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6화
원래는 여행을 놓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삐걱거리면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 에르네스트는 비교적 유명하고 건전한 곳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며 스마트폰을 들었고, 나 역시 아직 부상 상태인 그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 여행의 목적을 휴양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뭔가 진전 없이 겉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
오렌지주스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문 채로 난 눈만 살짝 들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검색하는 중인지 화면을 보고 있었다.
꽤 진지하게 이 계획을 궁리하는 모습이다. 지금 집중력을 잃고 있는 건 나뿐일 것이다.
‘왜 이런담.’
여행에 향해 있던 집중력은 이미 엉망이었다.
아침에도 그렇고,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넘겨짚는 일이 자꾸만 생기고 있다.
지금도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단 이야기를 듣고 바로 든 생각은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실까에 대해서였다.
물론 모두 함께 간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강력하게 이야기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
하지만 아버지가 어디 보통 분인가. 내가 이 기획을 떠올린 것 자체가 에르네스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바로 알아보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흔쾌히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아버지는 에르네스트가 계단에서 날 구해준 일에 대해 알고 계신다.
때문에 치료에 관련한 이런저런 일들을 모두 해 주신 것이다. 겨울 휴양도 그 치료의 연장선으로 놓고 본다면 그리 이상하지 않다.
미리 그런 생각을 해 보던 난 스스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자각했다.
“……후.”
빨대에 바람을 불어넣자 주스가 부글거린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은 한숨으로 화했다가,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일부러 그렇게 초점을 멀리 두고 멍하니 장난을 치던 나는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 그…….”
“지루해?”
“예?”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난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일부러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시간을 무의미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허둥지둥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먼 생각을 하다 보니.”
“음…… 미안해. 나도 지금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비교를 하다 보니까 이쪽에 신경이 팔렸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야말로 정보를 찾아보자고 했었는데…….”
날짜나 장소 인원 등 상의할 일이 많다. 하지만 상의는커녕 그냥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에르네스트와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해본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주스를 불고 있었던 건 아무래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난 깊게 후회하면서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가서 아버지에게 여쭈어볼게요. 신년 연휴에 시간을 비우는 일이니까…….”
“응. 나도. 이따 저녁식사 하면서 물어봐야겠어.”
그런데 에르네스트 또한 어딘가 조금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가 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면 반대로 내가 대답해야 할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산은 내가 했다. 축하의 의미가 있기도 했고, 저번엔 에르네스트가 낸 적이 있었으니.
저녁 식사는 집에서 하기로 정했던 대로 우린 잠깐의 시간만 보내고는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많이 충족된 기분이 든다. 할 일을 잘 했다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에 도착한 뒤, 잠깐 씻고 쉬고 있자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나제즈다의 부름이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자 이미 아버지와 오빠가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무언가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단어들이 오가는 걸 보니 사업 이야기인 것 같았다.
오빠 옆자리에 앉자 대화가 뚝 멎었다. 그리고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하셔도 될 텐데, 두 분은 꼭 내가 자리에 있을 땐 이렇게 배려하곤 했다.
“요즘 어때? 타티아나.”
“좋아요.”
오빠가 평범하게 말을 걸어왔고, 우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말이기도 하다보니 특별한 일이 있을 법도 한데, 난 녹음 이후 할 일이 하나도 없어서 공부와 연습만 하는 중이라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이야기만으로도 우린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오빠도 나도 평범함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인 걸까.
종종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 주고받는 목소리들로 덮어씌울 수 있었다.
난 이렇게 오빠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 오빠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별것 아니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 곧 드미트리가 테이블 위에 요리들을 올려놓았다.
그의 요리는 항상 보는데도 늘 특별했다. 마치 우리가 보내는 일상처럼.
“…….”
식전 기도를 올리고, 얌전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샐러드와 생선 요리를 몇 점 입에 넣고 눈치를 살짝 봤다. 언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타이밍을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 한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라면 빨리 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아버지.”
“그래.”
쭈뼛거릴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허락을 받는 건 괜히 어렵게 느껴진다.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여쭈어봐야 하나 생각해봤는데…… 지금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뭔데 그렇게 고민하느냐? 그냥 말해 보거라.”
아버지는 뭔가 복잡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셨는지 나이프를 내려놓고 날 바라보셨다. 난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신년 연휴에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요.”
“여행?”
“안 될까요?”
너무 빠르게 말했나?
차라리 약간 더 빙 둘러서 신년 연휴에 무언가 집안 행사 같은 것이 있진 않은가 물어보는 게 먼저였을까? 생각해 보니 그쪽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우리 집에서 난 상당히 자유롭게 내 시간을 쓰고 있었지만, 먼저 묻지도 않고 이렇게 여행 계획을 허락받으려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단 기분이 갑자기 든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살피고 있는데, 아버지는 뭔가 예상 밖의 질문을 던져오셨다.
“내가 네게 연휴에 뭘 할 건지 물어봤던가?”
“어…… 예?”
