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27화 (927/1,277)

##  927화

다음 날 학교엔 거의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침에 깁스 없이 등교한 그를 보고 깜짝 놀란 친구들이 모두 앞다투어 축하해주었고, 어떻게 소문을 들은 것인지 반으로 찾아온 다른 과 학생들 역시 에르네스트를 응원했다.

반 안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서 복도에까지 학생들이 가득일 정도였다. 못해도 백 명은 넘지 않을까 싶다.

원래부터 그의 인기는 전교에 걸쳐 굉장히 높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인파가 몰리게 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준 모두를 성심성의껏 맞이했다. 응원에는 감사로, 질문에는 답변으로.

그는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살짝 까칠한 편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 누구보다 친절하고 노련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피로가 쌓이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난 그의 얼굴에 서서히 피곤함이 묻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오늘만은 살짝 피곤할 정도로 응원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향하는 관심은 오전이 지나서도 식지 않고 계속되었다.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

“꽤 오래 걸리네.”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리처드, 한승우. 그리고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는 모두 둘러앉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이런저런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완전히 나아서 복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풍선으로 장식하거나 폭죽을 터뜨리기엔 애매했다.

때문에 우린 그냥 모여서 이 정도로 간소하게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조금 늦는 것 같았다.

요 근래 계속 스터디룸에 오고 있었으니 오늘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서 그를 붙잡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 저거 하나만 먹으면 안 되냐.”

“뭐?”

“뭐라고?”

그 와중에 리처드가 철없는 소리를 해서 모두의 눈총을 샀다.

특히 류보비는 자기도 참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쉽게 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과 한심함이 섞인 눈빛으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물론 리처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난 그가 일부러 장난삼아 이런 말들을 곧잘 한다는 것을 알기에 숨죽여 웃었다.

아직 뭔가 먹지도, 제대로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우린 시시한 말장난들을 주고받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참에 여행 이야기라도 꺼낼까 싶었지만, 에르네스트가 있는 자리에서 하고 싶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자, 피곤한 얼굴의 에르네스트가 막 들어오다가 우릴 보곤 놀라서 멈칫했다.

리처드가 그를 콱 붙잡듯 소리쳤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오늘의 주인공 납셨네.”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에르네스트는 슬쩍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놀랐네…… 뭐야 이거?”

“뭐긴 뭐야, 오늘은 그냥 놀자고.”

뭔가 화려하게 파티 준비를 해 놨다면 에르네스트도 난색을 표했겠지만, 그런 게 아니다 보니 금방 받아들인 것 같았다.

테이블의 제일 상석에 그를 위한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에르네스트를 그 옆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기다리고 있었으면 연락을 하지 그랬어.”

“그럼 서프라이즈의 의미가 없잖니.”

“사실 어느 정돈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냐?”

우리 모두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 학교 전체가 그를 주인공처럼 대해주고 있었으니 이런 걸 예상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어쨌든 우리가 모두 모여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들긴 하는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아예 말 걸 틈도 없더라. 선생님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온 거야?”

“어.”

오전엔 아이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만큼 오후엔 선생님들이 그를 찾았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곤 식사 후에 계속 이어진 릴레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세프 선생님은 물론이고…… 다른 분들도 뭐 그리 하실 말씀들이 많은지…… 거의 무슨 팔이 새로 자라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네…….”

“푸하하하, 다른 애들 반응도 그렇던데.”

“무슨 교장 선생님까지 보자고 하냐…….”

학교에 몇 년이고 다니면서도 교장 선생님은 볼 일이 정말 잘 없다. 독대하는 건 당연히 더더욱 그렇고.

그나마 에르네스트는 어른들과 대화하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많은 분들이 에르네스트과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물어보았다.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나요?”

“뭐…… 그렇지. 별건 아니었어. 재활에 대해서라든가…… 힘든 게 있으면 말하라든가 뭐.”

선생님들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나마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선생님들이 많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이 학교를 거쳐 간 수많은 학생들, 그리고 그중엔 도중에 다쳐서 그만둬야 할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선생님들은 에르네스트가 그중 한 명이 되질 않길 모두 간절히 바라셨던 분들이다.

눈에 보이는 부상의 증거인 깁스가 있었을 땐 차마 말 한 마디 거는 것도 조심스러워 하셨던 분들이 많다.

그런데 이젠 그 깁스가 사라지자 한결 마음을 놓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는 따로 선생님들에게 묻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당사자이다 보니 갑자기 선생님들의 태도 변화가 이해가 잘 안 가는 모양이다.

“지금까진 터치 안 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데.”

