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10화 (910/1,277)

##  910화

학교 밖은 굉장히 추웠다.

에르네스트는 문간에 서서 대충 걸친 코트를 다시 벗어 들었다. 깁스를 소매를 끼워넣으려면 보조대를 풀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낑낑거릴 생각을 하니 다 귀찮아졌다. 춥긴 해도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것도 아니니까 그냥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학교를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도로 쪽으로 향할 때였다.

울타리 근처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본 에르네스트는 곧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실제로 어디를 보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사람이 자신을 보고 반가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경호원인 빅토르는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

“오, 에르네스트.”

그간 꽤 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그에게 있어서 어려운 사람이었다.

타티아나의 경호원이 남자인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단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빅토르가 티를 내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남자로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심지어 요즘은 조금 더 그럴 것 같았다……. 묘하게 건들거리는 모습이 가까이 가면 안 될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타티아나의 다른 경호원들과 다르게 빅토르는 어딘가 자유분방해서 뭘 할지 모르겠단 느낌이 있다.

하지만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에르네스트는 그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빅토르.”

“저 멀리서부터 코트를 펄럭이며 오길래 누군가 했습니다.”

“그게…….”

“팔 때문에 그렇다는 건 알죠. 하하하.”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에르네스트의 부상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회복할 일이니 지금은 한때의 웃음으로 넘기려는 센스였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코트에 팔을 넣는 게 불편하다는 걸 다시 어필하듯 소맷자락을 흔들거렸다.

빅토르는 자신도 팔이 부러져본 적 있다면서 껄껄 웃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되자 빅토르는 담배를 치우려 했다. 에르네스트가 말렸다.

“계속 피우세요. 괜찮으니까.”

“흠, 그럼 마지막으로.”

그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빨아들이더니 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남은 불을 껐다.

에르네스트는 구세프가 저런 걸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깔끔하시네요.”

“학교잖습니까.”

역시나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아마 타티아나를 수행하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

항상 정돈되어 있는 태도인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담배를 아무 곳에나 버리면 그건 정말 우스운 광경일 것이다. 아마 타티아나가 가만 있지도 않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빅토르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타티아나는 오늘 오후 일과도 다 하고 갈 예정인 것 같습니다. 아나스타샤와 같이요.”

“아가씨? 아, 그렇습니까?”

“기다리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죠. 음…… 전날 꽤 무리하셨으니까 오늘은 일찍 하교하지 않으실까 했는데…….”

딱히 걱정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냥 이후 예정에 대해 전해듣고는 오후 스케줄을 조정하는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학교 어딘가를 향하던 빅토르의 시선이 다시 에르네스트 쪽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집에 가시려는 겁니까?”

“그냥 전 남아서 할 게 없어서.”

사실 할 건 많았다. 스터디룸에 가서 해도 될 일들이었고.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가 콩쿠르 건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땐 굳이 신경 쓰이게 교내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운 좋게 타티아나와 잠깐이나마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잠깐 마주쳤다고 담배도 끈 빅토르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대충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몸을 틀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그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좋습니다. 집에 데려다 드리죠.”

“……네?”

“따라오십시오.”

턱을 까딱이며 빅토르가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단순히 호의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빅토르는 몇 번이고 에르네스트의 집 앞에 그를 내려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타티아나가 없다. 아무리 봐도 그냥 따라가서 될 일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말했다.

“전 택시 타면 되는데요.”

“아마 아가씨가 옆에 있었다면 태워주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타십쇼. 택시비 달라고 안 할 테니까.”

하지만 빅토르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딱 잘라 이야기하더니 아예 스마트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소로킨. 저 잠깐 자리 비웁니다. 예, 예. 일이 생겨서.”

설마 타티아나에게 보고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런 일은 그렇게 보고할 일은 아닌가 보다.

에르네스트가 멍하니 보고 있자 빅토르는 뭐 하고 있냐는 듯 다시 앞쪽으로 손짓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순간적으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진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발을 빼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안 된다. 죽지는 않겠지.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몇 번 되풀이하며 빅토르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검은색 벤츠 옆에 섰다. 자주 보던 차라서 꽤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빅토르의 손짓에 따라 뒷좌석이 아니라 앞좌석 조수석에 올라타게 되고, 이어서 빅토르가 운전석에 타니까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정말 택시 같은 느낌을 주려는 건가……? 택시를 타면 조수석에 앉는 것이 기본이니까 이게 맞긴 한데, 옆에 있는 게 빅토르이다 보니까 절로 긴장이 된다.

어차피 이젠 내릴 수도 없다.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옆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빅토르는 액셀을 밟았다.

“…….”

중앙음악학교를 빠져나와 도로를 거쳐 대로로 접어들어서도 두 남자 사이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히터는 따뜻하게 틀어져 있었지만 어색함은 여전히 얼음처럼 단단했다.

