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1화
에르네스트는 피아니스트로 살아오며 수많은 시험들을 겪어왔다.
그때마다 느꼈던 건 어떻게 하면 잘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보단,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지금 역시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시험이었다면 잘 통과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
끅끅거리며 웃는 빅토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빅토르를 거의 두 번째 오빠처럼 대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해지는 빅토르가 두 번째 오빠처럼 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에르네스트는 문득 루슬란을 떠올렸다. 지금 옆에 그가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한 마디도 똑바로 못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년에도 타티아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루슬란은 분명하게 겁을 주면서 근처에서 벗어나거나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찾아내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 있었다.
그는 정말로 에르네스트를 무작정 싫어하기로 작정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보다 더 나이가 많고 여유가 있는 빅토르는 그렇게까지 에르네스트를 경계하진 않고 있었다.
약간 눈치를 살펴보던 에르네스트는 이 정도는 물어도 괜찮겠거니 생각하며 슬쩍 떠보았다.
“이젠 말씀 좀 해주시죠. 갑자기 왜 이런 걸 저한테 묻는지.”
“음.”
빅토르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베르체노프의 경호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지금 이런 상황도 정말 특별취급 받고 있는 것에 가깝다. 에르네스트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특별취급 받는 이유 역시 명백했다.
“그나저나 요즘 아가씨와 관계는 어떻습니까?”
빅토르는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수많은 대화의 핵심되는 질문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마지막으로 물었던 질문의 대답이기도 했고.
에르네스트는 짤막하게 답했다.
“좋아요.”
“그게 전부입니까?”
“……그런데요?”
사실이 그럴 뿐이다.
지금 타티아나와의 관계는 여전히 좋은 친구에 머물러 있다.
아나스타샤가 그 이상을 바라면서 조금씩 관계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지만, 결국 에르네스트의 팔이 낫고 놀랄 만한 결과를 낼 때까지 모든 건 고착되어 갈 터였다.
길게 걸리진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깁스 안의 왼팔을 움직여보며 확인했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될 것 같단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건 생각에서 그칠 뿐, 빅토르에게 주변의 상황이나 희망 사항 같은 걸 주절주절 떠들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말실수를 잘못했다간 이대로 어디론가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차가 잠깐 멈춰 선 사이 에르네스트를 슥 돌아본 빅토르는 무언가 확인하는 것 같더니 곧 다시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
“별건 아닙니다. 근래 주변 조사를 하다 보니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주변 조사?”
“저와 자하르는 타티아나 아가씨의 근접 경호만을 담당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가씨에게 해가 될 만한 것들이라면 뭐든지 사거리 안에 놓죠.”
에르네스트는 그런 일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베르체노프가 운용하는 경호회사가 얼마나 유능한지에 대해선 몇 번이나 들은 바 있었다.
영화 같은 건 상대도 안 된다. 정보력과 물리력 모든 것이 어린 피아니스트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무겁다.
그 전부를 이야기하진 않지만 괜찮은 수준 내에서는 가르쳐 주겠다는 듯 빅토르가 말했다.
“최근엔 파파라치들이 많이 늘었더군요. 기자인지 소설가인지 모를 사람들도. 처리하는 데에 애 좀 먹고 있긴 합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타티아나가 가을 연주회를 성공시키고,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아 인터뷰를 한 후에 정말 많은 호사가들이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그리고 거기엔 자연스레 에르네스트의 이야기가 섞여들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소설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고 조명을 받는 것도 금방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혼자 다닐 때면 카메라가 따라다닌다는 걸 느끼곤 했다. 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요즘은 그 진득함이 달랐다.
그러나 되레 타티아나와 함께 있을 땐 그런 것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바로 여기 있는 빅토르와 다른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진위여부를 떠나 모두 막고 있긴 한데…… 궁금한 건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이런 대화를 언젠가 한 번쯤은 해야 할 것이라고 에르네스트도 막연히 생각한 적은 있었기에 빅토르가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빅토르가 유쾌하게 덧붙였다.
“따로 조사하는 건 절대 금지라고 아가씨께서 엄중하게 경고하셨거든요.”
이건 따로 조사가 아닌가?
바로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집에 데려다주면서 한참이나 에두른 질문을 몇 개 던지는 것 정도는 조사라 할 수도 없었다.
정말 빅토르가 작정하고 뒷조사를 하려고 든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빅토르의 태도는 정말 복합적이었다.
경호원으로서의 의무감과 타티아나가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관심이 한데 얽혀 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적당한 균형감을 찾아낸 듯 보였다.
