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15화 (915/1,277)

##  915화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

난 그가 살짝 부담스럽다.

물론 나쁜 사람이라 그런 건 아니다. 그는 클래식 음반 제작사의 대표로서 같은 세계에 발을 딛고 살고 있다.

그만큼 견식과 능력도 있었고 날 높게 평가해주기도 했다.

함께 일을 하자며 적극적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와 나는 추구하는 길이 달랐다.

난 그의 힘을 빌려 아무리 연주자로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더라도,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단 느낌을 받았고, 때문에 딱 잘라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다.

“…….”

그때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거절한 바람에 난 1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약간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 적당히 잘 지내도 괜찮았을 텐데.

순간적으로 그의 제안에 혹했던 것 때문에 여유가 없었고, 옆에서 루슬란 오빠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에 힘을 얻기도 했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건 이제 와서 변명처럼 늘어놓아도 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도 나도 어색한 이 상황에서 다시 만났고, 지금은 마카로프 프로듀서나 아나스타샤 같은 제삼자도 있다는 점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고, 그럼 나도 예의 바르게 받는 것이 옳았다.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생각을 정리한 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포멀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표트르 발레예비치.”

“그렇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뵈었으니…….”

마침 옛날이야기가 나온다. 그 역시 그때를 생각하면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난 그런 것들을 감안하며 앞으로 해나갈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올해 봄으로 향했다.

“사실 올해 했던 리사이틀에도 갔었습니다.”

“아, 그…… 감사합니다.”

“하이든에서 리스트, 라벨까지 정말 수준 높고 훌륭한 연주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전율이 떠오르는군요.”

정말로 와서 본 걸까?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거짓말 같진 않았다. 내가 연주했던 곡들의 프로그램도 아직 기억하는 것 같고.

물론 여기 오기 전에 다시 봐 두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다시 한번 리사이틀을 빌려 날 높게 평가해주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곡까지…… 음, 사실 마음 같아선 연주회 프로그램 그대로 음반 제작을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었죠.”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말은 뼈가 있는 말이겠지만, 그렇게 장난이나 치려고 이 자리에 와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난 그가 내 리사이틀을 보러 왔을 당시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지에 대해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 전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듣기로, 그는 굉장히 일찍 내 음반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고도 침묵하고 있었다.

난 그를 무작정 부담스럽게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차분하게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제게 제안하지 않으셨던 건, 제가 이미 음반 프로젝트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었죠?”

“아, 뭡니까. 마카로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어쩐지 그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지만, 어차피 지금 말하지 않으면 대화 진행이 안 된다. 말해선 안 될 일도 아니고.

그는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힐긋 바라보더니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첫인상은 분명 좋지 않았다. 난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을 지니고, 매정하게 잘라냈다.

때문에 그 역시 나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표트르 발레예비치와 나는 결국 음악으로 이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난 지금 느끼는 것들을 말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이야기하긴 어려워서, 어색한 감사인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와 마카로프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그, 협조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인사가 많이 늦었지만…….”

“하하하, 인사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가 마카로프에게 전화했던 것도 확인만 하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고요.”

“그렇게 들었어요.”

“뭐…… 정말로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던 것이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진중한 음악가였다. 그는 이제 와서 아쉬워할 것도 없다는 듯 시원하게 이야기했다.

“저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십니까?”

“절 차세대 프란츠 리스트로 만들어주겠다 하셨죠.”

꽤 임팩트 있었던 말이었기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더니 그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아나스타샤가 내 말을 듣고는 갑자기 끼어들어서 물었다.

“표트르, 그런 이야기까지 했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일곱 살짜리한테도 안 먹힐 것 같은데요.”

둘 다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어투였다.

사실 조금은 먹혔었기 때문에 난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한겨울인데도 더운지 손으로 옷깃을 잡고 펄럭거리더니 말했다.

“하, 하……. 하하. 그땐 제가 좀 흥분해서.”

그가 정말 많은 준비를 하고 정열적으로 나와 오빠를 대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때 그와 이것저것 도모해보더라도 내가 손해를 볼 일은 별로 없었을 테지. 단지 길이 달랐을 뿐이다.

어쨌든 내가 꺼낸 이야기이니 변호해주어야겠다 싶어서 덧붙여 말했다.

“그 이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오빠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고요.”

리스트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얼버무릴 생각이었는데, 막상 표트르는 내가 변호하자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뭐,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세상엔 프란츠 리스트 이후에도 수많은 유명 연주자들이 있었다.

전 세계에 엄청난 팬들을 거느리고 역사에 영원히 남은 연주자들이.

난 스스로는 물론이고 친구들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선 애정을 차치하고 굉장히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가능성이 아예 제로가 아니라는 건 사실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어 말했다.

“아무튼 그때 전 타티아나를 클래식계의 스타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괜한 모험으로 보이는 무명으로 내는 음반 같은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었죠.”

화려한 음반 데뷔는 물론이고 DVD 출시나 연관 상품 판매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던 그에게 무명 음반 같은 건 정말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터.

때문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단호했고 나 역시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결과는 세상에 나와 있었다.

그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99% 망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는데…… 결국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하. 비웃어주시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1%를 확인한 기분이 어떠신가요?”

