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16화 (916/1,277)

##  916화

처음 느꼈던 부담감은 곧 흥미로 바뀌었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에게 느낀 첫인상은 상품을 철저하게 기획해서 파는 사업가였고, 그게 나쁘진 않지만 나와 맞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표트르는 그런 사업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똑같이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난 그의 얼굴 이면에서 어른거리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분명히 나와 같은,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바로 경계를 풀 순 없어서 한 발자국씩 그와 가까워져 보기로 했다.

“제가 오늘 음반 제작을 한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일단 지금 제일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어떻게 와 있는가.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내가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는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 대해선 제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마카로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사람이 합작해서 만든 무명 음반의 출시가 그저 단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어떠한 프로젝트의 시작이 될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사실 시작부터 긴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건 아니었다.

난 그저 무명으로 음반을 하나 내고자 하는 것이 전부였고, 프로듀서는 초도 물량들을 뿌리고 나면 그 뒤는 내 뜻에 맡기겠다고 했었다.

때문에 그냥 거기에서 끝나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아 만든 첫 음반에서 얻어낸 것이 많았고, 그 결과에서 이어진 일들에도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처음부터 내게 영생을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가볍게 끝낼 생각이 없었겠지.

자연스레 우리의 일은 길어졌고, 현재에까지 이어졌다.

그것을 멀리에 있었을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단지 음악을 들어보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유추해낸 것이다.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다음 활동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먼저 연락을 했죠.”

“그건 제가 얼마 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말을 받아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나섰다.

프로듀서는 아까부터 약간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선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만약 불쾌해하거나 하면 곧바로 표트르 발레예비치를 내보내기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장에선 오늘 녹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달갑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듀서는 내 의향을 한 번쯤 확인할 기회를 마련했다. 그건 내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는 듯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눈인사를 보내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만약 이미 작업이 끝났거나, 계획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냥 확인으로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며칠 후 녹음 예정이란 말을 들으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렇다면 그 며칠 사이에 도와주시기로 하신 건가요?”

유능하고 철두철미한 사업가로 보이던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할 만한 행동이라기엔 너무 충동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그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며칠간의 고민 등을 되돌아보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는 그 모든 고민들이 유쾌했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러 가지가 겹쳐 있죠. 세상에 센세이션을 불러오게 될 이 음반의 제작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것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에 퍼트리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마카로프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두 분은 보통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까지.”

“…….”

사실 난 만만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처음 봤을 때도 그의 말주변에 거의 넘어갈 뻔했고, 이번에도 그가 견학을 하고 싶다는 말에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할 뻔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부분에서 날 쉽게 보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진지하게 다시 한번 관계를 정립하고 싶다는 투로 그가 이어 말했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대표란 입장으로 이곳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움직이게 되면 수익성까지 반드시 생각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끼어들려고 했다간 두 분이 절 살려 보내지 않겠죠.”

다른 회사에 찾아와 무작정 프로젝트에 끼어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지어 그가 한때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던 프로젝트라면 더더욱.

표트르 발레예비치의 말대로 그건 통념에도 맞지 않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해답을 찾아냈다.

“때문에 전 그 모든 것들을 레코드사 대표가 아닌 저 개인의 욕망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모든 건 저 개인이 투자하기로 했죠.”

“……투자요?”

“아, 투자란 말은 알맞지 않군요. 알맞은 값을 치르는 일이라고 합시다.”

그는 내게서 이후 더 큰 이익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하며 웃었다.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앞서 말한 내용들로 미루어보면 대충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윤곽은 보인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굉장히 큰 공급망을 가지고 있는 거대 음반사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에우테르페 레코즈가 정말 영세 기업으로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

때문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회사가 가진 자원과 인력 등을 쓰면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음반 제작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회사가 회수할 생각 없이 움직이는 건 아무리 자기 이름을 딴 음반사라 하더라도 대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비용을 자비로 처리할 생각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논의가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난 음반 시장을 깊숙하게 알진 못하지만 그가 말하는 규모로 어림잡으면 대략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수 천만 루블은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그렇게 라예프스키 레코즈가 움직이는 사이에 놓칠 계약들까지 생각하면 그 비용은 도무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버린다.

뭔가 엄청난 숫자를 직감하자 나도 모르게 조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난 그저 열일곱 살을 앞둔 연주자일 뿐이다.

그는 정말 부자라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놓인 저울이 고정되어있는 건 아닐 터다.

“제가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도 될지 모르겠어요.”

“혹시 걱정이 되신다면 구두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약식 계약서 초안 정도는 써도 좋습니다.”

“아, 그게 아니에요…….”

난 그를 아직도 못 믿는 건 아니란 뜻으로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만약 음반 판매가 시작되고, 라예프스키 레코즈가 정말 많은 부분을 도와주신다면 제가 그것을 정당한 대가라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마음의 빚을 느끼실 것 같단 말씀이십니까?”

“…….”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버리시다니…… 아무래도 사업은 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프인데도 말이죠. 저도 알아요.”

