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13화 (913/1,277)

##  913화

차를 마시며 한참 동안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느긋한 분위기와 은은한 차 향기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오후에 잠깐 못 본 사이 있었던 일들도 모두 함께 공유하길 바라는 것처럼 내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내가 주로 이야기한 건 플루트 연주자와의 합주에서 느꼈던 것들과 연주 요령 등이었다.

플루트와 단둘이 합주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도 귀를 기울여주었다.

리드를 쓰지 않고 얇고 높은 소리를 내는 플루트는 정말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노래하는 악기처럼 들린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피아노의 반주를 끌어올려 플루트를 보조하려면 피아노 연주자 역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녹음했던 곡들의 이름이 나오자 아나스타샤가 놀라며 말했다.

“어? 정말? 라이네케?”

“예, 라이네케. 저번에 아나스타샤가 한 손 피아노곡을 연주하기도 했었죠.”

“그 작곡가 곡 중에 플루트 소나타가 있었구나?”

“모르셨나요? 정말 좋았는데.”

“들어봐야겠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난해함 등으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중 카를 라이네케의 플루트 소나타 op.167은 그나마 자주 연주되는 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얼마 전 라이네케의 곡을 연주하면서 그 작곡가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지금 역시 바로 흥미가 돋았는지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음악을 재생시켰다.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섞인 플루트 소나타가 작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온다. 우리는 그 음질 자체를 무시하고 이면에 있는 플루트와 피아노를 읽어냈다.

음악도 자주 듣다 보면 음질이 나빠도 여러 가지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찻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음악을 듣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이야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악기들은 대체 무슨 재미인가 했는데…… 요즘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그런가요? 어떤 악기가 마음에 드시나요?”

그녀는 나만큼이나 피아노 외골수인 사람이었다.

이것저것 다른 악기들을 짧게 다뤄본 적은 있었지만 그 무엇도 그녀의 출중한 재능에 자극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느낌인진 나 역시 잘 안다. 나도 바이올린을 배웠던 기억이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피아노로 수렴시켰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음악가로서의 성장도 이루고 나자, 보다 넓은 곳으로 시야가 돌아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턱을 괴고 내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난 그녀를 보며 어떤 악기일지 유추해보았다. 그냥 직감적으론 바이올린이 아닐까 싶었다.

“글쎄…… 지금 이런 플루트도 신선하고, 저번엔 첼로?”

“첼로요?”

“응. 소리가 좋더라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단순한 예측의 너머로 가 있었다.

물론 첼로에 바이올린보다 뭔가 특별한 음악적 가치가 따로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궁극적으로 보다 좋은 소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

난 어쩐지 내 빗나간 예측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왠지 바이올린 쪽에 관심이 있으실 거라 생각했어요.”

“파가니니 같은 거 말이지?”

“후후, 아마도요?”

“그런 기교적인 건 피아노로도 더 잘할 자신이 있어서.”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으며 손가락을 세우곤 테이블을 빠르게 오르내렸다. 난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그녀의 말에 내가 딱히 반박하거나 하지 않고 웃으며 동의하자, 아나스타샤는 되레 약간 쑥쓰러운 듯 슬그머니 손을 내려 감추었다.

방금 전 확신에 차 있던 표정도 멋있었지만, 이런 모습도 귀엽다.

잠시 후 그녀는 조금은 객관적으로 봐 달라는 듯 살짝 물어왔다.

“아까 들어봤지? 어땠니?”

“방금 전 것…….”

아무리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만약 무대에서 제가 다음 순서였다면 바짝 긴장해 버렸을걸요?”

“아하하하, 괜히 그런 말 마. 얼마 전에 밤새도록 주고받아도 끄떡없었잖아.”

콩쿠르 심사용 DVD를 제작할 땐 그야말로 아나스타샤와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 음악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실력이 내 예상에 못 미쳤다면 난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하면서까지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했던 건 나야말로 그녀를 확실한 실력자이자 위협으로 느끼고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겠지.

이전 같았으면 아나스타샤는 몇 번 해 보다가 점점 내 음악을 쫓아왔을지도 모른다. 꽤 오래전부터 그녀에겐 그런 경향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가 무엇을 연주하더라도 그것을 듣고 깔끔하게 분석하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쏙 빼내어선 보다 효율적으로 접목시킬 줄 알았다.

그러한 구사력은 정말 천재인 아나스타샤이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녀가 피아노 연주뿐만이 아니라 다른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는 주된 이유인 좋은 신체 능력과 좋은 머리. 그 두 가지가 확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자꾸 그렇게 보지 말라는 듯 시선을 피한다.

“아무튼…… 이제 피아노 건반을 어떻게 쳐야 할지 감이 조금 잡히기 시작한 참이지만…… 약간 여유가 생겨서인지 여기에 다른 악기를 어떻게 끼얹어야 할지도 알 것 같아졌어.”

“그래서 첼로인가요?”

“응. 첼로 같은 소리는 피아노로 커버하기 까다롭더라고.”

피아노로 갈음하기 어려우면서 대신 음악적으론 풍부하게 도움이 되는 악기로 아나스타샤는 첼로를 꼽은 것 같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우린 라이네케의 플루트 소나타를 배경으로 다른 악기들의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피아노 연주자들이라고 해서 오로지 피아노 이야기만 해야 한단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바람직한 방향성이라며 끼어들어 이야기해주었다.

