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2화
눈앞에 와 있던 콩쿠르 참가 신청을 해 놓고 다시 스케줄을 돌아보니 비로소 12월이 다가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올해 내게 남은 일들은 1학기 기말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험들과 과제곡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음반 정도였다.
모두 중요한 일들이었지만, 학교의 일이야 본래 숨 쉬듯이 해내야 하는 것이고…… 음반은 작년에 했었던 레퍼토리 그대로 진행할 테니 크게 부담될 것이 없었다.
난 작년보다 더 나아진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었다.
조금 여유를 느끼자 연주회라도 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큰 협주곡이나 리사이틀 말고 자그마한 자선 연주회 같은 것이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올해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여러 번 말해 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느긋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불과 며칠 정도뿐이었다.
“이렇게……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떤가요? 밀레나. 마음에 드시나요?”
“네! 타티아나 선배! 너무 좋았어요!”
“후후, 그럼 녹음하러 가볼까요?”
간단한 리허설을 마치고 일어서자 플루트과 8학년 밀레나는 들뜬 모습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그녀의 콩쿠르 제출용 DVD 녹화에 피아노 반주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행하고 있었다.
태블릿 컴퓨터를 챙겨들고 연습실 문을 열어주자 밀레나는 양손 가득 자신의 악기와 필요한 도구 등을 가지고는 허겁지겁 나왔다.
그렇게 우린 교내에 있는 녹음실로 향했다.
난 살짝 앞서 걸었고,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밀레나는 종알거리며 따라왔다.
“정말 믿기지 않아요……. 그저께 살짝 한가해 보이시길래…… 반쯤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부탁드렸던 건데…….”
“기대하지 않고 있었나요?”
“예? 아뇨! 기대는 했죠! 하지만 두 곡이기도 하고…… 플루트 반주는 많이 어렵다고들 하던걸요?”
피아노 반주는 여러 악기에 접목될 수 있지만, 플루트 같은 고음역대 악기들을 반주할 땐 피아노가 커버해야 할 음역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때문에 초견이 약하면 반주를 연습하는 것에도 시간을 꽤 투자해야 했다.
그러나 난 총보를 읽고 즉각 연주하는 훈련을 많이 해 온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밀레나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곧장 도와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게다가 이틀 만에 이 정도로 연주가 가능할 줄은 정말로…… 정말로 몰랐어요.”
“만족해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갈 곳 없는 관현악 주자들의 구원자라고 말만 들었는데…… 그 이상이에요. 선배는 신이에요.”
“그렇게까지야…….”
“아뇨, 진짜예요. 선배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진짜로.”
정말로 감동했는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해 온다.
옆을 돌아보니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정말 귀엽게만 느껴졌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난 빙그레 웃어 보이곤 다시 앞으로 향했다. 밀레나도 싱글벙글 웃으며 날 따라왔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각 관현악 연주자들은 반에 붙어 있는 전문 반주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실기시험이나 콩쿠르용 DVD 녹화 등을 앞두곤 연습했던 그대로 함께 나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종 모종의 문제로 인해 전문 반주자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그러면 때에 맞춰 반주자를 구하는 건 온전히 연주자 본인의 몫이었다.
밀레나가 그런 경우였다.
원래 같이 하던 전문 반주자가 독감에 걸려 버리고 간신히 구한 반주자는 개인적인 일이 생겼다며 연락두절이 되어 버리질 않나, 온갖 불운이 겹겹이 닥쳐온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사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관현악과에 맴도는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밀레나는 거의 날 마지막 희망으로 보고 있었다.
‘외면하기 어려웠지.’
무작정 찾아와서 시간도 촉박한 반주를 부탁하는 건 사실 예의도 아니고 들어줄 형편이 안 되는 상황도 많다.
난 아무나 도와주진 않는다. 딱 잘라 거절해야 할 땐 두말 나오지 않게 거절하는 편이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
하지만 정말로 안타까운 상황에서 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아와 요청하는 것은 거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DVD녹화를 마치고 살짝 늘어져 있던 일상에 활력이 채워져가는 기분이다.