선글라스를 쓴 빅토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에르네스트는 그걸 예상해보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정신을 놓고 멍하니 앞만 보고 있자니 빅토르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러고 있습니까?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어색해서요.”

“푸하하, 이제 와서?”

대놓고 이야기하자 그게 그렇게 웃긴지 빅토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갑자기 붙잡아 태운 건데 이제 와서라고 말하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디 뭔가 말이나 해보란 뜻으로 에르네스트는 그를 바라보았다.

빅토르도 미안하긴 했는지 일단 분위기를 풀어놓는 데에 집중했다.

“그럼 안 어색하게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 보죠.”

“재미있는 거라…….”

“뭐 없습니까?”

“글쎄요. 오늘 오는 길에 본 거라면…… 2m도 넘게 쌓아놓은 눈 언덕 위에 자동차가 올라가 있던 것 정도?”

“뭡니까 그게?”

“저도 궁금하더라고요. 대체 뭐 하는 조형물인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뭔지 모를 광경이었다. 세상엔 참 특이한 짓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최근 본 재미있는 것들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 그간 본 것들에까지 포함되었고, 그다음은 인터넷에서 본 것도 합쳐졌다.

빅토르는 일 때문에 바쁘면서도 인터넷을 자주 보는 편인지 웃긴 농담 등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가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유머감각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보니 말하기가 편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빅토르가 지금 자신을 무작정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지금 데려다주는 것도 정말 호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빅토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겠군요.”

“그렇죠. 뭐.”

“아마 팔도 올해로 다 나을지 모릅니다.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저도 제 회복력을 믿고 있긴 하죠.”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도 적당히 건넨 빅토르는 잠시 운전에 집중하는지 앞에 집중하더니, 앞차가 멈춰서자 차를 천천히 정지시켰다.

신호등도 없는데 그냥 길이 막혀서 천천히 가야 하는 구간이었다.

느릿느릿하게 도로를 빠져나가며 빅토르가 넌지시 말했다.

“그나저나…… 잘 되었군요.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죠?”

농담의 연장은 아니겠지.

에르네스트는 몇 가지 예상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학교에서 타티아나에 대한 일이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이번 달 계획 같은 것 정도. 가까운 친구로서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빅토르는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의 질문은 그런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베르체노프가에서 신년 연휴 동안 특별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 음…… 그래요?”

“베샤스트니흐가의 아들이자 타티아나 아가씨의 친구로서 에르네스트에게도 초대장이 갈 예정인데…….”

갑작스런 초대 이야기에 에르네스트가 당황하는 사이, 빅토르는 선글라스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파티가 좋습니까 아니면 여행이 좋습니까?”

“……?”

그걸 왜 나한테?

베르체노프가가 주최하는 신년 맞이 기획이라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알아서 내부적으로 검토하여 결정할 일이지, 에르네스트에게 이렇게 물어볼 일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빅토르도 경호원으로서 권한 이상을 가지진 못할 터,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이런 걸 물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이유를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정작 그 질문 자체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하고 답했다.

“전 아무거나 괜찮은데요.”

“아, 물론 그렇겠죠. 그런데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

에르네스트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빅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질문이 그냥 파티나 여행에 대한 설문조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에르네스트는 알아차렸다.

지금 대답의 어디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게 될진 모르겠지만, 빅토르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에르네스트에게만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지금 바보같이 어물거려선 안 된다.

에르네스트는 똑바로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어떤 계획이냐에 따라 다르겠는데요.”

“신중하군요.”

무엇이든 말해보라는 듯 빅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예상컨대 신년 파티라면 1월 1일에 사업 관련자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파티겠죠? 저희 아버지라든지.”

“그렇게 되겠죠.”

“여행이라면 그 이후 일정이겠죠. 인원은 작게 아마 타티아나의 친구들만 불러서 이틀에서 사흘 정도…… 해외가 아닌 국내. 조금 따뜻한 곳이면 타티아나에게 좋을 테고.”

주어진 정보는 신년 연휴에 진행된다는 것 하나뿐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에르네스트는 여러 가지 가정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차분하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면서 에르네스트는 계속 빅토르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잘 읽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어림잡아 말한 것들이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빅토르가 조금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민한 것도 듣던 대로군요. 그래서 결론은?”

앞서 두 가지의 칭찬에 이어 마지막 결론까지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결론까지 신중하고 똑똑하게 내리려고 했다간 복잡하게만 될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든 것들을 직감하고는 아예 단순하게 대답했다.

“그럼 전 여행이 좋겠네요.”

“이유는?”

“전 아버지 이름 아래로 초대받는 건 좀 싫어해서.”

“푸하하하.”

정말 단순한 이유였지만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빅토르는 핸들을 손으로 쳐 가면서까지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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