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9화
새벽 5시.
표트르는 헤드셋을 쓰고 음악에 빠져 있었다. 다름 아닌 타티아나가 녹음한 마지막 녹음이었다.
그녀가 오늘 녹음한 음원들을 총합 10시간도 넘어갔지만, 그 전부를 들어 볼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타티아나는 정말 착실하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한계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론 중간에 집중력을 잃고 흐트러지거나 테크닉 저하가 일어나는 것을 생각한다면, 점점 날카로워지는 타티아나의 실력은 비상식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해냈고, 표트르는 목격했다.
이곳에 와서 보게 될 것들이 결코 평범한 건 아니리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통이 아니야…….’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피아노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강인한 피아니스트였지만, 부스 밖으로 나오면 그저 가느다란 소녀에 불과하기도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마치긴 했지만 결국 그녀가 코피를 흘렸을 때, 표트르는 그녀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말하며 희열에 찬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껍질을 여러 번 쳐서 깨뜨리고 빠져나온다. 일렁이는 무언가가 그녀를 이끌었다.
진동을 읽는 표트르는 그녀 주변의 공기가 저절로 진동하는 것처럼 느끼기까지 했다.
웅크리고 있던 그녀가 서서히 일어서는 모습은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꼼짝도 못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카리스마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만들어낸 마지막 음원은 그야말로 모든 제작자들이 원하는 소리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한 피아니스트의 생명과 시간이 담긴 소리였다.
“…….”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파우스트가 시간을 멈추는 장면을 뇌리로 느끼면서 표트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카로프가 웃으며 물었다.
“다 들었습니까?”
“……너무 오래 들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길게 걸릴 만도 하죠. 그래서 어떻습니까? 도와주시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나 싶다. 하지만 표트르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부분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곡 모두 작년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파우스트 소나타까지. 무엇 하나 어설픈 부분이 없었고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어떤 특정 곡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면 분명 각 곡 간에서도 수준 차이가 느껴질 만한데, 타티아나의 연주에선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피아니스트 자체의 역량이 그냥 상승해 버린 것처럼 모든 곡이 월등하게 좋아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타티아나만이 지닌 매력적인 해석과 표현력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녀가 그저 따라했다고만 생각하진 못할 겁니다.”
“분명 같은 사람의 연주로 들리겠죠.”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타티아나가 작년 음반계를 뒤흔든 주인공이라 알 수 있을 테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엄청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작년의 이슈를 그대로 끌어올 수 있을 테고, 지난 1년간 쌓인 주목도를 모두 모아 폭발시킨다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퍼질진 예상도 불가능했다.
물론 이 모든 예상의 근거는 바로 음악에서 비롯된다.
“…….”
표트르는 지금 닫혀 있는 휴게실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문이 닫혀 있지만 저 안에선 지금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잠들어 있었다.
타티아나는 철저하게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는 이젠 정말 지쳐서 자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듣기론 작년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던데, 그것에 비하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세 곡을 한 사이클로 묶어 쉼 없이 연주하는 것 자체를 리사이틀 한 번으로 치고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주가 반복될수록 표트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정말로 모든 연주를 세트로 묶어 독립적인 연주회로 완성시키며 몇 시간 만에 수많은 연주회를 하는 것 같은 피로도를 스스로에게 가했다.
그것은 차근차근 타티아나를 소모시켜 갔고, 이윽고 그녀는 몸을 한계까지 몰아세운 뒤에 바닥에 남아 있던 에센스를 마지막으로 끌어내어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나서야 자신이 할 일을 다 했음을 선언했다.
정말 가혹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하진 않는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함에 있어서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가능함을 알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없는 무언가가 그녀에겐 있었다.
‘저 너머에서 자고 있는 건 맞겠지?’
정말 잠을 자긴 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여학생 두 명이 자고 있는 방을 열어볼 순 없었다.
대신 표트르는 피아노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세 곡 모두 대단했지만 그중 마지막 파우스트 소나타는 정말 표트르를 경악시켰다.
“……살면서 정말 많은 파우스트 소나타를 들어봤습니다. 그중엔 누구나 잘 알 만한 유명 피아니스트들도 있었죠. 수만 장 넘게 팔려서 레퍼런스처럼 유명해진 음반도 있었고.”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음반사로서 여러 아티스트들을 파트너로 데리고 있기도 했다.
물론 세계적인 연주자들은 더 큰 레이블과 손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표트르가 상대하는 연주자들 역시 거의 최고에 가까운 음악을 구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연주들만 들으며 귀가 높아져 있는 표트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음악이 그 모든 것을 갈아엎을 겁니다. 겨우 열여섯 살의 연주가, 이 곡을 레퍼토리로 하는 모든 피아니스트들을 경악으로 몰아넣겠죠.”
당장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피아니스트만 다섯 명이 넘는다.
모두 서른 살이 넘는 원숙한 경지에 오른 피아니스트들이다. 나이나 경력으로 치자면 타티아나는 그 사람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타티아나가 음악을 다루는 시간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연주를 거듭하며 압축하고 정제한 그녀의 음악성은 단지 한 조각만 들어올리더라도 팔이 빠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타티아나는 손가락 끝만으로 연주해냈다. 그것도 스튜디오라는 이점을 살려서 10번이나 반복하여.
“더 무서운 건 타티아나가 내년엔 더 강해질 것 같단 점입니다. 내후년엔 더욱더.”
“그때도 이 곡들을 연주하고 있진 않을 겁니다. 다른 곡을 찾겠죠. 두 번째 앨범이 될 테니.”
