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22화 (922/1,277)

##  922화

원래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보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음반을 홍보하기로 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이건 내 데뷔 음반일 뿐이었다.

작년에 냈던 음반과 연결되는 것은 내 입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알려지는 쪽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여러 조언을 주었던 두 음반사 대표들의 의견 역시 같았다.

때문에 이 시기에 데뷔 음반을 내기로 한 개략적인 설명 정도만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막상 인터뷰에서 음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선을 재 보다가 일단 음반의 분위기 정도는 유추할 수 있는 수준에서 대답을 내어 주려고 했었는데, 그게 너무 많은 힌트가 되어버렸다.

라시드는 바로 알아버렸고, 난 더 이상 발을 뺄 수가 없게 되었다.

어차피 언젠가 벌어졌어야 할 일이었으니 이젠 이 사람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때였다.

“진짜 그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작품이었다고?”

“이거 특종감 아닌가?”

“어이, 사운드 잡히잖아. 촬영에 집중해 모두들.”

그런데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나니 주변이 아까보다 훨씬 더 시끌벅적해졌다.

스태프들은 이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영상을 찍는 카메라 말고도 커다란 카메라 몇 대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빙그르르 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아까 스쳐 지나가듯 들렸던 특종이란 단어가 귀에 맴돌았다.

그건 그리 내가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라시드가 카메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도 셔터 소리가 멈췄다. 스태프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맙소사…… 잠깐만, 물 한 모금만 마시고 하죠.”

잠깐 시간이 필요한지 그는 바로 물병을 받아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역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란 것이 옆모습으로부터 느껴졌다.

난 얌전히 기다렸고, 이윽고 물병을 치운 라시드가 다시 내게 확인했다.

“그러니까…… 베토벤 소나타 24번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을 연주하셨단 말씀이시죠? 1년 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프로그램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나름 음악전문기자인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마 그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수 년은 회자될 겁니다.”

지금 인터뷰 중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라시드는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특히 이번 음반이 나온다면 더더욱.”

“아…….”

내 음악이 앞으로도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될 것이란 그의 말은 내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지 많이 유명해질 거란 데에서 오는 기쁨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기억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겐 형언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찾아온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영생을 약속했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첫발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난 만족할 수 있었다. 더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란 고양감이 든다.

라시드는 궁금한 점이 많다는 듯 날 들여다보았다.

카메라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인터뷰어의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예?”

“잘 모르겠지만……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음악을 평가받는 데에 있어 모든 외적 요인들을 지워버리고 싶어 하시는 피아니스트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걸 실천까지 하셨고.”

거기엔 정말 많은 이유가 있었다. 내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내 것이라 여기기 어려웠다.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내려놓고 음악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해낼 수 있었던 건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만난 덕분이고.

난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마음이 맞는 분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덕분이죠.”

“그런데 왜 이번엔 드러내시려는 겁니까? 모두가 바로 알아볼 겁니다. 못 알아볼 리가 없어요.”

“음…….”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까지 택한 내가 이제 와서 모든 걸 밝히려는 게 그는 납득이 되지 않는 듯했다.

기껏 지워놓은 배경을 다시 그리는 건 자칫 모든 걸 쇼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전부 재미난 장난일 뿐이었다는 듯 드러내버리면 쉽게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듯 라시드는 염려했다.

그는 내가 진지하게 있길 원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난 정말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 끝에 데뷔 음반을 결정했으니까. 지금도 정말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생각을 살짝 정리하며 난 그에게 설명했다.

“본래 프로젝트는 이렇게 될 이유가 없었어요. 제겐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죠. 그냥 침묵하거나, 아니면 또다시 프로듀서의 뒤에 숨어서 다음 음반을 내거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음반을 또 낼 생각은 별로 없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이름으로 낸다는 건 당연히 더욱 어렵고 고민이 많이 되는 일이었다.

사실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활동 자체에도 확신이 없었고.

그러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난 스스로에게 가하던 제약과 속박들을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다.

새로 손에 쥐게 된 음악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고 똑바로 펼쳐 낼 궁리만 할 수 있었고, 내 음악을 알아보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드니 이미 절 제대로 보아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내가 구사하는 음악과 내 이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타티아나란 피아노 연주자로서 난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언제 잊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제 더 이상 날 그리 힘들게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틈에 조금이라도 더 날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 난 다시 음반을 내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엔 무명이 아닌 내 이름으로.

라시드는 신기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그 음반에서 타티아나를 특정해 낸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예, 몇 분 있었죠.”

“그게 누굽니까? 전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알 수 없었는데. 혹시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표트르나, 문화부 음악예술국분들이나…….”

“아.”

“그리고 라시드께서도 알아보신 것 아닌가요?”

