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8화
본래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서는 것은 한 번에 연주를 끝낸다는 의미였다.
실제 무대에선 절대로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손에 쥐었을 때에 느끼는 집중력을 똑바로 발휘할 때의 음악은, 편하게 여러 번 연주 할 때의 음악과 분명히 다르다.
연주자로서 지닌 무게감은 다름 아닌 음악으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거기에 작년만 해도 난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미처 다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녹음을 했던 것은 15세의 날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고, 그것을 마치고 나면 영영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 같단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곡인 라흐마니노프를 마지막에 연주했던 건 그러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때문에 난 드레스를 입고 파우스트 소나타를 끝으로 녹음을 마무리 지었다.
사명감과 무게, 욕망, 불안감 등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던지라 그대로 쓰러져 혼절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할 수도 없었다.
“…….”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시간이 흘러 난 많이 안정되었고, 쉽사리 쓰러지지 않는다.
그동안 몇 번이고 위기를 겪고 이겨내면서 내 스스로의 내구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덕분일까.
육체는 지치지 않았고 정신은 보다 예리해진다. 분명 다음이 있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은 날 기쁘게 이끌었다.
때문에 드레스를 입고 모든 것을 끌어내어 연주를 한 뒤에도 난 마인드를 달리하여 다음을 요청할 수 있었다.
바로 이전의 연주는 기록으로 남기고, 다음 연주회를 시작하는 일이다.
‘프로들에겐 흔한 스케줄이야.’
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기획한 피아니스트는 단 한 번의 연주회로 기획을 끝내기도 하지만, 이틀이나 사흘간에 걸쳐서 여러 번 같은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한다.
조금 더 대형 연주회 기획이라면 몇 주에 걸쳐 지역을 바꾸어서 연주회를 하기도 하고, 아예 투어 형식으로 몇 달에 걸쳐서 같은 프로그램을 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강행군을 소화해내는 프로들이 많다. 그리고 그 모든 연주회는 비슷하면서도 전부 다르다.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계속해서 더더욱 단단해지고 강인해진다.
그리고 긴 연주회의 말미엔 그야말로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 연주자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난 바로 그러한 투어 일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해외 각지를 다니면서 같은 곡들을 연주할 순 없으니, 한 번 부스에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매번 난 새로운 연주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물론 똑같았지만, 마인드와 마음의 각오를 그렇게 다지는 것은 굉장히 신선한 바람이 되어주었다.
“…….”
한 번에 세 곡을 전부 연주하는 것으로 1시간 10분. 리사이틀을 마친다.
내 세 명의 청중은 처음 듣는 곡들인 것처럼 박수와 찬사를 보내온다.
그리고 난 이 연주회를 뇌리에 담아둔 채 다음 연주회로 떠난다.
시작되고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지칠 것 같지가 않아.’
작년엔 드레스를 입고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한 번의 연주로 탈진해버렸지만, 지금은 몇 번을 반복해도 난 최고의 컨디션으로 최선의 연주를 해낼 수 있었다.
허리와 목은 힘이 빠져나가도 기울어지지 않았고 단지 몇 방울의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이 느껴질 뿐이다.
내 왼손은 보다 정교하게 건반을 짚었고, 오른손은 더더욱 자유로워졌다.
이전에도 난 나약한 몸으로 피아노의 음량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건반에 힘을 싣는 테크닉을 연구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손가락 하나의 무게만으로도 피아노 전체를 무너뜨려버릴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되레 난 힘을 조절해가며 피아노를 만져야 했다.
그리고 넘치는 파워를 조절하면 당연히 다이내믹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진다. 난 그렇게 얻은 여유를 마음껏 사용했다.
그야말로 피아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는 한 끌어다가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려냈다.
세 번쯤 리사이틀을 마치니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스 밖으로 나오니 세 사람이 날 맞이해주었다. 아까보다 더 열정적인 반응이다.
“계속 반복되니 지루하시죠? 죄송해요.”
난 새로운 연주회를 상정하며 임하고 있지만 듣는 사람들은 꼭 그렇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사과를 전했다.
쉬지도 않고 3시간이 한참 넘도록 같은 곡들의 반복을 듣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표트르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오지 않았으면 후회하다가 죽어버렸을 겁니다.”