“피아노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사운드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좋은 겁니다. 피아니스트를 넘어 뮤지션으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런 걸까요. 그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실 것이지 않습니까? 그럼 피아노 협주곡도 무조건 소화해내셔야 합니다. 피아노만으론 못 해요.”

“아, 그렇죠…….”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아도 생각 중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 중 하나였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난 아예 따로 협주곡 경험을 늘리기 위해서 미하일 선생님과 상의하며 리허설과 연주회를 잡았을 정도였다.

똑같은 문제가 아나스타샤에게도 있었다. 아직 열여섯 살인 우리에겐 절대적인 경험이 부족했다.

“아나스타샤는 협주곡 경험은 많지 않으시죠?”

“몇 번 정도?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아.”

“분명 지금은 더 잘하실 거예요. 얼마 전에 스푸마토 콰르텟 분들과 합주했을 때도 정말 훌륭했잖아요? 콰르텟 분들도 모두들 칭찬해주셨고.”

다행인 것은 그녀가 협응성도 굉장히 뛰어나단 점이었다.

빼어난 기교와 사운드를 가지고도 그녀는 결코 선을 넘어 막무가내로 연주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옳은 음악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올바른 판단하에서 함께 합주하는 인원들에게 정확하게 음악들을 나누어주는 법을 그녀는 너무나 잘 실현하고 있었다.

나도 그녀와 여러 번 연습을 함께 하면서 합주에 대해선 배운 점이 많았다.

“그럴까? 아하하.”

잔뜩 칭찬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목을 축이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오케스트라는 규모가 확실히 다르니까……. 음, 네 말 들으니까 조금 더 가닥이 잡히네. 어디 노는 오케스트라 없나…….”

나도 올해 활동을 따로 하지 않겠단 이야기만 해놓지 않았다면 연주회를 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보다 자유롭게 지금이라도 연주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먼저 할 일들을 조금 한 후에.

“음반 녹음 다 하시고 나면 연주회도 하시려고요?”

“음…… 아니? 뭐, 글쎄…….”

내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어물쩍 대답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난 음반 녹음한다고 한 적 없는데?”

“?”

갑자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돌아보자 그 역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다시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아나스타샤에게 설명을 바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왜 그렇게 보냐는 듯 웃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방금 연주하신 건요?”

“음반을 낼지 말지에 대한 실력 테스트지. 스피커로 들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보다 객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오늘 그 확인을 마치고는 결정을 내린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무언가를 앞으로 넘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프로듀서 보면서 결정했어. 일단 올해는 그냥 넘기는 걸로.”

그런 결론을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지만,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그녀가 연주했던 건 충분히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왜 그 결정의 이유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프로듀서가 물었다.

“무슨 말이죠, 아나스타샤. 전 분명 저번 왼손 연주만 듣고도 아나스타샤가 음반을 내도 좋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아, 그랬었죠. 저도 그래서 이쯤 하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고요. 그런데요, 마카로프.”

그 말은 고마웠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인 아나스타샤는 훨씬 더 진지한 눈빛으로 마카로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시선과 목소리는 절대로 거짓말 같은 것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옭아맨다.

“마카로프는 열여섯 살 아나스타샤의 습작이 보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럼 여기서 제 이름을 지우고 음악만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어떨 것 같나요? 타티아나에게 강력하게 제안했던 것처럼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거짓말로 답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고.

작년 내 음악을 듣자마자 프로듀서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음악만을 내어달라고 부탁했고, 난 그 이상한 이야기에 그 무엇보다 강하게 이끌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음악을 고르고, 녹음을 시작해선 나도 상상도 못 했던 수준의 음악을 이끌어냈다.

그 모든 걸 지켜봤던 아나스타샤는 그가 그 정도로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프로듀서는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목을 축이고는 날 바라보았다.

마르고 피곤해 보이는 남자다.

하지만 그 눈빛 속 깊은 곳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무언가는 분명 내 음악과 맞물려 무언가 움직일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가져다준다.

그는 다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더니 천천히 이야기했다.

“제가 타티아나에게서 정말 강렬한 승산을 봤던 건 사실입니다. 보자마자 이 클래식 업계 전체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 꼭 그런 음악만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미 실력도 충분하고.”

“무슨 말인진 알아요.”

그녀는 시원스레 웃더니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콩쿠르 전까진 안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콩쿠르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프로듀서는 그녀의 태도에 탄복한 듯 짧게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나와 똑같이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그녀에겐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의 첫 장이 될 음반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왜 콩쿠르를 언급했는지 역시 이유가 명백하다. 공인된 기록으로 확실하게 임팩트를 남기고 그것을 딛고 음반을 냄으로써 첫 단추를 확실하게 꿰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상적인 흐름을 깨고 지금 무리해서 음반을 낼 정도는 아니라고, 아나스타샤는 객관적으로 판단한 듯했다.

“오랫동안 고민하신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

“응. 그런데 잘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괜찮아요.”

누군가를 쫓지 않고,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고.

그녀 스스로의 템포와 생각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난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현명한 결정이기도 했고.

잘했다는 뜻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약간 마음을 놓은 듯 웃더니 경쾌하게 책상을 탕 쳤다.

“자,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볼까?”

“……예?”

“네 음반을 만들어야 하는 거잖니? 오늘 다른 아이를 도와주느라 시간이 조금 늦긴 했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지?”

작년에 내가 음반을 만들 때 도와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올해도 나와 함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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