라시드는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 힌트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바닥에서 그 정도 힌트를 받고도 못 알아차리면 그만두는 게 낫습니다. 저 말고도 저기 다른 스태프들도 다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래도 제가 프로그램을 카피했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아닐 것 같더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 라시드는 단호했다.

이미 내가 연주하는 음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난 눈웃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쯤에서 이것을 특종으로 다룰 것이냐고 살짝 물어볼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라시드는 계속 기자와 청중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같았다. 난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무튼…… 활동을 하면 할수록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깨달으신 것이군요?”

“예, 작년과 달리 이젠 제가 내는 소리에 중심이 있다는 걸 느껴요.”

“……작년엔 없었습니까? 없는데도 그 정도?”

“많이 불안정했었죠.”

작년만 하더라도 난 내 음악을 지켜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끝까지 음악을 쥐어짜낸 끝에 쓰러져 혼절했던 건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를 라시드에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난 내적인 이야기에서 살짝 초점을 돌려 이후의 상황 쪽으로 맞추었다.

“그리고 작년 일은 많이 도발적인 일이었잖아요? 약간 비겁하기도 했고요.”

“비, 비겁이라뇨.”

“곤란하셨을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도 제가 올해도 모른 척 또 그럴 순 없죠. 이쯤에서 자수하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시드. 잘 될까요?”

“…….”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였다.

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작정 음반을 세상에 던졌다. 그것은 그냥 무시당하지 않고 여러 지지에 힘입어 음악계 전문가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난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좋게 보아 당돌한 일이지 나쁘게 보면 건방진 일이라는 것도.

같은 일을 두 번 했다가 결국 드러나면 아마 비판도 많이 받을 것이다.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게 도전장을 내긴 했지만 정말로 그들을 전부 비꼬며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는 그저 작은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리라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생각처럼 잘 될지는 실제로 겪어봐야 알 일이다.

기자이니 세상사에 밝을 라시드는 조금 예상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아무 발전도 없이 같은 곡들을 녹음하진 않았겠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어느 정도 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합니까?”

“…….”

안 그래도 추상적인 음악의 수준을 계량하여 비교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특히 다른 사람의 음악이라면 모를까, 자기 자신의 음악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난 계속해서 음악을 완성시키고 다시 깨뜨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어렴풋이 느끼게 된 부분이 있었다.

그건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손가락을 들어 올린 나는 그것으로 허리춤 높이의 허공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렇게, 한 마디 정도.”

피아노의 건반은 정말 얕다. 그러나 내가 허공을 누른 깊이는 그보다 훨씬 깊었다.

날 물끄러미 보던 라시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누구나 용서할 겁니다. 제가 작년에 물 먹은 기자나 평론가들을 몇 아는데, 모두들 다음 음반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칼을 갈고 계신 것 아닌가요?”

“무작정 혹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똑같은 곡을 보다 수준 높게 만들어서 가지고 오면 어떻게 그리하겠습니까? 하하. 절대로 못 하죠.”

“아.”

그 말을 듣고서야 난 탄성을 흘렸다.

모두가 다음 음반을 기다린 이유는 보다 날카롭고 정당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일 터다.

하지만 새로운 곡이 아니라면 이전과 비교하는 것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런 것까지 계산하진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타티아나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그냥 단순히 날 안심시켜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기자로서 냉정하게 상황을 본 뒤 내게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감사의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시드는 대화가 잘 통해서 다행이라는 듯 손가락을 모아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이 이야기를 터뜨려버리면 안 되겠죠. 지금 스태프들은 다들 간만에 잡은 특종으로 흥분해 있는 것 같은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 자세한 내용을 기사로 쓸 생각이 없습니다. 입단속도 제대로 시키도록 하죠.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왜죠? 라시드에겐 그게 더 유리할 텐데요.”

“재미없잖습니까.”

라시드는 마치 악동처럼 킥킥거리며 웃었다.

모든 걸 한 발자국 빠르게 터트려버리면 특종을 잡을 수 있긴 하겠지만 그래선 내 음반이 굳이 같은 프로그램을 선별한 이유가 반감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무척이나 빠르고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난 그런 그에게 어느 정도 협조해 줄 마음이 있었다. 그건 그도 알아차렸는지 가벼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음반이 발매되고 나선 꼭 다시 한번 인터뷰 하기로.”

“단독 인터뷰를 원하시는 건가요?”

“안 됩니까?”

라시드는 자연스럽게 이것을 1차 인터뷰로 하고, 그다음 메인 인터뷰를 원했다. 거기서 제대로 기삿거리를 뽑아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로선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즈베스티야 정도 되는 규모의 언론이라면 단독 인터뷰를 하더라도 러시아 전체에 나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후후, 그렇게 할게요.”

가볍게 승낙하자 라시드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난 그 손을 맞잡았다. 라시드는 앞으로의 일이 정말 기대된다는 듯 흥미진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