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3화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조금 일찍 일어나 아침연습을 마치고 식사 준비를 도왔다.
드미트리는 이제 기초적인 것들은 내게 거의 다 가르치기도 했고, 겨울엔 추우니까 일찍 나오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난 이것도 일련의 아침 루틴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사실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을 땐 언제까지 이것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저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걸 계속 지켜나가다 보니 결국 루틴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피아노 외의 취미랄 게 전혀 없는 내게 있어서 요리는 그나마 생긴 취미 중 하나였다. 기왕에 하게 된 것이니 무뎌지게 두는 건 아깝다.
오늘도 난 두어 개 정도 되는 메뉴를 맡아서 준비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가끔 내가 한 걸 맞추기도 하고, 맞추지 못하기도 한다. 나 혼자 즐기는 퀴즈같은 것이었다.
테이블을 차리고 같이 자리에 앉자, 루슬란 오빠는 스푼을 까딱이더니 내게 말했다.
“이 오믈렛 네가 만들었어? 타티아나.”
“정답이에요. 어떻게 아셨나요? 너무 맛있는 냄새가 느껴지셨나요?”
“아니, 플레이팅 보고.”
“…….”
그건 반칙 아닌가요?
내가 부루퉁한 얼굴로 바라보자 루슬란 오빠는 버릇없게 테이블을 탁탁 치며 웃었다. 아버지의 눈빛이 째릿하게 날아든다.
묘하게 잘그락하는 소리를 내며 포크를 움직이시던 아버지가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으셨는지 내게 물었다.
“어제 저녁은 밖에서 친구들과 먹었다고 했었지. 어떤 친구들이지? 타티아나.”
“아, 많아요. 아나스타샤랑 발렌티나랑…… 그리고 에르네스트, 리처드도요.”
“늘 듣던 이름이구나.”
“제 교우관계가 늘 그렇죠.”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아버지가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무표정으로만 보이긴 하지만, 난 이제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너무 농담처럼 답했나 싶어서 살짝 고민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오늘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셨다.
“좋은 시간을 보냈나 보구나. 싱글벙글하는 걸 보니.”
“제가 싱글벙글하고 있었나요?”
“그래. 당장 이 오믈렛도 싱글벙글하고 있는데.”
“……??”
난 내가 만든 오믈렛을 바라보았지만 표정 같은 건 읽어낼 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재미있는 표현을 하시곤 한다.
어쨌든 내가 꽤 실없이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제 스튜디오에서 녹음과 연습을 마치고 나서 저녁까지 모두와 함께 했던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으니까.
그 기쁨의 감정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리고 일어나서도 날 무척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좀 이상해 보일까 싶어서 일단 이유라도 설명드릴까 했는데, 아버지는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듯 천천히 블린을 자르며 말씀하셨다.
“올해도 거의 다 지나갔구나.”
이제 12월 한 달만이 남아 있었다.
올해 봄에 많은 기억을 되찾고 나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어쩌면 마지막까지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제 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슬럼프에서 벗어났고 콩쿠르 출전을 다시금 결정했다.
에르네스트는 부상 치료에 전념하면서도 작곡, 그리고 피아노 연주에도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난 모두에게 내년엔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곧 막연한 긍정이나 다름없고, 그런 건 크게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두운 생각들을 잊고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 괜찮을 것이다. 내 주변엔 현명한 친구들이 이토록 많았으니까.
생각에 초점을 맞추느라 음식을 먹지 않고 스푼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아버지가 가볍게 말을 걸어 내 초점을 현실로 돌려놓으셨다.
“앞으로 남은 올해도 잘 마무리 짓길 바란다. 타티아나.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후후, 걱정 마세요.”
난 당차게 대답하며 수프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우리 세 가족은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했다. 마침 나온 연말이란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떠올랐는지 루슬란 오빠가 넌지시 물었다.
“올해는 어디 안 나가?”
“어딜요?”
“연주회 같은 거. 내가 얼핏 듣기로 부르는 곳이 꽤 많았다고 하던데.”
빅토르에게 간 공식적인 요청도 많았으니 그 보고를 받은 아버지나 오빠는 내가 지금 그런 것들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두 분은 지금까지 연주회 등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않고 전부 내게 맡겨놓으셨다.
사실 아무 말 없더라도 당장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메세나 활동의 주역으로서 내 움직임이 정말 큰 영향을 줄 것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특히 지금 같은 연말엔.
그래도 결정한 것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DVD녹화와 음반 제작. 그 두 가지만이 올해 내가 할 일이었다.
“대외 활동은 내년부터 해도 되겠죠.”
“그래.”
루슬란 오빠는 내가 그리 결정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오빠는 내가 회사나 가문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부상상태고, 때문에 내가 연주회 등을 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 연관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걱정하는 중이다.
지금은 내가 겉으로나 내면으로나 안정되어 있는 편이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꽤 불안해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걱정이 많은 오빠를 보며 난 웃어보였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내년엔 초부터 아마 재미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년에 모든 걸 마무리하고 나서 알려준다면 꽤 놀라지 않을까 싶다.
루슬란 오빠가 깜짝 놀라는 것을 상상만 해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오빠 역시, 나에게 놀라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더 캐묻지 않고 짧게 말할 뿐이었다.
“기대되네.”
“그렇죠? 후후. 그 오믈렛의 맛처럼요.”
“이건 보기만 해도 알아. 맛있을 거란 걸.”
