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14화 (914/1,277)

##  914화

따로 리허설 등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음반을 다시 듣고 되새기는 일도 없었다.

난 태블릿 컴퓨터만 들고는 곧장 피아노가 있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보면대 위에 화면을 올려놓고 악보를 불러들였다.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작년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맨 처음 음을 어떻게 시작했으며 그다음 해석의 그림을 어떤 방식으로 쭉 그려나갔는지, 모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내 음악적 역량의 최전선에 있었던 그 연주가 지금은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한 마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깊이가 더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물렁한 반죽을 보면 여유롭게 손가락을 찔러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난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건반을 안쪽으로 쿡 찔렀다.

올림바장조의 산뜻한 울림은 베토벤 소나타 24번의 시작을 알린다.

작년에 녹음한 후 이 소나타를 연주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눈앞의 악보와 기억에 의존하며 손을 움직여나갔다.

“…….”

연주를 마친 뒤, 난 다음 곡들을 이어 연주하는 대신 곧바로 밖으로 나와선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프로듀서. 작년 음원 지금 있나요?”

“있죠.”

“재생해주세요.”

“지금 연주한 것 말고 작년 것을?”

“예. 지금.”

잠시 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한 파일을 재생시켰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며 난 방금 연주했던 것과의 간극을 재어보았다.

어렴풋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라 생각했던 건 여유롭게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을 느꼈다.

지난 1년의 차이를 함께 확인한 프로듀서는 낮게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놀랍군요. 정말 아무 연습도 안 한 것 맞습니까? 지금 보니 이전 음반도 이제야 확인하는 것 같은데…….”

“……이 곡만으로 파악해보고 싶었어요.”

이 소나타는 사실 베토벤에 대한 깊이나 실력을 알아보는 데에 그리 좋은 곡은 아니었다.

베토벤적인 뉘앙스도 약하고 유별나게 특별한 테크닉을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전반적인 역량 향상을 스스로 깔끔하게 판단하기엔 좋았다.

이 정갈한 곡 앞에선 조금 더 잘나 보이기 위한 요령이나 잡스러운 기교 등이 모조리 배제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발전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방금 전 기록한 파형을 이전 것과 비교해 보는지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시에 이 곡을 들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타티아나가 선곡해 왔을 땐 대체 왜 24번인가 생각했었지만, 듣고 나선 이만한 곡도 없음을 알 수 있었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연주를 가지고도 프로듀서는 이 정도면 확실하다고 장담했었다.

무명의 음반에 음악만을 싣는 것이니 기준을 굉장히 높게 잡아놓았는데도 난 한 번에 그 기준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난 그것을 다시 한번 크게 뛰어넘었다.

프로듀서는 무언가 훌훌 날려버리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연주는 그때의 감상을 덮어버리는군요. 한층 좋은 의미로.”

같은 걸 들었던 아나스타샤도 잠시 생각하더니 프로듀서를 향해 물었다.

“음…… 지금 하신 평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주려는 게, 타티아나가 작년과 같은 레퍼토리로 음반을 내려는 이유였죠? 마카로프.”

“예, 그렇습니다.”

그녀는 내가 작년부터 지금까지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무엇을 해오고 있는지 잘 안다.

얼마 전에도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전체적인 윤곽은 벌써 파악한 지 오래일 터였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윤곽이 아니라 예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거라면…… 정말 성공적이겠네요. 무조건.”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아나스타샤는 음악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칭찬하고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음반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서도 보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내년에 다가올 콩쿠르를 우선하기로 했을 정도로 현실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조건이라는 단어를 담을 정도라면 꽤 다양한 계산을 거친 후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볍게 웃던 아나스타샤는 다시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이것까지 내다보고 계획하셨던 건가요?”

“아뇨, 무명으로 음반을 낸 후의 계획은 없었습니다. 타티아나에게 모두 맡길 예정이었죠.”

“어쨌거나 사람들은 이게 마카로프의 기획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 말대로였다.

무명으로 일단 음반을 내서 온 세상의 평론가들을 한 번 뒤집어 놓은 다음에 1년의 텀을 두고 똑같은 레퍼토리로 음반을 낸다면 주목을 받지 않으려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선 내게 조명들이 향하겠지만, 이 음반 프로젝트 기획 자체에 대해선 나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언급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런 기획은 연주자보단 프로듀서가 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되짚어보는지 피식 웃던 프로듀서는 티스푼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성공을 확신해 본 적도 없는 것 같군요.”

그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음반이나 녹음에 대하여 자신있게 의견을 밝히고 칭찬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정말로 기대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곤 날 바라보며 말했다.

“장담컨대 이번 음반이 세상에 풀리고 나면 저도 타티아나도 지금보다 훨씬 더 바빠질 겁니다.”