“그 정도로……?”
“그 정도입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으니 충분히 만족했다고 생각했다면, 이만 돌아가겠다 하더라도 난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까 연주를 시작하기 전 봤을 때와 똑같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지역을 옮겨서 다른 무대에 오른다고 해도 똑같이 비행기를 타고 쫓아와서 또 듣기라도 할 태세였다.
난 실제로 그런 열정적인 팬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당장 표트르가 그렇게 한다면 조금 놀랄 것 같은 기분이다.
아나스타샤는 쿡쿡 웃더니 날 보고는 살짝 물어왔다.
“힘들지 않니? 타티아나.”
“아직은 괜찮아요.”
“땀을 흘리는 것 같은데?”
“아, 그건…… 오래 움직이다 보니 땀에 젖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씻을 순 없으니까 수건으로라도 닦을래?”
“……그럴까요?”
작년엔 그렇게 움직여도 땀도 별로 흘리지 않아서 편했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신진대사가 좋아진 만큼 수족냉증도 사라졌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니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준비성 좋게 이것저것 챙겨 온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며 수건을 찾더니, 돌연 제안했다.
“아예 벗고 편하게 좀 갈아입고 쉬자. 그리고 우리 밥도 먹어야지.”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그렇다면…… 좋아요. 쉬도록 해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저녁시간이었다.
사실 두 번째 연주했을 때 적당히 쉬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세 사람은 1시간을 더 기다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마음 한편에선 다음 연주회를 또 하고 싶다는 충동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난 그것을 조용히 잠재웠다.
휴식도 제대로 갖춰야만 오늘 하루를 제대로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편하게 쉬면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결정되자 아나스타샤가 바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표트르를 몰아냈다.
“자, 남성분들은 잠깐 나가주세요. 어서요.”
“어이쿠.”
이 안보다 밖은 더 추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문밖으로 쫓겨났고, 아나스타샤는 문을 잠그고 꼼꼼하게 창문까지 막았다.
작년에도 똑같이 했었던 것을 떠올리니 문득 웃음이 난다.
문을 봉쇄한 그녀 역시 날 돌아보더니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 있어 봐, 수건 좀 적셔 올게.”
그리고 그녀는 수건을 챙겨 들고는 수도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끓이는 소리가 난다. 그사이 나는 드레스를 벗기 좋게 조금 풀어내렸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어있어서 편했다.
“자.”
“고마워요.”
따뜻한 물에 적셔서 꼭 짠 수건은 손에 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난 그것으로 목과 어깨, 팔을 닦아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던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물었다.
“등은 내가 해 줄까?”
정말 많은 생각 끝에 꺼낸 말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친구라면 등을 닦아 주는 일 정도는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심지어 에르네스트에게도 아무 사심 없이 해 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나스타샤 역시 무언가 선을 재고 있는 듯 보인다. 난 그런 그녀라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나아가 우리는 결코 경솔하게 서로를 대하지 않는다. 되레 지금 어색하게 피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부탁드릴게요.”
“응.”
수건을 다시 건네자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받고는 내 목뒤부터 천천히 닦아주었다.
아예 등을 전부 드러낸 것은 아니었기에 대충 닦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쾌한 기분이 든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아나스타샤도 무언가 상쾌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을 조금 식힌 후엔 가방에서 필요한 옷들을 꺼냈다.
오늘 길게 이 스튜디오에 있을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 가방엔 편한 옷들도 들어 있었다. 진회색빛 터틀넥과 흰색 선이 세 줄 들어간 롱스커트였다.
그런데 스커트를 막 입자마자 아나스타샤가 앗 하는 소리를 냈다.
“나도 그거 가져왔는데?”
“?”
각자 집에서 입을 것들을 가져왔는지라 미처 몰랐는데, 아나스타샤도 나와 같은 롱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같이 쇼핑을 가서 산 것도 아닌데 마치 맞춘 것처럼 같은 치마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언제 샀냐고 묻는 눈빛이 교차한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했다.
“혹시 연말 세일로 샀니?”
“예. 편해 보이길래…… 아나스타샤도?”
“응.”
잠시 후 우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후후.”