고마운 말과 함께 루슬란 오빠는 까딱이던 스푼으로 오믈렛을 찔렀다.
***
학교에 일찍 도착해선 오늘 교과목들을 확인하고 아침 예습을 조금 하고 있자니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드니 먼저 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타티아나.”
“아, 좋은 아침이에요.”
근래 조금 우울하고 힘이 없던 아나스타샤는 온데간데없고, 오늘은 정말 태양같이 밝은 모습이었다.
황금색 머리칼이 휙 나부낀다. 그녀는 성큼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끌어당겨 포옹까지 하고는 놓아주었다.
사실 그녀와 은근한 서먹함과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었는데, 한순간에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진 기분이다.
이상하거나 어색하진 않았다. 난 사실 그동안 이런 따뜻한 인사를 굉장히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일찍 왔네. 방금 왔니?”
“예. 눈이 와서 일찍 나왔죠.”
“나도.”
오늘 아침 아버지가 했던 말이 이해될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그냥 눈 때문에 일찍 집에서 나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싱글벙글하는 표정이 풀리질 않는다.
난 괜히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하하, 뭐야. 알면서 묻는 거야?”
어제 같은 시간을 보냈던 만큼 사실 물어볼 것도 없다는 건 안다.
그러나 이렇게 물어봐 준 것이 고맙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기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어제 집에 가서 또 따로 연습 조금 해 봤거든.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태가 괜찮았어. 어느 정도냐면 음……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몇 곡 쳐 봤는데 할 만하더라고.”
손가락을 들어올리곤 하나씩 꼽아가면서 그녀는 어제 연습했던 곡들을 말해 주었다. 그 어떤 것도 그냥 간단히 쉽게 연주할 수 없는 곡들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확실하게 돌아왔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난 그녀를 따라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말했다.
“그 정도면 문제없겠네요. DVD 제출용 곡은 그 정도 난이도에서 맞추실 거죠?”
“응. 내용 보니까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이전까지 기록들 보니까 제일 어려운 것 두어 개 정도랑 베토벤 하나 끼우고…….”
보다 본격적으로 그녀와 난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연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보낼 DVD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였다.
뻔하면 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주제였는데, 우린 사실 신청 마감 기한이 거의 다 된 지금에 와서야 이 이야기를 심도 깊게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내게 스트레스를 받지만 않는다면 난 얼마든지 그녀를 도와 무엇이든 할 생각이 있었다.
겨우 네댓 곡을 고르는 일이었지만, 우리 사이에 오가는 곡은 수십 곡이 넘어갔다.
그중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곡들도 있어서, 난 몇 번 아나스타샤에게 확인하기까지 해야만 했다.
그녀가 나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또 앞으로도 할 예정인지. 잠깐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하던 아나스타샤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오늘 기분이 좋은 건 단지 슬럼프에서 벗어나 여러 곡들을 쳐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 맞아. 그리고 쇼팽.”
“쇼팽이요?”
“쇼팽의 곡들로 내가 길게 애 먹었잖니? 그래서 어제 쳐 봤는데. 희한할 정도로 별 문제 없더라고. 정말 피아노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슬럼프와 얽혀 오래 고생한 곡들은 보통 그것을 이겨내고 나서도 잘 손이 안 가기 마련이다.
막상 친다 하더라도 슬럼프 때의 트라우마나 버릇 등이 남아서 잘 안 되기도 하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해 보니까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기왕 준비한 게 아깝기도 하니까 퀸 엘리자베스에서도 적절히 써 보려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내게로 향했다.
“넌?”
나도 사실 쇼팽의 곡들에 대해선 생각이 많다.
여전히 쇼팽은 내게 의미가 깊고, 쉽지 않다.
때문에 쉽게 아무 곳에나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무대는 결코 아무 무대가 아니다. 게다가 거기엔 세연이 출전하기도 했었고.
굳이 세연 앞에서 쇼팽을 선보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쇼팽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의식한다면 쇼팽을 꺼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슬럼프를 겪고 한층 달라진 아나스타샤까지 한 무대라면…….
“생각중이에요.”
“얼마 안 남았는데?”
“DVD에 바로 넣을 곡들은 준비가 끝났으니까요.”
일단은 지금 쇼팽을 생각할 틈은 없다.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으로 준비 중이었으니, 필요하다면 예선을 치른 후의 곡들에 넣으면 될 일이다.
내가 쇼팽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무작정 무겁게 여기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해한 아나스타샤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정도면 되었다는 것 같다.
책상에 느긋하게 걸어앉아 있던 그녀는 다리를 탁 차며 앞으로 뛰어내리며 말했다.
“아무튼…… 난 그럼 이제 선생님에게 허락받는 게 일이겠네. 지금 갔다 올게. 아침에 허락받는 게 편하겠어. 이따 오후에 가면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하실 것 같기도 하고.”
“같이 가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내가 뭐 혼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말하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날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엔 강인함이 서려 있었다.
난 그녀와 정말 큰 무대에서 보게 될 것이란 확신을 느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가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눈 진짜 좀 안 그치나.”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난 깜짝 놀라 반쯤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안녕. 너희도 일찍 왔구나.”
에르네스트는 오른손을 흔들며 인사해왔다.
분명 조금 더 있어야 통원 치료를 받으며 등교하겠다고 했던 그가 이렇게 학교에 올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런 걱정도 들었지만, 단지 그가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산하게 비어있는 것 같던 교실에 무언가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