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7화
사람은 살아가면서 실수도 후회도 많이 한다.
표트르 역시 그간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쌓아온 결과들 밑에 그러한 미련들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며 매몰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많은 것들을 인정받으며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표트르에게도 딱 하나 남은 아쉬운 선택이 있었다.
만약 타임머신으로 인생을 통째로 돌이켜 한 시점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두 번 고민 않고 2년 전 과거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때 표트르는 타티아나를 잘못 읽고 오해했고,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나서도 그저 어리숙한 소녀의 꿈이라 생각했다.
분명 착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피아니스트의 재목이지만, 그러한 실력과 현실감각은 별개다.
표트르는 타티아나가 베르체노프가에서 태어나 현실을 너무 우습게 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언젠가 한 번 부딪혀서 후회한 뒤에 다시 찾아오는 경우를 그는 자주 봐왔다.
‘우습게 보고, 나중에 후회한 건 결국 나였지만.’
타티아나는 결코 어리숙하지 않았고, 뜻이 맞는 사람을 얻는 인복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음반을 듣고 표트르는 정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타티아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솔직히 그때를 생각한다면 표트르는 다시는 타티아나를 알은척하지 않고 살고 싶을 정도였다. 창피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기에.
그러나 실수한 일 때문에 앞으로의 일도 영영 그르치는 것은 그야말로 후회에 얽매이는 일이다.
그는 과거를 수습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많은 것을 내려놓고 다시 용기를 냈다.
덕분에 표트르는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
타티아나는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급하지 않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마치 오늘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그녀는 피아노를 매만지며 한 바퀴 돌았다.
연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피아노를 한 바퀴 감싸는 듯하다.
걸음걸이만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이제 한 달 후면 열일곱 살이 될 연주자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베테랑 피아니스트들만큼이나 저 장소와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2년 전, 그리고 올해 봄의 그녀를 기억하는 표트르로선 비교를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와 비교해서 키가 더 크거나 한 것 같진 않다. 타티아나의 외견은 여전히 큰 변화 없이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의 앳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은 훨씬 차분하고 원숙한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그 모든 총체적인 비교를 어떻게 형언해보려고 하던 표트르는 결국 짧게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그렇죠?”
아이보리색 드레스 차림의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팔랑거렸다.
차를 마시기 전 이야기하면서 듣기론 아나스타샤가 음반 녹음에도 드레스를 입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표트르는 그것이 천재적인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늘 스튜디오를 찾는 연주자들은 편안한 복장으로 오곤 했다.
마치 복장을 갖춰 부담감을 가지고 무대에 설 때완 달리 편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녹음하겠다는 듯.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도 물론 만족스럽게 잘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두르고 있는 분위기를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분명히 음악에도 차이가 있을 터였다.
표트르는 모든 연주자들에게 포멀한 의상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아이디어도 가능함을 제안할 필요성 정도는 느꼈다.
‘확실히 다른 스튜디오를 보는 건 공부가 되는군…….’
연주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표트르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젠 들어볼 차례였다.
“…….”
무섭게 휘날리는 다단조의 아르페지오.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op.23의 7번이 타티아나의 손으로부터 연주되었다.
손을 풀겠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빠른 난곡을 연주할 줄은 몰랐던 표트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도 아나스타샤도 아무도 놀라지 않고 조용히 타티아나의 손 풀기 연주에 집중했고, 곧 표트르도 두 사람을 따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회색빛 공을 좌우로 굴리는 것 같던 선율은 곧 서서히 어두워져 가면서 그 크기를 더해갔다.
타티아나의 오른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왼손은 그 오른손 위를 도약하며 넘나들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정신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음악이었으나, 타티아나의 연주는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에 족적을 남겼다.
표트르는 앞으로 이 프렐류드를 어디선가 들을 때면 타티아나의 연주를 반드시 떠올리고 말 것 같단 직감을 느꼈다.
정교한 테크닉과 성숙한 음악성. 그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곡을 그저 손을 푸는 용도로 쓴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마카로프는 녹음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표트르는 프로듀서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대신 녹음을 시작하고 싶고, 지금 들려오는 음악이 대체 어떤 시스템을 거친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컴퓨터가 있는 쪽을 힐긋거리고 있자니, 2분 남짓 되는 손 풀기가 끝난 후 마카로프가 물어왔다.
“어떻게 해 놨는지 궁금하십니까? 표트르.”
“글……쎄요. 스피커는 저희 것과 같은 것 같은데.”
“스튜디오들에선 워낙 많이 쓰는 제품이니까요. 음, 저희 시스템을 잠깐 보여드리죠.”
그리고 마카로프는 아예 표트르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갔다. 표트르는 약간 당황한 채로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이전부터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모스크바 스튜디오가 꽤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직업병의 일환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고주파 반사판과 슬랫 레조네이터slat resonator의 구조만 보더라도 이곳이 클래식 음악 녹음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아노를 녹음하는 부스 안도 마찬가지였다.
음의 파동이 어렴풋하게 눈에 보인다. 피아노의 위치와 마이크의 각도 등 여러 가지가 그를 감탄시켰다.
