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5화 (905/1,277)

##  905화

사흘 동안 모스크바는 하얗게 변했다.

천천히 내려오는 눈은 마치 시간도 느리게 흐르게 하는 듯했다. 눈에 뒤덮인 온 도시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연습실에서 오후 연습을 마친 후 난 곧장 교실로 돌아왔다. 이른 시간이지만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반에는 몇몇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개별 숙제를 하기도 하고, 레슨이나 연습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는 중이다.

그리고 교실 저편엔 에르네스트가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난 살짝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혹시 눈치채지 못한다면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근처에 다가가자마자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갈수록 잘 알아채버리는 기분이다.

약간 멋쩍게 웃고 있자 그가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연습하러 갔던 것 아니었어?”

“하고 왔지요.”

“아, 그래.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벌써.”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스마트폰을 꺼내선 시간을 보고 이런저런 메시지들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에만 계속 집중했던 것 같다.

빠르게 스마트폰을 훑어본 그는 다시 날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스케줄을 확인한 후엔 자연스럽게 내 스케줄 쪽으로 생각이 닿았나 보다.

“그럼…… 이제 스튜디오에 갈 거야?”

오늘 오후엔 저녁까지 쭉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DVD를 완성하기로 했다.

이전엔 에르네스트 앞에서 콩쿠르에 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턴 자주 하기 시작해서 이제 그는 콩쿠르를 준비하는 내 스케줄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나스타샤를 기다리고 있어요.”

“마지막에 바빠지는 것보단 날짜를 달리하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이렇게 한날한시에 친구와 함께 같은 콩쿠르에 낼 DVD를 녹화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던 아나스타샤와 달리 난 꽤 전부터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니까 먼저 녹화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음악들을 준비하는 것을 곁에서 도와주면서 난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은 날 스튜디오에 가는 것으로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당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에르네스트만이 지금 이성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미 늦었다.

그도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순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콩쿠르에 나가는 이상 제일 중요한 건 결국 결과라고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그러했고.

하지만 지금은 내 목표에 집중하면서도 그가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저기, 에르네스트.”

“응.”

“오늘은 혹시 스튜디오에 볼일 없으신가요?”

“……딱히?”

나도 모르게 나온 물음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하는 일은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물어봐 가면서 할 일은 아닌가 보다.

그는 정말로 갈 일이 없는지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왜 그래?”

“그냥 혹시나 해서요.”

“아나스타샤가 또 헤매면 싸워줄 사람이 나밖에 없긴 하지.”

꽤 직설적이고 짓궂은 농담이다.

그러나 이젠 이 정도로는 서로 조심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난 가볍게 웃으며 현 상황을 전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요즘 아나스타샤는 정말 컨디션 좋아요. 전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어요.”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간 지켜본 아나스타샤는 놓쳤던 시간들을 끌어당기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피아노에 파고들었다.

그간 준비하던 쇼팽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레퍼토리를 끌어온 것만 20곡가량.

그중에서 그녀는 순식간에 4곡을 골라선 엄청난 속도로 연습해나갔다.

그 집중력과 결과물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예전의 날카로움은 많이 옅어져 있었지만, 다시 한번 목표를 정한 아나스타샤의 행동력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고 단단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과정을 자신까지 볼 필요는 없다는 듯 한 번도 연습을 견학하지 않았다.

한창 슬럼프일 때 거의 억지를 써 가면서 보여 달라 했던 것은 정말 그가 보낸 도움의 메시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컨디션 좋다니까 궁금하긴 한데…… 그건 나중에 콩쿠르 무대에서 보고 싶네. 아껴 둬야지.”

에르네스트는 점잖게 사양했다. 말은 아껴 둔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안달 나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아나스타샤나 내가 무엇을 하든간에 자신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투였다.

약간 아쉬운 기분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본래 두 개의 국제 콩쿠르에 모두 참가하기로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에르네스트가 이젠 아무 곳에도 참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길게 의식하거나 미련을 가지지 않고 온전히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강인함과 자신감에 다시금 감탄과 감사를 느끼며,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교실 문은 몇 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했다.

몇 명이 나가고, 몇 명이 들어온 결과 내가 기다리던 아이도 교실로 돌아왔다.

에르네스트가 짧게 손짓하며 말했다.

“왔네.”

뒷문으로 들어선 아나스타샤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큰 키의 그녀는 그저 걷기만 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게 이미 시선이 마주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타티아나, 나 왔어.”

이따 보자며 헤어진 지 몇 시간도 안 지났으나 우린 다시 인사했다. 나도 손을 살랑 흔들며 물었다.

“레슨은 어떠셨나요?”

“최고.”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자신이 한 일에 무척이나 만족하는 듯한 웃음이 함께했다.

내 옆 책상에 걸터앉으며 아나스타샤가 재잘거렸다.

“선생님이 이대로만 녹음할 수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대. 나머지 서류는 잘 준비해 둘 테니 내일 DVD만 가져오라 하시네.”

“잘되었네요. 후후.”

얼마 전 콩쿠르를 바꾸겠다고 한 일로 아나스타샤의 지도 선생님은 물론이고 다른 선생님들도 꽤 우려를 표하셨다.

무리해서 콩쿠르를 바꾸기보단 차라리 이번엔 참가하지 말고 몇 년 후를 기약해도 괜찮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였고, 결국 실력으로 모두를 납득시키고야 말았다.