“후후, 글쎄요.”

다들 안심하셨으니 잔소리가 하고 싶어지신 것 아닐까요.

서서히 평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와도 같다.

난 이 변화를 느끼면서도 일부러 에르네스트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평소 영민한 그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재미있었으니까.

“……진짜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가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류보비가 작게 훌쩍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에르네스트는 괜히 왼팔을 더 움직여보였다. 류보비는 감격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진짜 잘됐어요…… 진짜로. 에르네스트 오빠.”

“류보비.”

“금방금방 다 나을 거예요. 제가 항상 기도할게요.”

“응, 고마워.”

그 순수한 응원엔 에르네스트도 길게 답할 말이 없는 듯했다. 가볍게 웃으며 그는 답했고, 류보비도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아나톨리도 거기에 편승하여 말했다.

“저도 기도했어요.”

“고맙다. 아나톨리.”

에르네스트는 왼손을 쭉 뻗어 아나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이렇게만 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마치 마법처럼 모든 사고와 문제가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걸 보고 있던 리처드는 그러한 인식을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팔 상황은 어때. 물어봐도 되냐?”

“뭐 어떻긴. 이게 전부지.”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말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고 팔을 들어올려선 흔들거렸다.

지금 그의 왼팔은 운동능력이 말도 못하게 저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깁스를 했을 땐 움직이지도 않으니까 어렴풋이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상상해볼 수 있기라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피아니스트로선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도 리처드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

“그래서야 진짜 팔이 새로 자라난 거랑 다를 바 없겠는데?”

“사실 그렇긴 해.”

에르네스트 역시 푸핫 하고 웃으면서 더 우스꽝스럽게 왼팔을 흔들어보였다.

장난을 쳐선 안 될 일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은 언뜻 해선 안 될 일처럼 느껴졌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쉽게 여기기 어려운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당겨 내리는 것과도 같았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편이 낫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아예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적응시켜야지. 뭐, 한 번 해봤던 거니까.”

그 말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에 난 감동하다가도, 그가 얼마나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 느끼며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한 번 가봤던 길을 기억하는 사람은 다시 그 길을 찾아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안다.

심지어 완전히 되찾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자신과의 대결을 시작한 것이다.

험난한 일정이 되겠지.

그런데 일단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는 걸 한승우가 말해 주었다.

“일단 수술이 잘 되었다는 건 분명한 거잖아?”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꽉 조여들던 가슴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 든다.

현실적인 진단이었다.

에르네스트의 치료는 확실히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건강한 편이어서 재생력도 좋고 면역력도 좋다고 한다. 그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제 재활에 들어가니까 이야기하는 건데…… 에르네스트.”

한승우는 이 말을 할지 말지 한참 고민했다는 투로 주저하더니, 이윽고 이야기했다.

“현대 의학 수준이면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을 받고 피아니스트로서 완전 회복할 확률은 정말 높대. 야구 선수들처럼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들도 금방 재활해서 복귀한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의사 선생님도 똑같은 말 했었는데?”

“아버지가 해 준 말이거든.”

한승우의 아버지는 한국의 의사였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입고 나서 한승우가 바로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도움이 정말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한승우가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서라도 도와줬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난 기뻤다. 만약 여기에 내가 없었다 하더라도 에르네스트에게 손을 내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에르네스트 역시 듣기에 나쁘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믿음이 가네. 확실하게.”

여러 사람들이 응원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주는 건 실제로 상당히 큰 효과를 가져온다.

에르네스트는 오늘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만큼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듯 경쾌하게 이야기했다.

“우선 이 캔부터 따볼까?”

그는 앞에 있는 캔을 오른손으로 덥석 잡았다.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따면 편하겠지만, 일부러 반대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꽤 힘들게 움직이긴 했지만 그는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처드가 장난을 걸었다.

“이참에 나랑 팔씨름도 할래?”

“깁스로 널 한 번은 때려봤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후회된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고, 리처드와 모두는 한참이나 웃었다.

그렇게 가져온 간식들도 모두 열어서 앞에 놓고 우린 그것들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오늘 있었던 일, 어제 있었던 일, 내일 있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열중했다.

나 역시 그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내년에 있을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신년 연휴에 괜찮으신 분들은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 해요. 혹시 어떠신가요?”

“여행?”

“연휴에?”

이미 이야기를 아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머지 여섯 명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류보비는 곧 내가 조만간 초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는지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꼭 달라붙었다.

“여행도 좋아요!”

“다행이네요.”

그리하여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던 테이블 위에선 곧 여행 계획을 위한 토론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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