일도 아니고 참견도 아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무언가로 빅토르는 에르네스트와 이 도로 위에 떠 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가 경고하기도 했었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좌석에 기대었다. 빅토르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겁먹진 마시죠. 더 캐묻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까.”
“……겁 안 먹었는데요.”
“그건 다행이네요. 하하. 제가 보기보다 친해지기 쉬운 스타일이란 말은 자주 듣는 편이죠.”
“…….”
뭐라 대꾸할 힘도 없어서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만을 보냈다.
농담이었는데 받아 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빅토르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대화를 본래대로 돌렸다.
“어쨌든 방금 대답 좋았습니다. 에르네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 것 같군요.”
“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심리 테스트 같은 겁니까?”
“아뇨,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시험이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마 파티니 여행이니 하는 선택 자체는 시험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것을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대답했는지에 대해서겠지.
분명 통과를 한 것 같긴 한데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배점을 받아서 통과한 건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파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었지만 베르체노프의 경호원을 상대로는 그저 열여섯 살짜리 학생에 불과했다.
결국 답답해진 그는 조금 더 과감하게 한마디 던져보았다.
“까놓고 이야기하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이미 다 밝혀져 있는 사실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빅토르는 그 부분에 대해 딱히 반론하지 않았다.
적어도 위험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근거와 확신 정도는 있을 테니까.
그런데 빅토르가 원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어떤 게 사실이죠? 스테판 니콜라예비치의 아들로 알려진 당신이 사실입니까? 방금 전에 아버지 이름 아래에 있는 건 싫다고 했던 것 같은데.”
“…….”
“그런 허울을 믿지 않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감했던 에르네스트의 말보다 훨씬 더 강하게 빅토르가 받아쳤다.
순간적으로 그는 경호원의 입장을 내려놓고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배경을 전부 허울이라 하는 것은 언뜻 모욕적인 언사처럼 보이지만,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건 보다 깊은 존중과 흥미였다.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론이 어떤지 궁금하다.
“제가 어떤 사람처럼 보입니까?”
“글쎄요.”
그는 핸들을 잡은 채 손가락만으로 핸들을 툭툭 치더니, 이윽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 약속드리죠.”
사실 빅토르도 꽤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빅토르는 에르네스트가 기분 나빠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는 적정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걸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단 기분과, 루슬란이나 유리도 이렇게 점잖을까 하는 생각 등이 맴돌 뿐이었다.
“…….”
어쨌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에르네스트의 집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정도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오늘 시험만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거꾸로 빅토르에게 무언가 알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뭐든지.”
“오늘 물어봤던 거, 아나스타샤에게도 물어볼 예정입니까? 아니면 이미 물어봤다거나.”
이 복잡한 관계들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생각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앞만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어떤 내용 말씀이시죠?”
“네? 신년에 계획이 있다는 것 말이죠. 파티나 여행으로…….”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는 빅토르 때문에 당황한 에르네스트는 멍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뭔가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정말 처음 듣는 내용인 것처럼 빅토르는 곁눈질하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계획은 제가 신경 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이젠 루슬란 님이나 타티아나 아가씨가 결정하실 일이죠. 음, 친구분들의 의사를 묻는 것이라면 아마 아가씨가 직접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
당혹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곧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빅토르는 방금까지 나눈 대화를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민감한 이야기가 오갔던 것 같진 않으니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에르네스트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런 닫힌 공간에서 단둘이 이야기한 내용을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는 건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없었던 일로 하는 것에 대해선 찬성이다.
하지만 순전히 당하고만 있었던 기분이라서 에르네스트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마냥 협조적으로 구는 착한 아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저한텐 빅토르가 물어보더라고 타티아나에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아가씨는 절 이해해주실 거라서.”
그러나 빅토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시비를 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갑자기 붙잡힌 바람에 준비도 뭣도 없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절대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진 않으리라 다짐하며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빅토르는 킥킥거렸다.
오늘 있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해 두 남자 사이에 무언의 합의가 있었다.
어떠한 다른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절대로 깨질 일이 없는 합의였다.
이윽고 차는 베샤스트니흐가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에르네스트는 문을 열고 내리기 전 빅토르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불편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군요.”
짓궂은 농담이 담긴 인사가 오가고, 에르네스트는 차에서 내렸다.
빅토르가 마지막으로 손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전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순식간에 도로 저편으로 사라지는 검은색 차량을 보다가, 에르네스트는 정신이 어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차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곧 그것은 아직 학교에 있을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타티아나와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유난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베르체노프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부분에 대해선 크게 부담스럽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타티아나와 가깝게 붙어 지내는 아나스타샤에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선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종종 아나스타샤가 억울해하거나 무기력하게 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충고하거나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였을지도 모른다.
상념에 잠겨 있던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