자를 컴퓨터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자…… 그러면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해 줄 차례군요.”

지금까지 이런 음악적인 조언이나 평들은 사실 프로듀서의 주 업무가 아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빠르게 무언가를 움직이거나 실행시키거나 했다.

난 여전히 컴퓨터에 대해선 굉장히 약한 편이지만, 이곳에 오래 드나들면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런 식으로 일할 땐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스튜디오 벽 쪽의 엄청나게 많은 기계장치들 사이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CD 한 장을 빼내왔다.

앞면이 코팅되어 있지 않아 반짝거린다. 방금 제작한 것이었다.

그는 종이 케이스 안에 그 CD를 넣고는 내게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타티아나. 필요하신 샘플.”

“아…… 감사합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 방문한 건 미하일 선생님과의 레슨 전에 들어 볼 샘플 파일을 얻기 위해서였다.

디지털화된 음악은 분명 다르게 들리기 때문에, 선생님과 나는 이 DVD가 심사위원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미리 모니터링해 보고 확인하여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감사히 CD를 받고 나니 프로듀서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두 번째 CD를 만들어냈다. 베테랑인 그의 작업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포장해선 아나스타샤에게도 CD를 건네주었다.

“아까 연주한 것도 담았습니다.”

“어라…… 5분도 안 되는 곡을…… 너무 아깝지 않나요? 전 괜찮은데요?”

“하하.”

이 CD 한 장이 아무리 값싸다 하더라도, 한 시간도 넘게 음악을 기록할 수 있는 CD에 단 5분만을 쓴다는 것엔 음악가로서 기본적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가치 없는 낭비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참가할 콩쿠르를 이제 와서 바꾸는 게 어디 쉽습니까? 학교에 가서 지도 선생님을 설득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레슨실에서 이야기한다면 바로 피아노로 설득하면 되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설득할 방법은 이걸 재생하는 겁니다.”

그의 말이 옳다.

아나스타샤도 언변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 아마 학교에서 설득하는 데에 큰 문제를 겪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런 노력을 했음을 증명하는 CD를 한 장 가지고 간다면 그 설득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 분명했다.

아나스타샤가 이해한 듯 손을 내려다보자 프로듀서가 한 가지 더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것도 하나하나 기념이 되더군요.”

음악을 기록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듀서는 정말 여러 음악을 들어 오면서 그것들에 담긴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음악을 단지 진동의 집합이라 생각하지 않고 오래 듣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영생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나보다 훨씬 더 교조주의적인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난 그가 좋았다.

아나스타샤도 마음에 드는지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그렇죠?”

“저번에 연주하셨던 쇼팽도 혹시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라도 말씀만 해 주시죠. 이렇게 만들어 드릴 테니.”

약간은 장난조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제안했고, 아나스타샤는 이전 같았으면 단호하게 받아쳤을 그 제안을 이번엔 가볍게 받아주었다.

“그건 나중에요.”

여유롭게 이야기하는 그녀는 훨씬 더 멋지고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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