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4화 (904/1,277)

##  904화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반에 와 있던 친구들 모두가 깜짝 놀라 에르네스트를 둘러쌌다. 재잘거리는 질문들이 마구 쏟아졌다.

“어젠 수업 안 듣고 오후에만 오지 않았어?”

“이제 등교하는 거야?”

“눈이 이렇게 오는데 나라면 며칠 더 쉬겠…… 아니, 농담이야. 얘들아.”

괜한 농담을 던졌던 안드레이가 잔뜩 눈총을 받고는 저 멀리 도망쳤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두의 질문을 듣고는 가볍게 웃더니 별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왼팔을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이젠 많이 괜찮아졌거든. 기말고사는 제대로 치고 싶기도 하고.”

“와, 이 와중에 공부 생각?”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치료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

여러 걱정들이 나온다.

여전히 깁스 중인 에르네스트의 모습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연주자인 우리가 보기엔 불안하게만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하여 아프거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

에르네스트가 지금까지 학교에 잘 나오지 않고 얌전히 입원 치료만 집중적으로 오래 받았던 건 그러한 부분에 대한 배려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젠 슬슬 괜찮지 않냐는 표정이다.

“일단 오늘 하루 통원해 보고 괜찮으면 앞으로도 학교는 나오려고. 병원에 더 있기 싫기도 하고…… 너희가 보기엔 좀 불편하겠지만 이해 좀 해 주라.”

“응?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당연히 네가 나온다는 건 낫고 있다는 뜻이니까 괜찮지!”

“조만간 이거 풀어버릴 테니까. 조금만 참아 줘.”

지금 제일 답답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 본인이다.

아예 대놓고 에르네스트가 이렇게까지 말해버리자 그를 다시 병원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는 아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 역시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마저 마친 에르네스트는 흩어지는 인파 속에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그를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눈인사를 던지더니, 여전히 놀라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멋쩍게 말했다.

“내가 온다고 했었잖아.”

“다음 달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

뭔가 대충 넘어가려는 듯 말하고 있지만, 난 어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분명 신중하게 통원과 등교를 결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오늘 나올 작정이었다면 어제 바로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건 갑자기 결정한 일이다. 합리적으로 컨디션을 챙기고 현명하게 행동할 줄 아는 그가 왜 이러는 걸까.

잠깐 생각해 본 바로는 어제 있었던 일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어제 점심에 본 모습과 오늘의 그는 태도가 많이 달랐다.

아나스타샤가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난 것을 계기로 그 역시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명쾌하게 그것이 무엇이라고 콕 짚어내긴 어려웠다.

예상컨대 에르네스트 역시 비슷한 기분이겠지 싶다.

아나스타샤를 보고 의욕을 얻긴 했는데 병원에 계속 있는 것만으로는 불만족스러워져서 결구 이렇게 학교에 일찍 오게 된 것이 아닐까.

그것까진 좋은데……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자 에르네스트가 뭔가 죄지은 사람처럼 변명조로 내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다른 치료를 더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병원엔 매일 가서 검사할 거야.”

난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매일 병원에 가실 거죠?”

“응.”

“제가 확인할 거예요.”

“……무슨 확인?”

에르네스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직도 그는 내가 VIP 병실의 경비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괜한 이야기를 했다. 난 얼른 말을 돌렸다.

“그…… 치료 계획에만 문제가 없다면 상관없어요.”

“그건 걱정 마.”

그는 장담하며 웃더니 아나스타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튼 가급적 빠지지 않고 학교 나올 생각이니까, 너희도 하기로 했던 거 신경 써서 잘해.”

“하기로 했던 거?”

“같은 콩쿠르 나가기로 했잖아. 시간 없지 않아?”

역시 그는 아나스타샤가 콩쿠르에 나가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슬럼프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소리를 되찾고, 또 왼손으로 연주를 한 것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를 가만히 보던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가 신경 쓰지 않도록 해 준 거니?”

“글쎄,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아니면 그냥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려나.”

에르네스트는 이렇다 할 확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어차피 결정된 일이라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나쁠 건 없었다. 그가 학교에 계속 나온다면 우린 그의 모습에 점점 익숙해질 터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일에 집중하는 것도 편해지겠지. 머잖아 깁스를 푼다면 치료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것에 한시름 놓을 수 있을 테고.

그가 학교에 나온 것에 대한 이야기도 정리가 되고 나자 아나스타샤는 그럼 되었다는 듯 손을 휙 젓더니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난 일단 나갔다 올게.”

“어디?”

“콩쿠르 바꾼다고 선생님 허락 받으러.”

“아, 그래. 이야기 잘 하고 와.”

에르네스트가 가볍게 응원해주었고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자기 자리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한 손으로 가방을 놓곤 책들을 꺼냈다. 난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내 책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 앞엔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지만 예습을 이어서 할 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난 슬쩍 내 책을 덮어버리곤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

“응?”

“예습하실 건가요?”