“하, 하하…….”
마카로프는 당연하다는 듯 다음 음반을 이야기했다. 아마 그것은 내년에 있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레퍼토리를 일부 포함하는 음반이 될 것이다.
그녀의 내년 일정에까지 생각이 닿자 표트르는 그것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실력이 스튜디오가 아닌 무대 위에서 터져나가면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는지 표트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세계의 노련한 프로들과 맞붙어 봐야 아는 일이겠지만, 표트르는 타티아나가 강한 피아니스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더욱 강해지리라 확신했다.
타티아나는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표트르가 말없이 의자 끝을 바라보고 있자 마카로프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만 표트르도 쉬시죠.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제가 오늘 뭘…… 고생은 앞으로 해야죠.”
“그건 그렇군요. 어떻게 할지 의욕에 넘치시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고요.”
“고생할 맛 날 것 같습니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수익을 내지 않기로 했다. 되레 비용은 모두 표트르의 자비로 나간다.
그리고 그의 인적 네트워크와 루트 등을 사용하는 동안은 굉장히 바빠질 것이다.
그야말로 손해만 보는 장사였다. 상식이 있는 사업가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일.
하지만 표트르는 이 일에 한 손 거들 수 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하기로 했다.
“오늘 본 것에 대해선 반드시 값을 치르겠단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어떠한 사명감마저 드는군요.”
마카로프는 그런 그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표트르는 알 수 있었다.
마카로프 역시 비즈니스 상대로 타티아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이곳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하는 일은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록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일종의 대화이자 노래였다. 그리고 가끔은 계시이기도 했다.
***
등교하는 길에 아나스타샤가 다시 한번 날 꼬드겼다.
“오늘 그냥 쉬자…… 타티아나…… 나 졸려…….”
하지만 그렇게 칭얼거리던 그녀는 돌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막상 연주를 한 건 너인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네…….”
“같이 늦게까지 있어 주신 건 맞잖아요?”
“그래도 피로도가 다르잖니, 피로도가. 심지어 코피까지 흘리고도 마지막까지 연주했으면서. 나 정말 말은 않고 있었지만 너 저번처럼 쓰러지는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그녀의 말대로 난 어제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날 몰아붙였었다.
예전 같았다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난 이제 괜찮을 것이란 확신을 지니고 있었고, 그 확신대로 멀쩡했다.
심지어 몇 시간 자고 났더니 지금은 두통과 근육통만 조금 있을 뿐 대체로 멀쩡했다.
“저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계속 노력했었어요. 혹시라도 쓰러질 것 같다면 바로 그만두려고요.”
“네 객관은 늘 조금 엇나가있잖아.”
“어…… 말씀이 심하세요…….”
“뭐 이번엔 맞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해낸 일들을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어제 있었던 음반 녹음은 콩쿠르와 관련된 일도 아니고 온전히 내게 맡겨진 숙제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단지 작년에도 함께 했었단 이유로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마음 같아선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다.
“…….”
하지만 정말 백지수표를 써 준다 하더라도 전부 이뤄 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 난 안다. 아나스타샤 역시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어색한 건 아니었다. 우린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 덕분이었다.
그 이해 속에서 따져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런 건 지금 같은 일상 속에서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난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많이 졸리시나요?”
“지금 내 눈 감기는 것 보이니?”
“후후,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후에 쇼핑이나 함께 갈까 해서요. 연말 할인 행사를 여러 곳에서 많이 하던데…….”
“응……?”
쇼핑이란 말에 아나스타샤의 눈이 번쩍 뜨인다.
난 그녀와 잠시 거리를 두고 있었을 때 따로따로 산 옷도 같은 것이었단 것을 떠올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이젠 필요하면 함께 움직이고 싶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같은 마음인지 방긋 웃었다.
“그럴까?”
“어떠신가요?”
“나야 괜찮지.”
“제가 그리고 옷이라도 한 벌 사드릴게요. 감사의 뜻으로.”
너무 과하지 않다. 친구의 테두리 안에 있는 가벼운 이야기다. 아나스타샤 역시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런 거라면 사양 안 할래.”
“좋아요. 그럼 가는 거예요?”
“오전에 좀 자둬야겠네…….”
“수업은 들으셔야죠.”
“몰라, 몰라.”
그녀는 대충 손을 휘적휘적하면서 그냥 눈을 감아버리기까지 했다. 난 어쩔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그렇게 우린 함께 학교에 도착했고, 계단을 올라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는 아나스타샤를 보내고 난 먼저 반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친구들과 에르네스트가 인사했다.
“안녕.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이젠 에르네스트가 반에 와 있는 모습이 익숙하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기쁘다.
반갑게 인사하자 에르네스트는 날 슬쩍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어제 녹음이었다고 했던가?”
“예. 맞아요.”
“잘했냐고 물어봐도 돼?”
이미 잔뜩 기대 중이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난 그런 그에게 기대를 더더욱 부풀게 해 주었다.
“음반 나오면 한 장 드릴게요. 기대하세요. 후후.”
“이번엔 공식적으로 주는 거지?”
“공식적?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작년에 난 그와 음반매장에 가서 내 음반을 몰래 넣어 줬었다. 그는 그것이 내 것이란 걸 알아보고 답례도 해 줬었고.
하지만 그 모든 건 우리 둘만이 아는 일로 남아 있다.
내가 일부러 시치미를 뚝 떼며 말하자 에르네스트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재미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였지.”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기억과 음악을 떠올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