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06화 (906/1,277)

##  906화

레코딩 엔지니어의 일은 무궁무진하다.

장소를 만들고 악기를 세팅하며 음악을 한데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 음악을 위아래로 조정하고 좌우로 늘이거나 잘라 붙이는 것까지.

심지어 세션에 필요한 악기가 있다면 적절하게 창조해내기까지 하면서 음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한다.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현대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장르가 클래식으로 옮겨 오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 제약된다.

자연스레 믹싱과 마스터링 영역에서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고, 보다 현실적인 음향을 만드는 데에 힘이 실린다.

그리고 클래식 콩쿠르 심사용 DVD가 되어버린다면 정말로 단지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모든 것을 녹화해야 하므로 손을 댈래야 댈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공간을 세팅하는 난이도는 극도로 높아지고, 때문에 마카로프는 한 번도 콩쿠르용 DVD 제작 건을 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별 사람이 다 있지.’

까탈스러운 면모가 많은 연주자들은 콩쿠르라는 것을 앞에 두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나마 그런 상황을 억제할 수 있는 건 심사위원과 청중들의 시선일 텐데, 그런 것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연주자들의 요구사항은 때때로 끝없이 올라가곤 한다.

마카로프는 오랜 기간 이곳에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봐 왔다.

며칠이고 녹화를 반복하며 계속 세팅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터치와 음색으로 피아노를 조율시키거나 아예 피아노를 교체하길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에 따른 요금을 제시하면 물러서곤 하지만, 결국 끝까지 툴툴거리며 조건이 자신의 실력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하는 연주자들을 보면 그냥 나가라고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모두에겐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마카로프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여기 와 있는 두 피아니스트는 달랐다.

“…….”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부스로 들어간 아나스타샤는 이렇다 할 요구도 없이 건반을 주르륵 긁어 확인해보더니 마카로프를 바라보았다.

드레스까지 잘 차려입은 그녀는 정말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큐사인이 떨어지고 녹화가 시작되자, 아나스타샤는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거기엔 변명도 조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준비해 온 음악을 온전히 펼쳐보이겠다는 일념으로 피아노를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마카로프는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만 해도…….’

아나스타샤가 슬럼프를 겪고 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똑같은 테크닉으로 건반을 연주해도 그녀에겐 순수함과 목적이 없었고, 음악은 당연히 허공에 붕 뜬 무의미한 진동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그런데 단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신적인 갈피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본연의 가치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력이 음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광경은 마카로프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증명과도 같았다.

숱한 연주자들을 보며 때때로 허무주의에 물드는 그가 지금까지 음악가로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녀의 상황을 그저 보기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극적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덕분에 그는 지금 아나스타샤가 이어 행하는 기적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

첫 곡을 마치고도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쪽을 보지도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콩쿠르 무대에서 첫 곡을 마쳤다고 해서 심사위원 쪽을 바라보는 건 어리숙하게 보일 행동이니까.

여유 있게 전신을 슬쩍 스트레칭한 후, 그녀는 곧장 다음 곡의 연주에 들어갔다.

심지어 다음 곡의 완성도는 더 뛰어났다. 격렬하게 몰아치는 음악의 파동이 화면에 요동친다.

마카로프는 미리 세팅한 이 녹화 시스템이 그녀의 연주 자체를 온전히 잘 기록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놓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녹화를 끊고 다시 세팅을 바꿀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녹화는 끊기지 않았다.

‘정말 한 번에 끝냈군.’

녹화를 종료시키고 나서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편히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도중에 다시 한번 쳐봐도 되냐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단 한 번 만에 실수 없이 그녀는 철저하게 완성된 음악들을 선보였을 뿐이다.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했는지 아나스타샤는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그사이 어떻게 이 정도로 해냈는지 모르겠다. 마카로프는 자신도 모르게 뒤편에 앉아 있을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

조용히 서서 연주를 지켜보던 그녀는 눈을 마주하더니 그저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처럼.

잠시 후, 부스에서 나온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가볍게 포옹했다.

“잘했어요. 아나스타샤.”

“응. 응…….”

작게 소곤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진한 유대와 영향력을 느낀다.

마카로프는 지금 아나스타샤가 혼자선 절대로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타티아나란 친구의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연주자가 가까이에 있다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타티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마무리하셔도 되겠죠?”

“응. 그러려고.”

“그럼 다음은 제 차례네요.”

여전히 조곤조곤한 어투였지만 그 존재감은 이미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보고 났더니 의욕이 조금 더 생기네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은 단지 최선을 다하겠단 다짐의 의미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연주에서 읽어낸 음악성 등에서 힌트를 얻어 또다시 다신의 음악에 접목시켜 한층 더 나아갔음을 스스로 느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영민한 해석력으로 음악을 이해하며, 또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당연하게만 들리지만 실제론 타티아나만큼 능동적이고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연주자는 정말 드물다.

“녹화에 들어가 주세요. 바로 시작할게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짧게 부탁하고는 곧장 피아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에 오르는 피아니스트에게 곧 모든 조명과 마이크, 그리고 카메라가 향한다.