쓰는 펜이 같다거나, 입은 스커트가 같다거나, 연습하는 곡이 같다거나 하는 일들은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흔한 일이지만 늘 기분 좋은 안심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했다.
옷도 다 갈아입었겠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 되었다고 전하기 위해 문을 열었더니 표트르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먹을거리를 사 온다고 하더군요. 그냥 근처 레스토랑에 가는 게 어떨까 했는데…… 마침 제가 사드려도 되는 일이니.”
표트르는 뭐라도 내게 더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난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이곤 그를 안으로 들였다.
***
연주를 마치고 나니 약간 머리가 어지럽다.
리사이틀을 반복한다는 기분으로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새벽 3시였다.
밖으로 나오는 걸음이 살짝 불안정하다. 난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신경을 집중했다.
저번에 콩쿠르 DVD를 녹화하면서 체력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그땐 아나스타샤와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기도 했고 또 대규모의 소나타 같은 걸 연주하진 않아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파우스트 소나타 한 곡만 30분이 넘는 대곡이었다.
당연히 들어가는 체력은 곡의 시간에 비례해서 높아진다.
밖으로 나와서 보니 몇 시간 사이 스튜디오는 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무언가를 써내린 종이들과 페트병, 찻잔, 과자 봉지 등이 부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늘어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세 명의 청중도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어느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 나를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행복한 기분이 든다.
물론 그만큼 내가 음악으로 보답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난 지금과 같은 역량을 내진 못했을 것 같았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몇 번째죠?”
“아홉 번째입니다.”
“열 번이란 숫자를 의식하면 망치겠죠?”
“예, 숫자는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몇 번을 채우고 마무리 짓겠단 것을 정해놓진 않았으니 다음번 역시 이전과 같이 그저 또 한 번의 리사이틀을 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음악이 흔들리고 모든 것을 망치게 된다.
난 다시 심호흡을 하며 다음 연주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타티아나!”
갑자기 표트르가 크게 외치더니 테이블로 달려갔다.
난 뭔가 싶어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코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반사적으로 손을 대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재빠르게 표트르가 티슈를 가져와준 덕분에 드레스에 피가 묻진 않을 수 있었다.
난 티슈를 코 밑에 대고는 고개를 돌리고 웅크려 앉았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긴 창피하니까.
표트르는 무척이나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합시다. 타티아나. 연주에선 전혀 지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는데…… 슬슬 몸이 한계인 겁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 말은 기뻤지만,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웃고 있었다.
표트르의 목소리에 단지 코피만이 아니라 정신건강도 걱정하는 무게감이 더해졌다.
“왜 웃으십니까……?”
“아, 그게 아니라…… 제 몸이 정직하게 한계를 알려주니 좋아서요.”
“……예?”
“작년에도 그랬었거든요.”
난 그때도 연주를 하다가 피로에 지쳐 코피를 흘렸고, 그러고도 마지막으로 몸을 한계까지 몰아세운 끝에 혼절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비슷한 신호로 해석한다면 다음이 마지막이라 생각해야 했다.
“잠깐 쉬었다가…… 마지막 연주하고 마치도록 할게요. 괜찮죠? 마카로프 프로듀서.”
“그렇게 하죠. 그런데 이번엔 컨디션 어떻습니까?”
“정말 좋아요.”
“제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아시겠죠?”
“아하하, 그럼요. 하지만 이번엔 딱 한 번 더 견디고도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믿어 주세요.”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확실히 저번보단 좋아 보이시기도 하니.”
작년 일을 공유하는 마카로프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아나스타샤를 보니 그녀도 마지막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 웃고 있었다.
표트르만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쓰러지다니, 뭡니까? 지금 언제까지 더 하시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딱 한 번. 더 하고 마무리 지을 테니.”
내 머릿속엔 긴 시간의 흐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반복한 9번의 연주.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작년에 연주했었던 그때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선율.
그 모든 것을 잘 갈무리할 수 있을까.
열여섯 살의 날 마지막으로,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날 처음으로 증명할 음반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답을 난 자신 있게 내릴 수 있었다.
“이걸로 충분해요.”
현재 내가 지닌 모든 힘과 집중력을 쏟아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은 그 자체로 날 움직이며 연주자로서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