“연휴에 파티를 할지 아니면 너희들끼리 여행을 갈 건지 물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아무튼 연휴 일정에 대해 터치하시려 한 적은 없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예,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럼 네가 그냥 생각한 계획으로?”
“그렇죠……?”
오늘 오전에 에르네스트가 깁스를 푼다는 말을 듣고 들떠서 즉흥적으로 떠올린 건 파티였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에르네스트에게 맞춰주는 것이었으니까. 내 생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비스듬하게 날 바라보더니 이윽고 짧게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
간단하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 어려울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누구랑 가는지, 그리고 위치 정도는 물어보시고 나서 생각하실 줄 알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흔쾌히 허락해주실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약간 당황한 내가 포크를 달그락거리자 아버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도 내년엔 신년 파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행이 좋다면 그리해도 되겠지.”
“원래 계획을 하고 계셨다고요……?”
“그래.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도 있고 하니…….”
아마 베르체노프가의 이름으로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파티가 열린다면 아버지의 지인분들이나 정말 중요한 분들이 많이 오시겠지. 난 당연히 딸로서 자리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휙 저어보이며 말씀하셨다.
“뭐,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래서, 친구라면 어떤 친구들과 같이 가려는 거지?”
“그건 아직 다 정해지진 않았는데…… 일단 이야기가 된 건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예요.”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이미 허락이 나온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 더 안심 쪽으로 바뀌었다.
똑 부러지는 두 사람이 같이 있다면 아무래도 별문제 없으리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런데 그중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발음하시는 느낌에서 난 살짝 불편함을 느꼈다.
그냥 넘길 수 없는 이름이긴 했다. 단순히 남자애라서가 아니라, 나 대신 크게 다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루슬란 오빠가 살짝 끼어들어 언급했다.
“에르네스트는 괜찮겠어? 아직 팔이 다 낫지 않았을 건데.”
“아! 그것 말인데, 오늘 깁스를 풀었어요. 그래서 앞으론 재활을 하면 된다고 하네요. 그러니 여행도 휴양에 가까운 느낌으로…….”
난 나도 모르게 활발하게 이야기하다가, 이게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 일인지 갑자기 확신이 안 서서 조용히 얼버무렸다.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래, 그리하거라.”
다시 한번 확고한 허락이 떨어졌다. 어떤 계획을 가졌든 믿고 두시겠다는 눈빛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전적으로 날 신뢰하시는 모습을 보이시곤 했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늘 가장 적절한 지지를 내 곁에 두시려 한다.
“하지만 내년이면 성인 직전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단체로 멀리 여행을 갈 생각이라면 보호자가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보호자……요?”
“루슬란.”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아버지는 곧장 오빠를 불렀다.
오빠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식기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마주보았다. 아버지는 짧게 말했다.
“따라갔다 오너라.”
“……그럴까요?”
“그래.”
작년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처음 갔을 때 오빠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오빠는 자기가 왜 가야 하냐고 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확연히 태도가 다르다. 어른이 필요하다면 응당 그 역할을 해주겠다는 모습이었다.
오빠도 나이를 더 먹고 성장했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 역시 그런 오빠에게 조금 더 기대를 싣는 것 같았다.
“루슬란 넌 베샤스트니흐가에 아직 인사하지 않았지. 이참에 가서 인사도 하고 괜찮은지 상태도 보고 와라.”
“알겠습니다.”
에르네스트가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병원 수속과 인사 등을 이유로 직접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그사이 바쁜 일들이 많아서 에르네스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날 구한 것에 대해 인사를 하는 것이라면 어떤 식일까? 잘 모르겠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동시에 오빠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 또한 있었다.
“그런 것이라면 따로 시간을 내도…… 오빠 신년에 바쁘신 것 아닌가요? 시간 괜찮나요?”
실제로 어떤가 싶어서 살짝 물어보니 오빠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왜, 싫어?”
“아뇨! 전혀! 되레 더 좋은걸요?”
“……좋을 건 또 뭐야?”
우리들끼리 노는데 끼어들어 방해가 되지 않겠냐며 오빠는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난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오빠가 같이 가 준다면 그만큼 안심될 수가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환영하자 오빠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아버지가 나한테 일이나 더 시키려 들 테니까, 너희들 보호자 역할을 핑계로 쉴 겸 같이 가지 뭐.”
역시 연휴라 하더라도 할 일이 많은가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나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지금 맞은편에 있는 아버지가 조용히 그 말을 듣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오빠 혹시 바보 아니냐는 말을 하기 직전, 아버지가 먼저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루슬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자유지만, 입 밖으로 내진 마라.”
하지만 오빠는 킬킬거리기만 했다. 어차피 여행에 함께 하라고 한 건 아버지였으니까 아무렴 어떻냔 투였다.
“농담이에요, 아버지. 설마 농담을 가지고 혼내시려는 건 아니죠?”
“그게 아니라,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난 네게 시키고 싶었던 일들을 몰아서 일찍 끝마치게 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
그 한마디에 오빠는 밥맛이 싹 달아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많이 어른스러워진 것 생각했던 건 아무래도 도로 취소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