약간 뻔뻔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보기에 난 정말 별종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도 오빠도 사업가로서 러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들에 속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날 보자마자 사업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피아노 전공자라 하더라도 응당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베르체노바란 성을 받고도 그쪽엔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음악과 사람만이 날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이해하겠다는 듯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사업보다 더 큰 일을 해내실 수도 있겠죠.”

“…….”

그가 말하는 더 큰 일이란 결국 우리 세계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난 그가 정말로 얽매여 있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내 앞에 서 있음을 느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가치를 운운하는 건 지나치게 건방진 일이다.

음악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하는 일은 음악계에 반드시 필요하다.

어찌 보면 나 같은 연주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일궈낸 사업은 결코 내가 오만하게 바라봐도 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그는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같은 음악가로서 내가 걷는 길에 잠시 도움을 주려고 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뿐이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크게 될진 모르겠지만…… 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있어요.”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냥 타티아나라 불러주셔도 되어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껄껄 웃던 표트르는 곧 자신도 이름만으로 친근하게 불러달라 부탁했고, 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작년에 봤을 때랑은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린 조금 더 편안한 모습으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적당한 인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이곳의 호스트인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나서며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럽긴 했습니다. 표트르.”

“그건 그렇죠.”

“다들 차분하게 생각 좀 할 겸, 앉아서 차 한잔 하죠. 표트르는 저와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고.”

“그럽시다.”

그렇게 우리 네 명은 옆에 마련된 응접실로 향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벽 쪽으로 나란히 앉았고, 표트르가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차를 타러 간 사이 표트르는 드레스 차림으로 녹음을 하러 온 우리에게 흥미가 있는지 조심스레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혹시 DVD 녹화도 할 예정이냐는 질문에 난 고개를 저었다.

“작년 녹음할 때도 이렇게 드레스를 입고 했었어요.”

“아…… 특별한 이유라도?”

“실제 무대에 선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올 수 있어서요.”

전부 아나스타샤의 아이디어였고, 꽤 효과적이었다.

난 의상 등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성격인데도 분명히 마음가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 작년의 이야기가 나와서 아나스타샤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자, 이윽고 프로듀서가 각각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양 음반사 대표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이제 조금 더 디테일하게 짚고 가도 되겠죠. 표트르.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원하고 싶으신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흠, 일단은 각 지역신문사에 광고를 할 예정입니다. 물론 무명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고, 타티아나의 첫 음반 이야기가 되어야겠죠.”

“지역신문사라면 어느 정도까지?”

“모스크바에만 네다섯 곳, 전국적으론…… 조금 확인해봐야겠지만 열 곳은 될 겁니다. 거기에 인터넷 신문사들에도 모조리.”

“……그야말로 러시아 전역이군요. 시간이 짧은데 괜찮겠습니까?”

“기존의 네트워크를 활용할 것이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부탁할 수 있는 정도인데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타티아나의 짧은 인터뷰와 사진 한 장만 가지고 가도 그걸 무시할 곳은 없을 겁니다.”

요 근래 내가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는 건 표트르도 잘 알 터였다.

현실적으로 적당하기만 하다면 그런 부분에선 충분히 협조해 줄 의향이 있었다.

여전히 난 음악 생각밖에 없는 연주자에 불과하지만, 음악 외적인 일에서 일체 손을 떼려고만 드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다.

내 표정에서 의사를 읽어냈는지 표트르는 옅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렇게 하고…… 러시아에 있는 거의 모든 음반매장에 넣을 겁니다. 그 부분은 약속드리죠.”

“거의 모든이란 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군요.”

“그건 사업기밀이긴 한데, 다음에 자료를 만들어서 보여드리죠.”

여유롭지만 날카로운 대화가 오간다. 난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별나라 이야기처럼 듣고 있었다.

이미 음반을 한 번 내 봤는데도, 거의 전적으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맡겨놨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흥미로웠다.

표트르는 거의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고는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 보면서 말했다.

“유럽 쪽은 다시 지난 데이터들을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하긴 하는데…… 일단 영국, 독일, 프랑스엔 즉시 매대에 올릴 수 있겠습니다. 유의미한 양이 될 테고요.”

“전 유럽 쪽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 봤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건 북미시장이 될 것 같군요. 물론 성공시켜 본 적은 많지만…….”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작년 음반도 전 세계에 돌긴 했지만 그건 러시아판을 해외 거래로 구매해 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표트르와 마카로프의 이야기는 훨씬 더 큰 규모의 정식 판매였다.

내가 멍하니 보고 있자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이야기하던 프로듀서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아, 예.”

“지금 나온 이야기들 중에서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야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듣는다 한들 내가 해야 할 일에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난 왜 드레스를 입고 이곳에 와 있는지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반쯤 마신 찻잔을 앞으로 살짝 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아, 그…….”

“손 좀 풀어도 괜찮겠죠?”

난 손등을 살짝 당겨 스트레칭하며 그렇게 물었고,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다.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할 수 있을 최선이 어디쯤에 있을지 살짝 가늠해보며, 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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