‘플루트 소리도 좋고 말이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 것뿐만이 아니라 내 음악적 공부를 목적으로 보더라도 난 이득 볼 것이 정말 많았다.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와 함께하는 것은 그 악기의 음색을 익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합주 능력에 보탬이 되었다.
그런데 그간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고 다른 여러 사람들의 반주를 해오면서도 난 대부분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와 하는 일이 많았다.
플루트 소나타 반주는 사실 처음이었다.
때문에 이번에 밀레나와 연주하는 일은 내게도 도전적인 일이었다. 플루트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환이기도 했고.
밀레나는 내가 100%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속으로 웃으며 밀레나의 소리를 잔뜩 들어 줄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문득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 그, 많이 늦었지만 혹시나 해서 말인데요…….”
“예?”
“이따가 녹화 끝나고 시간 있으시면 차라도 한 잔 어떠세요? 정말 맛있는 케이크 파는 곳 알거든요.”
어제 이야기를 듣고 오늘 리허설 하기까지 보상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는데, 밀레나는 이제 와서 아차 싶었나 보다.
아니면 계속 생각을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내가 살짝 멈춰 서자 그녀가 빠르게 덧붙였다.
“사실 반주비를 드려야 하는데, 전에 듣기로 그런 건 전혀 받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녀의 말대로 반주자들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렇게 급히 구한 반주자들의 몸값은 더 센 편이다.
하지만 난 절대로 금전으로 보상을 받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은 더 좋은 음악적 결과물뿐이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얼마 전 막심 선배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졸업해버리는 전설적인 위업을 보인 후로 내게 이런저런 부탁들이 많아졌는데, 내가 돈에 따라 움직인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내 뜻대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건 싫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귀여운 보상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차와 케이크요?”
“네…….”
“전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데.”
“그, 그…… 그러신가요? 아…… 당연히 그렇겠죠……?”
가볍게 던진 농담에 밀레나가 말을 더듬었다.
뭔가 더 고급스러운 곳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그래 봐야 열네 살이 알 만한 곳은 뻔했지만.
난 그녀가 더 복잡해진 얼굴을 하기 전에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후후, 밀레나가 추천해주는 곳이라면 꼭 가 보고 싶네요.”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저녁엔 약속이 있지만 그 전엔 얼마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밀레나는 무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표정 변화가 정말 다채로운 아이였다.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는 녹음실로 향했다.
“예약한 밀레나와 타티아나입니다.”
“아, 들어오렴.”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이름을 대자 교직원 한 분이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중앙음악학교의 녹음실은 몇 명의 교직원분들께서 관리 중이시다.
샘플 CD녹음부터 콩쿠르 심사용 DVD까지 교외로 나가는 다양한 음원들을 제작하는 곳이라서 학기 말이 되면 예약이 꽉꽉 차게 된다.
간신히 예약하더라도 한 번 순서를 놓치면 결국 비싼 외부의 스튜디오를 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밀레나가 급하게 반주자를 구하려 했던 것도 이 예약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나를 잘 찾아내어서 다행이다.
코트를 벗어놓고 잠깐 몸을 풀고 있자 교직원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몇몇 사항들을 알려주셨다.
“2시간짜리 예약이고…… 리허설은 녹음 시간 안에 들어간다는 것 알고 있지?”
“예, 방금 전까지 연습하다가 왔어요.”
“좋아. 그리고 플루트 콩쿠르 제출용으로 신청했다면…… 음원 그대로 나가고 거기에 대해서 나중에 수정은 불가능해. 그러니 다시 우리가 세팅을 확실히 확인하고…….”
“지금 봐도 되나요?”
“어…… 타티아나 학생이?”
“예. 샘플 녹음 시작해 주세요.”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움직인다. 난 곧장 난 녹음실의 무대로 올랐다.