어디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지, 학교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돌아다녔다.

예전엔 인상이 사납고 살짝 문제아 끼가 있는 무서운 여학생에 대한 소문이었다면, 지금은 중앙음악학교에서 기교적으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에 대한 소문이었다.

몇십 년 동안 근무했던 선생님들도 아나스타샤만 한 테크니션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가 보여준 실력은 인상적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 많은 것을 증명하고 인정받은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창 콩쿠르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많이 했다는 걸 느꼈는지 살짝 우리 쪽으로도 대화의 배턴을 넘겨주었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니? 너도 스튜디오 가?”

“아니? 내가 왜.”

“혹시 일 있나 해서. 너도 요즘 바쁘잖아. 에르네스트.”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단지 프로듀싱이나 레코딩 엔지니어링 등의 기술뿐만이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도움도 상당히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도 종종 프로듀서를 찾는다는 걸 아는 아나스타샤는 오늘도 그렇지 않냐는 투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오늘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녹화하는 것에 대해 시간이 촉박하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시간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이 틈에 끼어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시간을 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중에 느긋할 때 알아서 하겠다는 듯 그는 손을 휙 저어 보였다.

“지금은 혼자만 바빠.”

“그럼 말고. 오늘은 우리 둘이 갔다 올게.”

“그래. 잘 가.”

“무성의해.”

“무슨 말을 더 하라고?”

귀찮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올려다본다.

평소 같았으면 더 장난을 걸며 그를 결국 폭발시키거나 핀잔을 주었겠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아니야, 잘하고 올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그 말에 무슨 걱정까지 하냐며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오후의 녹화 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미 몇 번이나 와서 리허설을 해 본 덕분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곡과 이 스튜디오의 음향시설에 익숙해져 있었고, 마카로프 프로듀서 역시 우리의 레퍼토리와 음악성의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 딱히 문제되거나 지체될 것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우린 이전까지의 리허설과 다를 바 없이 빠르게 연주자로서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다만 몇몇 세세한 부분들이 보다 본격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일단 나와 아나스타샤는 지금 각자 드레스를 입고 있는 중이었다.

“살짝 춥네 이거.”

“온도를 조금만 올려달라고 부탁할게요.”

“그게 좋겠어.”

사실 교복을 입고 임해도 별 상관 없을 것이다. 그런 복장에까지 규정이 있진 않으니까.

하지만 청중이 없는 닫힌 스튜디오에서의 녹화라 하더라도 이것이 가서 누구에게 보여질지를 생각한다면 할 수 있는 한 준비는 최대한 갖춰놓는 것이 좋다.

괜히 심사위원들에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연주라는 선입견을 줄 필요는 없었다.

물론, 특별히 비싼 드레스를 입을 필요는 없다. 각자 집에서 연주회용 드레스를 한 벌씩 가져왔을 뿐이다.

옷 상태와 움직임을 확인한 뒤엔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더 디테일한 부분을 상의했다.

“카메라는 저번과 같이 이렇게 세팅했습니다.”

“이 시점을 놓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봤는데…… 위치를 살짝 낮추면 어떨까요? 손의 움직임이 조금 덜 보이겠지만 높이가 잘 보이는 식으로요.”

“터치가 조금 더 잘 보이겠군요.”

“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팅해보죠.”

DVD녹화는 그냥 아무렇게나 해서 내는 것이 아니다. 국제 콩쿠르의 심사용으로 정확하게 정해진 기준에 의거하여 녹화되어야만 한다.

그 기준엔 음이나 재생속도의 변조 없이 연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나 연주자의 모습과 양손이 모두 찍혀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음원이 아니라 동영상이어야 하는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주어진 기준에 맞춰 녹화를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 세팅엔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실력을 보다 잘하는 것처럼 꾸미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못나게 보이지 않게 할 필요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요구사항에 따라 여러 가지 장비들을 다시 세팅해주었다.

옆에 달라붙어서 카메라 화면을 확인하던 아나스타샤도 이게 좋겠다며 동의했다.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순번에 대해선 이미 오는 길에 차에서 가위바위보로 결정한 후였다.

“저요.”

“그렇습니까? 그럼 준비해주시죠.”

“잠깐 손 좀 풀게요.”

“알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손을 다시 씻고는 손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냈다. 그리고 가볍게 팔을 쭉 폈다. 동작 하나하나가 멋들어진 스트레칭이었다.

목을 까딱이던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눈을 찡긋해 보였다.

“먼저 하고 올게.”

“예, 기다릴게요.”

“오래 기다릴 건 없어. 한 번만에 끝내고 올 테니까.”

예약이 긴 학교에서라면 다를까, 오늘은 우리가 이곳을 전세 내고 있었다.

정해진 횟수가 없으니 하루 종일 녹화해도 상관없었다. 지쳐서 쓰러지기 전까진.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당연하다는 듯 한 번에 끝내겠노라 말했다. DVD심사도 실제 무대처럼 임하겠다는 뜻이었다.

난 그녀를 잘 지켜보겠단 뜻으로 눈을 마주했다. 곧 각오로 다져졌던 그녀의 눈빛이 사르르 풀린다.

“그래도 혹시 실수하면 두 번 정도……?”

괜한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난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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