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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28화 (928/1,277)

##  928화

갑자기 나온 여행 이야기라서 모두 당황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보단 들뜬 분위기가 훨씬 더 강했다.

발렌티나는 이미 결정했다는 듯 말했다.

“나 사실 이번 연휴엔 가족 여행 갈 계획이었거든? 그런데 이번엔 빠져야겠다.”

“아……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지 무조건 이쪽이 더 재밌을 건데. 잘됐다. 그런데 우리만? 아니면 더 있어?”

“음…… 내일 즈음 반에서도 한 번 물어볼 예정이에요.”

“그래, 그게 좋겠네.”

난 여기 있는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지만, 혹시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딱히 인원을 정해놓고 놀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지금은 앞에 있는 모두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류보비, 발렌티나는 확인했으니 다음은 리처드와 한승우다.

“두 분도 괜찮으신가요?”

“난 돼.”

“나도.”

두 사람은 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학생들은 짧은 겨울방학 동안에 보통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그냥 기숙사에 남기 때문이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보통은 시험공부만 하기 때문에 시간이 난다.

리처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손끝을 마주하며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 해외면 우리 비자가 조금 복잡해서 미리 준비해둬야 할 건데.”

“아, 국내로 하려고 해요.”

“그럼 상관없어.”

역시 비자 문제 때문에라도 해외는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학 중에 타국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니까 미리 준비를 하거나, 정 안 되면 예고르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줄지 모르겠지만 괜히 그런 부탁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10학년 6명은 확인이 끝났고, 사샤도 에르네스트가 바로 된다고 확인시켜주었다.

“사샤는 내가 어제 이야기해서 알아.”

“아, 그런가요.”

어제 집에서 에르네스트는 이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아 온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아나톨리도 그리 곤란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저도 아마 될 거예요. 부모님에게 물어봐야겠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내가 전화를 해서라도 부탁할 생각이다. 이동편이나 숙소, 안전, 비용 등은 모두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꼭 보내 달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침 모두에게 알려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아, 참고로 루슬란 오빠가 보호자로 같이 갈 예정이에요. 그러니 보호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갑자기 나온 보호자란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해하기도 했다.

이제 내년이면 열일곱 살이나 되는데 보호자가 무슨 필요냐 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빅토르나 소로킨 같은 든든한 사람들이 함께 있기도 하고.

하지만 루슬란 오빠를 모두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오빠가 같이 가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금방 이해한 듯하다.

리처드가 앞뒤 상황을 알았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네 오빠 대단하네.”

“그러게. 같이 뭐 하고 놀아주지?”

발렌티나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되도록 재미있게 해 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것 같다.

거기엔 아나스타샤도 동조해서 루슬란 오빠에 대한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렇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난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괜찮죠? 에르네스트.”

“어?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루슬란도 가야한다고 생각해서 가는 걸 텐데.”

“그건 그렇지만요.”

어쩐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딱히 상관없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난 그가 루슬란 오빠를 조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를 잘 보고 있다가 내가 적당하게 잘 막아줘야 할 것 같다.

점점 스터디룸 안의 분위기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여행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모두 가기로 합의가 되고 나니까 정말 현실감이 드는 모양이다.

그 모두를 둘러본 나는 일단 큰 틀을 정리하듯 이야기했다.

“그러면…… 인원이 많네요. 겨울이기도 하니 액티비티보단 휴양을 목적으로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휴양 좋지. 난 휴양이 필요한 사람이야.”

“……네가 뭘 하는데.”

리처드가 축 늘어지며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사람처럼 굴자 발렌티나가 괜히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휴양휴양 노래를 부르는 리처드를 보니 발렌티나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녀는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겠다는 듯 날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데?”

“음…… 그게 아직 안 정해져서요.”

“엑? 안 정했어? 왜?”

“예, 다 같이 이야기할까 해서.”

어제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해 봐도 성과는 딱히 없었고, 밤에 혼자 생각해봐야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난 휴양지를 찾아봐도 어느 곳이 좋을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주저하고 있자 처음엔 놀랐던 아이들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테이블 위로 마구 의견들이 쏟아지자 에르네스트가 상황을 정리했다.

“각자 하나씩 의견 내 봐.”

“그럴까? 에르네스트 네 의견은 어딘데.”

“소치.”

“무난하네.”

소치는 흑해에 인접한 휴양도시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 모스크바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척 따뜻한 곳이라서 이 시기에 가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모두들 괜찮은 의견이라며 일단 소치를 후보에 올려두었다. 그다음은 발렌티나가 손을 번쩍 들며 발표하듯 말했다.

“꼭 따뜻한 곳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난 오로라 보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런데 그거 고생이야. 휴양이 전혀 아니라고.”

“그래도 오로라 사진 한 장 찍는 게 중요한 것 아냐?”

“며칠 가서 있는다고 보이는 건 줄 아냐?”

리처드는 일전에 오로라를 보려고 한 적이 있는지 발렌티나와 티격태격했다.

나도 그 오로라 관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무르만스크같은 북극에 가까운 도시에서 겨울이면 오로라를 볼 수 있기도 한데, 그 한 번을 보기 위해서 몇 주씩 머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우린 신년 연휴 기간만을 며칠 쓸 수 있기 때문에 오로라를 보러 가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기도 하고, 지금보다 더 추운 곳으로 가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으슬으슬하다.

