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25화 (925/1,277)

##  925화

병원 로비엔 아직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그리 좋지 않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밖으로 향했다.

물론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날씨만 좋았으면 함께 조금 걷거나, 주차장 반대편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12월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분다.

겨울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병원 입구에서 두 걸음 남짓 나섰을 뿐인데 타티아나는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우뚝 멈춰 서선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으흠, 잠깐 걷기엔 날씨가 너무 차네요.”

“글쎄, 괜찮은데.”

“……추위에 너무 강하신 것 아닌가요?”

“좋은 것 아냐?”

에르네스트도 사람인 이상 추위를 느끼는 건 사실이었지만 절대로 춥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버릇처럼 별것 아닌 양 굴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곧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고 해서 뭐든 다 할 필요는 없어요.”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약간 놀랍기도 했다.

무언가를 강하게 이겨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타티아나야말로 그런 부분에 있어선 정말로 무엇이든지 한다.

사람인 이상 힘든 일이 많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지금껏 수많은 천재들을 봐 오면서도 그녀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타티아나도 어딘가 모르게 조금 뭉툭해져 있었다.

그녀의 약한 부분을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곧 더 나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고 묻는 건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난 그냥 추위를 잘 안 탈 뿐이니까.”

“그냥요?”

“응. 그냥.”

말해놓고 보니 무뚝뚝을 넘어 퉁명스럽게까지 들린다. 어휘력이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나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깁스를 풀게 된 것을 축하해주며,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친구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과라도 하려던 찰나, 아리송한 표정으로 에르네스트의 말을 반복하던 타티아나가 곧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이라는 말, 참 좋네요.”

타티아나는 정말 생각이 많고 주의 깊은 사람이지만 때때로 이렇게 힘을 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끔 이럴 때의 그녀는 자기 자신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서 대신 무언가를 맛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곤 한다.

에르네스트로선 잘 알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였다. 타티아나는 양손을 모아 입김을 후 불었다. 하얀 형태를 지닌 입김이 흩어져갔다. 그것을 보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전 추우니까 그냥 어딘가 들어가고 싶어요.”

“두 걸음만 뒷걸음치면 돼.”

“병원 말고요!”

방금 나온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에르네스트도 싫었다.

치료를 위해 계속 와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일단 오늘은 깁스를 푼 것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럼 어디로 갈까.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따뜻한 곳을 떠올려보았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타티아나가 타고 왔을 차량 안이지만, 지금 차에 타라고 하는 건 얼른 가라고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오해다.

지금 그가 제안할 수 있는 답은 사실 정해져있다시피 했다.

‘답례라 하면 되니까…….’

여러 번 신경을 써주기도 했고, 오늘도 이렇게 찾아와주었다. 저녁 식사를 사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것이 혹 비겁한 일이진 않을까 생각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타티아나에게 무언가 제안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아직 내려놓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최근 타티아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조금 자중했던 건 그런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가 함께 밤늦게까지 녹음을 하기도 했고, 무작정 발을 빼고만 있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에 없는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이쯤 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는 당장 떠오르는 판단과 기분에 따라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음…… 근처 레스토랑에 식사라도 하러 갈래? 이젠 가도 될 테니까.”

“이젠?”

“이거 풀었잖아.”

그는 왼팔을 흔들거렸다.

사실 깁스를 차고 있는 동안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타티아나와 식사 같은 걸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다 끄는 것은 물론이고, 낑낑거리면서 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자르는 모습 같은 건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왼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스테이크를 눌러 고정하는 것 정도는 어렵게나마 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든다.

타티아나를 조금 더 안심시킬 수 있는 증명의 시간이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괜찮…….”

그런데 말을 맺으려던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에 문득 빅토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둘 사이를 촬영하려는 파파라치들이 꽤 붙었다는 말.

에르네스트는 그런 것들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게 피해가 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의 경호원들은 상상 이상으로 무섭고 유능하지만, 그래도 이쪽에서도 조금이라도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쪽이 낫다.

그렇게 판단한 에르네스트는 자연스레 목표를 살짝 틀었다.

“아니지, 그냥 식사로 넘길 일이 아니네. 파인다이닝으로 가자.”

“…….”

타티아나는 기뻐하지도,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저 에르네스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프라이빗룸이 있는 파인다이닝이라면 괜찮겠거니 생각하고 제안했을 뿐인 에르네스트는 그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해석하지 못했다.

숨을 두어 번 들이쉴 즈음, 타티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전에 말씀하셨던 것 때문인가요?”

“응?”

“저에게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단 거요.”

그냥 별생각 없이 낸 제안이었지만, 조금이나마 타티아나가 기분 좋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봐야 에르네스트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

“그렇다면 그냥은 아니네요?”

정확하게 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지금 스스로가 그냥 움직인다고 말하기에도, 그렇다고 계산적으로 움직인다고 하기에도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니.

잘 모를 마음을 자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썹만 까딱였다.

타티아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결론을 내렸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적당하지만 그래도 저녁 식사는 집에 들어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하심이 좋으시리라 생각해요. 아마 가장 기다리실 분들이니까요.”

엉망으로 말하던 에르네스트와 달리 딱 부러지게 야무진 거절이었다.

합리와 기본을 중시하는 타티아나다운 대답이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런 생각이 깊은 태도는 그녀를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꼼짝 않고 똑바로 서 있지만, 사실은 흔들거리는 감정을 붙들어 매며 에르네스트는 일단 동조하고 봤다.

“그건 그렇지.”