“…….”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의자만 살짝 조정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갇힌 부스에서 불필요한 소리는 단 하나라도 내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집중하는 타티아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숨소리마저 잡아내는 고감도 마이크가 세 개나 설치되어 있는데도 모니터 속 파형은 수평선을 그렸다.

대체 숨은 쉬는지, 심장은 뛰는지.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할 때였다.

그 고요 속에서 타티아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

깊게 숨을 들이쉰 타티아나는 그대로 그 숨을 손가락을 통하여 건반에 불어넣었다. 그 에너지는 죽은 나무인 피아노를 되살려낸다.

아나스타샤가 보인 인간적인 기적과는 또 다른 형태의 기적이었다. 그야말로 피아니스트만이 할 수 있는 일.

마카로프는 그동안 여러 번 타티아나를 보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자주 본다고 해서 식상하게 느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다르고, 매번 자라난다.

그 깊이에 놀라 감탄했던 것이 엊그제였다면, 오늘은 한층 더 깊게 파고드는 음악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버리니 종국엔 경외심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건 마카로프보다 더 가까운 친구인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

마카로프 옆에서 부스를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는 것 같은 걸음으로 두어 걸음 앞으로 향했다.

마치 음악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몇 걸음이 전부였다. 과하게 달려들어 유리에 붙어 지켜보기라도 하면 피아노 연주에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지, 아나스타샤는 걸음을 멈추곤 어정쩡한 자세로 서선 타티아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조금 편하게 앉아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뒷모습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아나스타샤의 연주로 타티아나가 의욕을 얻었다고 한 것처럼, 이번엔 그 반대로 아나스타샤가 또 한 번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아이들 옆에선 귀한 광경을 자주 보는군.’

마카로프가 문득 두 사람의 나이를 떠올린 것은 어리다고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나이 고하에 관계없이 존중받을 정도로 대단한 피아니스트들이지만, 앞으로도 더더욱 성장할 여지가 넘친다는 것에 대한 감격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 몇 년 후엔 어떨까.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카로프는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렇게 타티아나도 연주를 마쳤다.

지금까지 해 온 여러 리허설 중에서도 제일 나은 연주였다. 매회 나아진다는 건 절대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연륜 있는 프로들도 열 번 연주했을 때 결국 제일 좋았던 것이 맨 처음 연주했던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정말로 열 번 연주한다면 맨 마지막 연주를 제일 잘 해낼 피아니스트였다.

마카로프는 그런 믿음에 의거한 기대와 감탄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그보다 더 의욕적으로 나설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마카로프.”

몇 걸음 앞선 곳에서 부스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슥 돌아보았다. 마카로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직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정중하게 부탁해왔다.

“저 다시 한번 녹화해봐도 될까요.”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는 것은 그녀의 자유였지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다.

한 번 만에 녹화를 마쳤다는 만족감이나 성취감 등을 모두 내려놓고서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 고민이나 조심스러움은 전혀 없었다.

단지 그녀는 또렷하게 자각했을 뿐이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으리란 확신을.

대신 이곳이 정말 콩쿠르 무대였다면 절대로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살짝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보인다.

마카로프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몇 번이고 해 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다시 해보겠단 이야기를 듣고는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악가로서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다.

경쟁으로서의 공정한 한 번씩의 기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보다 근본적인 곳에 있다는 것을 타티아나는 깊게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또 현실적인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는다.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다음 녹화를 하고 나왔을 때, 타티아나는 이번엔 자신도 다시 한번 해보겠다고 요청했다.

당연히 마카로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두 사람이 오늘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가까운 곳에서 확인할 수만 있다면 밤을 새더라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

미하일은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레슨 시간에 찾아온 타티아나의 안색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선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 어떻게든 숨기려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늘 곧게 펴져 있던 등은 축 늘어져 있고, 눈은 퀭하게 풀려 있었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싶어서 미하일은 약간 화를 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콜록거리는 기침 대신 긴 하품을 했다.

“…….”

미하일이 말없이 올려다보자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 것이 창피한지 허둥거리다가, 급한 손놀림으로 가방에서 DVD를 꺼내 건넸다.

“여기…… 완성해왔어요. 선생님.”

“그래, 잘했다.”

덩달아 머뭇거리며 DVD를 받아 든 미하일은 그 깔끔한 완성도에 만족했다. 안의 내용도 들어봐야겠지만, 아마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피곤해하는 이유도 결국 이거란 말인데…….

“어제 스튜디오에서 대체 몇 시에 집에 돌아간 건지 궁금하구나. 타티아나.”

그 질문에 타티아나는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집에 안 갔어요.”

“뭐?”

“아나스타샤와 번갈아 가면서 녹화하다보니…… 정신 차리니까 해가 뜨고 있어서요. 잠깐 눈만 붙이고는 간신히 씻고 온 길이에요.”

“너희들…….”

타티아나는 DVD에 녹화할 음악을 이미 완성한 지 오래였다. 밤을 새면서까지 이렇게 열중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선생 된 입장에서 미하일은 여학생들이 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무언가 한다는 것에 대해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고, 미하일도 그녀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타티아나를 아낄 수밖에 없는 건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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