“기적을 목도한 기분이군요.”

비웃어 달라기에 농담조로 살짝 거들어주었는데 갑자기 진지하게 받아주니까 되레 내가 당황스러웠다.

장난 같은 걸 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이상한 말 하지 말아달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내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만한 실력이 있음을 알고도 더 믿지 않은 불신자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겠죠. 마카로프는 해냈고.”

피아노 앞에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았다 하더라도 무명으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게 그리 잘못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는 보다 현실적인 방향을 추구했을 뿐.

그럼에도 그는 마치 내기라도 했다가 진 사람처럼 말했다.

“아무튼 그날 했었던 말에 대해 사과드리고, 비웃음당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사실 사과까지도 필요 없었다.

난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면 느꼈지 악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말하는 대로 그냥 따라가버리면 어쩐지 빚이 생겨버리고 말 것 같단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는 노련한 사람이다. 지금 음반을 녹음하려는 이 순간에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절대 우연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모든 걸 꿰뚫어 볼 순 없지만, 보다 신중하게 대할 순 있었다.

때문에 난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이미 음반 일에 대해선 표트르 발레예비치께서 협조해주신 부분이 있어요. 그러니 사과하심은 과해요. 비웃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투였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럼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심코 그냥 그러겠다고 답해버릴 뻔했다. 그 정도로 그가 파고든 타이밍은 자연스러웠다.

갑자기 부탁이라니 조금 이상하다.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도 딱히 없는 것 같고.

약간 경계하며 바라보는데, 그가 말하기 전에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어서 흐름을 한 번 끊어놓았다.

“저기…….”

“아,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그렇지 않아도 언제 인사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전 관심 있는 연주자들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이자 일이라서.”

그런데 표트르 발레예비치 역시 아나스타샤가 언제 끼어들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에 능한 아나스타샤도 일순 당황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라도 하는 듯 그는 악수를 청하며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대표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입니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라면 평소에 자주 사고 있어요. 대표가 어떤 분인지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하하, 반갑습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차분하게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물었다.

“어쨌든, 어떤 연유로 절 부르셨는지.”

“아…… 다른 건 아니고.”

아나스타샤 역시 상황이 어떻든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들으면서 이해하고 정리한 것들을 꽤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이렇게 직접 사과하실 정도로 진심이신데 왜 지금까진 타티아나에게 말하지 않으셨나요? 저 애라면 진즉 받아주었을 거예요.”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잠시 그 말을 돌이키며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간 아무 연락도 취하지 않았던 건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이기도 하고…… 기적이란 생각을 했을 정도로 대단한 프로젝트 과정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죠.”

난 그 말이 진득한 진실임을 느꼈다. 그는 정말로 내게 먼저 다시 접촉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던 그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꽤 큰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추를 꿰는 날이니 욕심을 조금 내봤습니다. 제가 부탁하려는 것도 딱 하나뿐입니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던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이야기하던 것이 계속 이어진다.

“연주를 녹음하는 장면을 제가 보게 해 주십시오. 저번에 들었던 그 결과물이 대체 어떤 과정에서 빚어진 것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 부탁은 마치 학교 친구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순수한 부탁이었다.

반드시 날 상품화시키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그가 맞나 싶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걸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그런 것이라면 괜…….”

“그 대가로 전 필요한 모든 도움을 드리도록 하죠.”

“찮…… 예? 대가요?”

“예.”

무슨 녹음 견학에 대가까지 필요한가 싶었지만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투였다.

거기에 대한 설명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받았다.

“참고로 이번 음반은 화려하게 낼 예정입니다. 타티아나의 공식적인 첫 음반이 될 테니까요. 어설프게 했다간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절 가만두지 않을 테고요.”

“그건…… 잘해 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난 사실 녹음 외엔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음반은 듣는 것뿐만 아니라 소장용으로서의 가치도 지녀야 했다.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베테랑인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감당할 수 있는 대로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무언가 많이 추가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녹음과 디자인 등의 제작 과정은 지금처럼 에우테르페 레코즈에서 모든 것을 맡을 겁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량 양산과 판촉 등에 대해선 아무래도 도움을 받는 쪽이 수월하겠죠.”

“아, 그래서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예. 녹음 과정만 견학하게 해 준다면 라예프스키 측에서 가지고 있는 루트 등을 활용해 러시아 전역은 물론이고 유럽 전반에 걸쳐 음반을 배치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듣자마자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난 표트르 발레예비치의 사업적 역량이 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끄는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규모가 그것을 증명하니까.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나쁘지 않은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우리 프로젝트에 갑자기 슬쩍 끼어들려는 것 같단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견학만 바라는 것이었다면 고민 않고 그리하라고 했을 텐데, 이런 조건이 붙으니까 더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순식간에 내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판매량과 명성 전부 두 분의 몫이 될 터고 저는 말 그대로 판매에만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제작비 외엔 다른 비용 없이.”

“……비용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제가 해결하면 됩니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비용을 따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난 그의 본심을 듣기 위해 조금 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전 사회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고민도 않고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순간을 견학하는 일에 대가를 드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

농담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그는 진지하고 정열적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그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진담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바보였다.

그저 완전히 다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에게서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내가 어쩌면 그를 조금 바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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