“어…… 그래야겠지? 오래 쉬었으니까.”

“어디까지 해야 하는진 아시나요?”

“모르지.”

“노트 보여드릴까요.”

쉬는 동안 학교에서 진행한 교과 수업 등의 요약 프린트를 에르네스트에게 전달하기도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요약일 뿐이었고 심지어 이번 주는 아직 나온 게 없어서 공백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라면 지금부터 조금씩 도와주는 것이 나았다.

그는 머리가 좋은 편이니까 내 노트를 가지고 공부한다면 며칠만 있으면 금방 따라오겠지.

내 제안에 에르네스트는 약간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노트를 빌려주고,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잠깐 읽어보고 있을 때였다.

“모두들 좋은 아침! 아, 에르네스트! 등교했네?”

“응.”

시간에 맞춰 등교한 발렌티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그녀는 에르네스트를 보고 반가워했다.

원래도 긍정적이었던 그녀는 어제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더욱 상황을 좋게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오늘 나온 것에 대해서도 단순히 팔이 많이 나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제 있었던 일 등을 다시 돌이켜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또 다른 친구들도 등교했다.

“오.”

리처드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오다 말고 놀랐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뒤엔 한승우가 있었는데, 그 역시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우리 옆으로 가까이 왔다. 난 리처드가 어제 해 주었던 일들을 기억한다.

오늘도 당연히 어제의 우정이 계속되리라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대뜸 농담조로 에르네스트의 신경을 거슬렀다.

“진짜 많이 낫긴 했나 보네. 아침부터 등교하고? 수업도 듣게?”

“많이 나았지. 그러니 스트레스받게 하지 마. 염증 올라올 것 같으니까.”

“오……?”

일부러 그러는 것이겠지만…… 리처드는 스트레스 유발 실험이라도 해 보고 싶은 사람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난 하마터면 탄식을 흘릴 뻔했다. 리처드가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제발 다른 장난이라면 해도 좋으니까, 부상에 대해선 장난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사실 먼저 염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에르네스트 쪽이었으니 리처드만 무어라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승우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에르네스트.”

“그러게.”

그사이에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시간이 잘 안 맞아서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 한승우는 조금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리처드가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아, 맞다. 야. 들어봐. 이 자식 지금 삐쳤다? 어제 자기만 쏙 빼놓고 우리끼리 맛있는 거 먹고 왔…….”

“널 오늘 눈밭에 파묻어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한승우가 갑자기 리처드에게 헤드락을 걸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리처드도 이런 걸 당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닌데, 한승우의 완력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삐쳤다고?

눈을 마주친 한승우는 괜한 소리라는 듯 리처드를 놓아주고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손에 잡힐 듯 훤하게 보였다.

서운해하는 감정보단 아쉬움에 가까웠다.

리처드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단순히 우리가 저녁식사를 했던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슬럼프에서 회복한 그 자리를 함께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어제 그가 같이 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긴 하다.

그 역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데에 있어선 정말 우리 중 누구보다도 대단한 귀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아나스타샤에게 필요한 조언도 조금 더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조금 아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아쉬움을 에르네스트는 삐딱하게 표현했다. 그것도 조금 심각하게.

“뭐…… 불만이면 스터디룸에 자주 출석하든가.”

“나 자주 가는 편이야. 어젠 연습이랑 레슨으로 바빴을 뿐이고.”

“그럼 운이 나빴던 거네. 아쉽네. 심지어 아나스타샤가 전부 샀었는데.”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을 위로하듯 말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식사를 누가 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에르네스트도 잘 안다.

누가 보더라도 놀리는 중이다.

한승우는 당장 에르네스트도 붙잡아 헤드락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가 깁스를 하고 있어서야 아무래도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긴 어려웠다.

이래서야 일방적인 놀림이다.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긴 하다.

그런데도 리처드는 멈출 생각이 없는지 킬킬거리며 계속 말했다.

“진짜 미안해. 다음엔 내가 꼭 전화로 불러 줄게. 그러니까 삐치지 말고.”

“네가 잘못했네 리처드.”

“그러게 말야.”

“……둘 다 그만하라고 좀.”

두 사람의 유치한 합세에 한승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나와 발렌티나가 옆에 없었다면 험한 소리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눈치를 보는 그가 가여우면서도, 어제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는 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에르네스트와 리처드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이라 생각한다.

괜히 괴롭히려고 하는 건 마음을 바로 전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켜보면 사실 세 사람이 투닥거리는 광경은 재미있게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거기 위치라도 가르쳐 줄까. 진짜 괜찮더라고.”

“…….”

하지만 슬슬 그만하지 않으면 한승우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것 같다. 아마 에르네스트는 괜찮겠지만 리처드는 끌려나갈지도 모르겠다.

말려야겠다고 느낀 난 살짝 끼어들었다.

“너무하세요, 두 사람 다. 아쉽고 미안하다면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될 일인데.”

“누가??”

“뭐가??”

어쩌다가 이렇게 다들 솔직함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정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