한창 투닥이던 발렌티나는 결국 말로 리처드를 이길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숨을 몰아쉬더니 반대로 물었다.

“그럼 넌 어디로 가려고?”

나도 리처드가 어느 곳을 추천할지 궁금해졌다. 그가 이럴 때 가끔 내어주는 해답은 꽤 괜찮은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만큼 장난기가 많기도 했다.

“글쎄…… 어디가 좋을까…… 칼리닌그라드?”

“……장난하니?”

칼리닌그라드는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한참동안 가다가 벨라루스를 넘고 리투아니아를 넘으면 도착할 수 있는 월경지이다.

땅이 뚝 떨어져 있는데 같은 나라라는 것이 조금 특이하지만, 세상엔 그런 도시들도 있었다.

처음 듣는 곳인지 한승우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건 어디야?”

“지도로 보여줄게. 음…… 여기.”

“……이건 폴란드 아니야?”

한승우는 월경지를 처음 보는지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척 봐도 여행을 휙 갔다 오기엔 약간 애매하다는 걸 느낀 표정이다.

아나톨리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의견을 냈다.

“보르네슈나…… 조금 더 내려가서 아스트라한도 괜찮다고 들었어요. 카스피해 위쪽.”

“어디쯤인지 알 것 같네.”

그렇게 여러 가지 후보지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재미있는 기분이다. 나 혼자서 인터넷을 보며 생각했을 땐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던 곳들이 친구들 입에서 나오니 하나같이 다 가보고 싶고, 겪어보고 싶은 곳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마지막으로 내게 물어보았다.

“타티아나 네 생각은 어떠니?”

고개를 드니 모두가 날 보고 있었다. 지금 이 마지막 결정권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난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국내 여행으로 떠올릴 만한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블라디보스토크 정도였다.

하지만 두 곳 모두 휴양지로 알맞은진 잘 모르겠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결정을 내렸다.

“전 소치가 좋을 것 같아요.”

“소치 좋지. 그런데 왜?”

“소치에 별장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어제 아버지에게 여행에 대한 허락을 받고, 꼭 관광지를 놀러다니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니 아버지는 별장이 몇 군데 있으니 필요하면 그곳에서 머물면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해주셨다.

지금 나온 후보지들 중에선 소치가 그중 한 곳에 해당했다.

“아마 여행을 가면 며칠 정도 머물게 될 텐데, 호텔도 좋겠지만 저희만 프라이빗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요? 인원이 많기도 하고요.”

“뭐…… 그거야 그렇지.”

별장이 낫다는 데엔 이견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이렇게 되면 집에 초대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는 걸까? 어쩐지 여행과 파티가 합쳐진 무언가가 될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

눈이 오고, 커다란 차가 지나다니며 도로를 치우고, 다시 눈이 온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잠깐 틈이 난 사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영미권 사이트에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오늘은 크리스마스 축일이다.

율리우스력을 쓰는 러시아에서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다. 때문에 모두들 학교에 나와서 평범하게 수업을 받고 있었다.

전 세계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여기에서 살면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싶어 한승우를 돌아보니 그 역시 별생각 없는 얼굴로 졸린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난 혼자서 작게 웃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오후엔 스터디룸에 잠깐 들렀다가 레슨을 받으러 갔다.

미하일 선생님은 요즘 어떠한 지적을 하거나 기술적인 강의를 하기보단 끝까지 가만히 들은 다음에 인상비평을 주로 하시는 편이었다.

알아듣기 쉬운 객관적인 이유와 기준이 아닌, 주관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인상비평은 처음엔 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 그것이 전반적인 밑그림을 선명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내가 그만큼 수준이 올라와주었기에 이런 레슨이 가능한 것이라며 칭찬해주셨지만, 난 선생님처럼 인상비평을 하더라도 예리하고 실리적으로 하는 음악가들이 드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부 내가 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레슨을 마치고 나오니 3시 정도였다.

“공부나 조금 더 하다가 갈까.”

신년 연휴 전에 기말 시험 준비를 조금이라도 더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스터디룸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공부를 하느라 다들 그곳에 있을 것이다.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한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지금 내게 한국에서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얼른 전화를 받으니 명랑한 목소리가 인사했다.

- 메리 크리스마스! 타티아나. 잘 지내니?

“아, 세연.”

인사말만큼은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지 발음이 좋다.

물론 이 이상은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 그것은 세연과 내가 그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생겨난 규칙 같은 것이었다.

난 웃으면서 그녀가 모를 만한 사실을 하나 알려주었다.

{그곳은 크리스마스죠? 세연.}

- {응. 그런데.}

{여긴 아직 멀었어요.}

- {……응?}

세연의 어리둥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서 무언가를 찾아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 {거기 지금 3시 아니니? 내가 계산을 잘못 했나?}

{맞아요. 3시예요.}

- {엥, 그럼 이미 크리스마스인 거잖아? 아직 멀었다니 무슨 말이야?}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난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라는 것과, 때문에 오늘은 학교에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세연은 정말 놀랐는지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무래도 신기한 문화 차이이다 보니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

그렇게 1월 7일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하던 세연은 갑자기 생각났는지 더 큰소리로 말했다.

- {아, 그런데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해주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요?]

- {타티아나, 너 음반 내는 거야?}

벌써 그곳까지 알려졌나?

아직 발매일까진 며칠 남았지만, 표트르가 정말 제대로 일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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