“전 이렇게 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그건 동조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차디찬 겨울바람도 끄떡 않고 버티고 있는데, 그녀의 쌀쌀맞은 말이 춥다고 할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점점 더 추위를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타티아나가 태도를 휙 뒤집으며 그에게 거꾸로 제안했다.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우니까 차는 한 잔 마시고 갈까요.”

“……어?”

“어서요. 추워요.”

그러면서 타티아나는 휙 뒤돌아선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그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그녀가 저녁 식사 제안을 일단 거절한 건 그저 오늘 그에게 남은 시간을 전부 빼앗긴 않겠단 배려의 뜻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얼마 정도는 자신에게 줘도 되지 않냐는 듯, 이렇게 앞장선다.

“…….”

곧게 걷는 걸음걸이는 마치 타티아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음악성과 인간적인 매력에 반했던 것을 떠올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차량으로 조금 이동해서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카페였다.

에르네스트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바로 타티아나가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았을 때 왔었던 카페이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이곳을 기억한다는 티를 내자 타티아나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저번에 이곳 괜찮았었죠?”

“그랬지.”

깁스를 한 채로 공공장소에 가기 싫었는데, 이곳은 프라이빗룸이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예전처럼 두 사람은 안내를 받아 2층의 방으로 입장했다. 그리곤 웨이터에게 각자 음료와 디저트를 몇 가지 주문했다.

무관계한 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타티아나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하시나요? 에르네스트.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왜 그런 걸 기억하는 건데.”

“당연히 기억하죠. 오래 지난 일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할걸요?”

물론 그렇겠지만……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그 주제는 피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그때와 다른 것을 찾아내어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기억해 봐.”

“다른 것이요?”

“그래. 그때 난 깁스를 하고 있었잖아. 그건 기억나지 않아?”

“……기억하죠.”

타티아나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에르네스트의 왼팔로 향했다.

팔꿈치에 저릿한 기분이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괜찮다는 듯 팔을 들어 까딱거렸다. 이젠 일단 겉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활은 오래 걸린다고 하나요?”

“내가 하기에 따라 달렸겠지.”

“힘드실 거예요…….”

그건 당연히 잘 안다.

지금 그냥 들고 있기만 해도 힘든 이 팔을 가지고 다시 재활해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만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계산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계산 따윈 잊고 무조건 재활에 목숨을 걸 수 있겠단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건 타티아나가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켜낸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로서 월등한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나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와 다시 나란해지려면 에르네스트는 못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생각뿐이었는데…… 타티아나가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에르네스트도 자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기뻐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제야 타티아나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빠르게 이야기했다.

“기뻐요. 분명히…… 에르네스트의 치료에 차도가 있다는 것은 제가 정말 바라 못지않던 일이니. 하지만 남은 재활이 길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무신경한 게 아닌가 하고…….”

갑자기 왜 이런 태도 변화가 있었는지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파악했다.

오전에 타티아나가 기뻐하며 파티를 제안했을 때, 에르네스트가 여행을 염두에 두고 파티는 거절했던 것을 그녀는 살짝 오해한 듯싶었다.

아주 사소한 오해였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선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단순하게 말했다.

“되레 신경을 너무 쓰는 게 아닌가 싶은데. 타티아나.”

“……그런가요?”

“내가 언제 재활을 할 자신이 없다고 한 적 있었어?”

약한 모습을 보일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고, 약해질 때면 타티아나가 그를 북돋아준다.

에르네스트는 무조건 이겨내겠단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도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봐온 에르네스트를 긍정했다.

“아니죠, 전혀.”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 그냥 축하해 줘.”

이런 기묘한 허락이 타티아나에겐 필요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타티아나가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니…… 깁스를 했던 모습은 이미 덧씌워졌어요. 정말 기쁘네요.”

“나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좋네. 그럼 되도록 신발 건도 덮어주면 안 될까. 나 지금은 제대로 구두 신고 있는데.”

“아, 그건 잘 안되네요. 미안해요.”

타티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거절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대화 주제는 곧 자연스럽게 에르네스트가 깁스를 푼 것에 대한 축하로 넘어갔고, 타티아나는 오전에 계획했었던 여행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후보를 몇 가지 정도 정해둘까요?”

“그래봐야 몇 종류 안 될 건데?”

“그래도 잘 골라보고 싶잖아요.”

타티아나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성격이 아닌데도 꽤 적극적이었다. 들뜬 목소리로 그녀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일전에 빅토르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베르체노프가에서 파티나 여행을 계획 중이라 들었는데, 막상 타티아나는 그런 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혼자서 준비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에르네스트는 문득 깨달았다.

“그보다, 어…… 아버님에게 허락을 받는 게 더 문제일 것 같은데.”

“아.”

“뭐…… 허락은 해 주시겠지. 그, 우리만 가는 게 아니니까?”

베르체노프가에서도 준비 중인 게 있다면 허락을 안 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문제라고 했다가 바로 괜찮을 거라 말하는 우스운 일이 되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사실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지금 스스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만약 타티아나와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해버린 탓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바보처럼 굴진 않겠다는 일념에서 에르네스트의 머리는 자동적으로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리를 앞에 있는 컵으로 내리쳐서 잠재우고 싶었다.

막상 타티아나와 마주 보고 있으면서 그녀의 아버지와 대면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담이 강한 에르네스트도 결국 타티아나를 보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타티아나도 그를 피하듯 어색한 웃음과 함께 시선을 테이블 구석에 두고 있었다.

“그렇죠, 아하하. 여럿이서 가는 거니까.”

두 사람이 어색한 이야기만 두서없이 나누는 건 웨이터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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