그리고 피아노의 위치와 마이크의 세팅을 확인하고, 플루트가 설 곳을 체크한다.
이미 수많은 녹음을 거쳐 오며 이 공간의 어쿠스틱을 최적화한 구조는 관리하는 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난 그것을 딱히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선 채로 피아노 건반을 건드려 보았다. 울림의 크기를 확인하며 더듬거리며 하나씩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고음에서 저음까지 모든 음역을 쳐 본 다음 무대에서 내려왔다.
“방금 했던 것 들려주시겠어요?”
곧 내가 했었던 것들이 그대로 들려왔다.
무대를 딛는 발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피아노 소리도.
그 모든 것을 들어본 나는 딱 한 가지만 부탁했다.
“피아노의 상판을 반 정도 내려주시겠어요?”
“반이면 됩니까?”
“예. 마이크 높이까지면 될 것 같네요.”
피아노는 다른 그 어떤 악기 등에도 잘 섞이지 않는 특성이 있기에 반주악기로 적합하지만, 그 크기와 음량이 너무나 큰 탓에 자칫하면 주인공이 될 악기를 잡아먹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들을 터치로 해결하는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좋은 방법은 바로 상판의 위치로 음량과 음색을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악의 반주를 할 땐 상판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연주하곤 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보다 잘 살리기 위해서.
“…….”
내가 부탁한 것을 보고 밀레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한 듯 보였다.
지금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플루트 연주자인 그녀뿐이라는 것을.
무언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플루트를 만지작거리던 밀레나는 곧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난 부드럽게 무대 쪽으로 한 팔을 펼쳤다.
누군가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지와 호흡에 맞춰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플루트와 함께 무대로 향했다. 난 조용히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
스튜디오 건물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이미 이야기해 뒀지만 너무 내 스케줄에 맞추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미 안에선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부스 벽면을 통해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수많은 방음재를 뚫고 건물 전체를 울리다시피 한다.
이 울림만으로도 지금 연주자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체감될 정도였다.
난 천천히 메인 컨트롤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날 발견하고는 가만히 손만 들어 인사했다.
“…….”
아무 말 없이 난 코트를 벗어놓곤 옆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유리 너머 피아노 부스에선 아나스타샤가 거의 피아노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녀의 기교 수준은 정말 이젠 내가 어떻게 평가하기 어려울 수준에 올라 있었다. 소리 역시 대단했다.
멍하니 그쪽을 보고 있다 보니 문득 프로듀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하니 프로듀서는 정말 대단하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의 연주가 끝나고, 그녀는 이쪽을 보더니 깜짝 놀라선 후다닥 뛰쳐나왔다.
“언제 왔니!”
“방금 전에요.”
아나스타샤와 가볍게 포옹하자 그녀는 너무나 반가워했다.
“오후에 누구 도와줘야 한다고 해서 오늘은 못 오는 줄 알았는데…… 그건 어떻게 됐어?”
“잘 해냈어요. 사실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같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잠깐 하느라 더 늦어버렸네요.”
“차? 그 애가 반주비 대신 차 사줬니?”
“예, 케이크도.”
“내가 도와줄걸!”
괜히 그런 소리를 하며 아나스타샤는 아쉽다는 듯 침음을 삼키다가, 고개를 번쩍 들며 웃었다.
“아무튼 그렇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난 예전엔 사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아나스타샤도 어지간한 반주는 쉽게 하실 것 같은데요?”
“그런데 아무도 안 찾더라고. 왤까?”
아나스타샤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교내에서 그녀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꽤 많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젠간 그녀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내에서는 물론이고 외부적으로도.
“차를 마시고 오셨다곤 하지만, 그래도 한 잔 정도는 더 괜찮겠죠?”
우리 둘을 보고 있던 프로듀서가 그렇게 제안했다.
다음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난 소파 쪽으로 팔을 당기는 아나스타샤에게 이끌려 그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