난 사실 그런 것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다. 유명세나 관심 등은 내 음악의 가치와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활동하지 못하는 동안만큼은 그가 내게 맡긴 것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엔 훈장을 받기까지 했고, 수많은 기대와 희망 등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프로듀서가 운영하는 이 스튜디오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란 점도 내겐 큰 동기 중 하나였다.

그동안 난 프로듀서에게 늘 도움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동의해주기만 한다면 난 음반 수입을 전부 그에게 줘버려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때문에 난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대로 따라가야 할 땐 따라가주고 있었다.

어차피 언제나 내 생각은 똑같았다.

“후후, 괜찮아요. 그래도 제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좋습니다. 그 정도로 심지가 굳다면 아무 상관 없을 겁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역시 나와 생각이 같았다. 그가 내게 바라는 건 오로지 수준 높은 음악뿐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확인했다.

지금부턴 다시 녹음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난 앞으로의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그나저나, 아나스타샤.”

“응?”

“도와주겠다고 하셨죠.”

아나스타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시켜달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난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을 부탁했다.

“테레제를 연주해주시겠어요?”

“……응? 지금?”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와 부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냥 여기서 듣고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에서 도와주려고 했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지금 함께 테이블로 가서 악보를 다시 보며 작년 연주와 방금 전 연주를 교차 검증해보며 깊게 분석하고, 보다 수준을 끌어올리며 증폭시킬 수 있게 연구하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인간의 말과 글은 너무 느리다. 난 허공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한 번 연주해주시는 쪽이 빨라요. 저번처럼요.”

그리고 허공을 딛던 손가락을 세우면서 무언가 콱 쥐는 듯 움직였다.

“절 집어삼킬 것처럼, 해 주세요.”

“……네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네.”

여전히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깐의 고민 후, 천천히 다리를 일으켰다.

“아까 연주를 끝으로 오늘은 더 안 하려고 했는데……. 소나타 24번? 연습도 별로 한 적 없고 기억도 애매해…….”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렸다. 피아노 연주자는 무작정 피아노 앞에 앉지 않는다. 여러 준비가 완료되어야만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미비한 요소가 많은 그녀는 당연히 불안 요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녀라면 가능할 것이란 걸 분명히 알기에 할 수 있는 부탁이기도 했다.

이윽고 끝까지 일어선 아나스타샤는 허리를 쭉 펴더니 팔을 스트레칭했다.

“그래도 방금 네 연주를 들으면서 생각난 게 있긴 해.”

연습한 지 오래된 소나타가 소리로 그녀에게 전해지면서 다시금 일깨운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난 그녀라면 그것을 지금 바로 피아노로 보여줄 수 있는 실력이 있으리라 믿었다.

“역시 해 보면 알겠지?”

양옆으로 팔을 교차하며 스트레칭을 마친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아노가 있는 부스를 향해 움직였다.

잠시 후, 스튜디오 전체에 다시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며칠 전 밤새도록 음악을 주고받았던 일이 떠오른다.

아마 오늘도 어느 한쪽이 지치기 전까진 이 음악의 교류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단, 그런 예감이 들었다.

***

12월 중순이 되기까지 내 일과는 굉장히 다채로웠다.

학기말이 되어가니 당연히 내 공부도 빠지지 않고 해야만 했고, 가끔은 내 도움이나 의견을 구하는 후배들의 부름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터무니없이 많은 걸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들 상식적인 선에서 자신들이 최선을 다한 후의 결과물을 내게 보여주고 꼭 필요한 도움들을 바라는지라,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었다.

어떠한 완성된 음악적 결과물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학교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끔은 에르네스트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작곡에 의견을 주기도 했다.

그는 내 도움을 자주 구하진 않았지만 간혹 내가 다가가서 물어보면 굳이 거절하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선 계속 에르네스트의 옆에서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그러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라도 할까봐 눈치를 보며 할 수 있는 것만 할 뿐이었다.

학교에서의 일은 대체로 그 정도였고, 방과후엔 발렌티나와 연습실에 가서 함께 연습을 하기도 하고, 아나스타샤와는 스튜디오에 가는 일이 잦았다.

“오늘로 일주일쯤 되었나?”

“그렇죠?”

내 음반에 대한 일이지만 아나스타샤는 옆에서 들어주면서 의견을 말하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며 계속해서 음악적 아이디어들을 내어 주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음반을 완성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 정도 되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저변을 크게 넓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아마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일 터.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세상을 연주하면서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난 음반에 녹음하기로 한 세 곡 모두의 리허설을 마치고 준비되었고,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모두 총합해서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하루에 한 곡씩 녹음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저번에 했던 것처럼 드레스를 입고 음반을 녹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와 드레스를 입고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난 어디선가 본 사람이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대표, 포트르 발레예비치. 날 차기 프란츠 리스트로 만들어 주겠다고까지 했던 그가 정중하게 내게 인사해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바라보자 그는 자신도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단 앉아서 이야기라도 해 보란 뜻으로 옆으로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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