마카로프는 확실히 대단한 실력의 음향 엔지니어였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확인했으니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녹음 시스템의 구성도 확인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표트르는 이 스튜디오의 기밀을 상당히 알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마카로프는 키보드 키를 몇 개 누르며 설정들을 보여주었다.
“저 마이크들 중에선 앞쪽의 것이 메인입니다. 그것이 이렇게 들어가고…… 합쳐지죠. 믹싱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아예 마카로프는 표트르에게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끔 컴퓨터를 넘겨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시스템을 남에게 전부 보여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표트르는 그가 대담하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마우스를 잡았다.
하지만 곧 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마카로프는 정말로 음원에 가급적 손대지 않기 위해서만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각 주파수 대역에 오차가 없도록 최대한 플랫하게, 있는 그대로의 음악을 기록하는 것이 그가 모든 심혈을 기울이는 전부였다.
깔끔한 세팅에 감탄하는 사이, 음반의 마지막 기밀이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가 짧은 스트레칭을 마치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표트르는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컴퓨터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엔 다시 마카로프가 앉았다.
큐사인이 떨어지고, 타티아나가 본격적으로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
첫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4번 테레제.
표트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반을 레퍼런스로 생각하며 떠올리다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런 건 모조리 지워버리게 되었다.
타티아나가 1년 만에 다시 연주하는 테레제는 그 전의 것보다 한 차원 더 발전해 있었다.
이전의 음악도 전 세계의 평론가들을 발칵 뒤집어놓는 데에 충분했는데, 이 음악이 공개되면 대체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아예 대놓고 비교하라는 듯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건 자신감이기도 했고 또 하나의 증명이기도 했다.
표트르는 그녀가 피아니스트로서 완성되어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도 그만의 오만한 판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24번 소나타는 굉장히 짧다. 정말 순식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주가 지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 대한 감상은 너무나 강렬하게 그의 뇌리에 남겨졌다.
이 감상을 당장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생각에 옆을 돌아보았지만, 마카로프는 말없이 조용히 부스 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막 부르려는 찰나였다.
부스 안의 잔향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타티아나가 곧장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표트르는 막 벌리려던 입을 꾹 다물고는 다시 집중했다.
‘이 곡이 여러 사람들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정말 많은 호사가들과 평론가들이 이 곡에 그야말로 무너져내렸다.
테레제는 어떻게든 이런저런 의견을 냈던 사람들도 이 교향적 연습곡에 대해선 어떠한 말도 못 하기 일쑤였다.
표트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정말 많은 교향적 연습곡들을 들었지만 타티아나가 연주엔 분명 차별화된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슈만 특유의 두 인격.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대비를 이토록 변화무쌍하게 잘 드러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두 개의 인격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것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
두 인격으로 멀리 찢어져 나가나 싶던 음악은 다시 한곳으로 모여들다가 이윽고 평행선을 그리며 균형을 이룬다.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는 그 어떠한 다른 지지도 없이 지면에 곧게 선다. 타티아나는 그 사다리를 딛고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어떠한 목소리나 성향을 잘 표현하는 것뿐만이 아닌 인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무언가.
그런 것들을 느낄 때면 평가라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반복 변주되는 음악을 멍하니 들으면서 표트르는 상념에 잠겼다.
“…….”
화려한 피날레와 함께 꿈결과도 같은 연주가 끝나고, 이번에도 특별한 휴식 없이 타티아나는 바로 다음 곡을 시작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이었다.
파우스트 소나타라 불리는 이 곡은 굉장히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라흐마니노프와 타티아나가 그려놓은 것들을 표트르는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었지만, 다른 리스너들 사이에선 많이 언급되면서도 깊은 감상으로 다루어지진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곡은 훨씬 더 정밀하고 선명한 표현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파우스트를 안다면 확실하게 내용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파우스트를 모른다면 그것을 읽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타티아나가 다시 한번 시간을 가지고 만들어낸 파우스트는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브라바.”
“아, 브라바.”
세 번의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마카로프가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고 급히 표트르도 따라 박수를 쳤다.
작년에 만들어진 기적과도 같은 음반의 제작과정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방금 정말 무엇을 본 건지 모르겠다.
마치 실제 무대에 있는 것처럼 타티아나는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선 세 곡을 연주해냈다.
이걸로 녹음이 끝이라고 해도 딱히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며칠씩 녹음하기도 하는 다른 연주자들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표트르는 이 상황이 만족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떠했나요? 표트르.”
타티아나는 그런 그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자신이 제공한 음악이 표트르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냐고 묻는 모습이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은 표트르를 감격시켰다.
이런 피아니스트가 현존하는 시대에 살며 앞으로 오래 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그를 고양시켰다.
물론 타티아나의 자신감은 스스로를 완벽에 가두는 자신감이 아닌, 더더욱 완벽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한 번 더 녹음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치 항상 그래왔다는 것처럼 이야기가 오가고, 타티아나는 다시 가볍게 손목을 스트레칭하기 시작했다.
1시간이 넘는 연주를 마치고도 그녀는 과거의 1시간의 노력과 성과가 아닌 다시 미래의 1시간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