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9화
음반 판매에 대한 홍보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발매 전에 여러 매체를 통해서 많은 홍보를 해 놓은 상태였다.
사실 이런 방식보단 일단 발매를 해놓고 홍보를 하는 쪽이 보편적이다. 바로 매장에 가서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표트르는 작년부터 해온 모든 것을 준비의 일환으로 보고 한 번에 효과를 보려면 앞서서 먼저 홍보를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며 이렇게 결정했다.
판매 전략에 대해선 그에게 많이 맡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난 어쨌든 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까닭에 일찍 퍼진 내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멀리 한국에도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이렇게 연락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기쁘다.
{예, 그렇게 되었네요.}
- {와! 진짜 축하해! 세상에,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지 뭐야?}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 {인터넷에서 봤지.}
세연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 피아노에 관심 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난리야. 네 이름이 이미 여기에도 많이 퍼져 있거든.}
이전에 박 교수님도 내게 그런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지.
하지만 난 SNS는 물론이고 인터넷 활동 자체를 일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해외는커녕 국내의 내 평판도 잘 모르는 면이 있었다.
어쨌든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
내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자 세연은 정말 믿어도 좋다는 듯 강하게 이야기했다.
- {영상으로 네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은 알더라고. 음반이 나온다면 그냥 무조건 사야 한다는 걸.}
{무조건까진…….}
- {아니야, 진짜야. 누구는 아예 그러던데? 작년 클래식계를 뒤흔든 음반이 러시아에서 나왔는데,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난 멈칫했다. 설마하니 작년 이야기가 지금 이렇게 바로 나올 줄을 몰랐다.
보아하니 아직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난 창가로 향했다. 얼굴이 뜨겁다. 아무래도 조금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목소리가 잘못 나오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작년 클래식계요?}
- {응. 이름 없는 음반이었는데 거기 담긴 곡들이 진짜 거의 미쳤거든.}
{그, 그래요?}
- {모르니 혹시?}
{알아요.}
- {알지? 그렇지. 모를 리가 없지.}
꽤 이슈가 되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그걸 러시아에 사는 내가 모른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난 적당히 말을 맞춰 이야기했고 세연은 만족했는지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 {아무튼 그게 우리나라 클래식계에서도 엄청나게 이슈였거든. 그 연주자가 누군지 맞힌다고 엄청 싸우기도 했었어.}
{싸워요……?}
- {자꾸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을 갖다 놓으니까 싸우지 않을 수가 없잖아?}
{지금 듣기론 세연이 직접 싸우신 것처럼 들리는데요?}
- {응. 맞는데?}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듯 세연이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녀가 내 음반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싸웠다고 말할 정도로 격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난 그만 할 말을 잊어버렸다.
세연은 한국어로 음산하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 「세상에 그 정도 되는 라흐마니노프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많은 줄 아나…….」
꽤 진심인 것 같았다. 난 그녀의 말에 정말 기뻤지만 한편으론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게 나쁜 방향의 뒷감당은 아니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하니 듣고 있자 세연이 다시 영어로 말했다.
- {진짜 거의 한 달은 빠져 있었거든…… 그러면서 몇 가지 확신이 있는데 분명 러시아 연주자일 거야. 약간 네 연주 듣는 느낌도 있었거든?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그랬어.}
{아하…….}
- {그리고 음반사가…… 그거 어디서 낸 거더라. 가지고 올게.}
이미 상당히 진실에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세연은 상당히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음악의 중추를 잘 파악하곤 했다.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핵심을 짚는 느낌이 있었다.
내 연주라면 가까이에서 들어본 적도 있었으니까…… 곡은 다르더라도 내 특징을 짚어내어 연결시키는 건 분명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약간 두근거림을 느끼며 기다리는 사이, 세연은 한참을 바스락거리더니 이윽고 음반을 찾아왔다.
러시아어는 아직 못 하지만 세연은 키릴 문자를 읽을 줄 안다. 더듬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 {읽어볼게. 어…… 에, 우, 테…… 응. 에우테르페 레코즈네.}
{그렇죠.}
- {잠깐만, 에우테르페?}
갑자기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깜짝 놀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 {어!? 네가 음반 내는 곳이랑 같은 음반사네?}
드디어 연결고리를 찾아낸 건가?
난 세연이 퀴즈의 정답 앞에 바로 근접하여 서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맞혀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전화에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게 된다.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다음 추리를 기대했다.
놀란 목소리로 무언가 다시 확인하더니, 세연이 천천히 말했다.
- {타티아나, 내가 너한텐 묻지 않았는데…… 혹시 말이야…… 있잖아.}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물어온다.
- {작년 그 음반 연주자 누군지 알아?}
세연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마음이 빗나가자 약간 아쉽다.
하지만 세연에게 크게 실망할 건 없었다. 여전히 무명 음반의 연주자에 대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일반적으론 세연같이 추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큰 이슈를 불러일으킨 음반의 주인공으로 이제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도 안 된 중앙음악학교 학생을 특정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아마 비슷하다 생각하더라도 절대 진지하게 후보에 넣을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음반에 쇼팽을 담았다면 바로 알아봤을 것 같다.
세연은 내 쇼팽에 대해선 정말로 날카롭게 알아보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베토벤, 슈만, 라흐마니노프로는 아무래도 알아맞히기 힘든가 보다.
“…….”
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일단 세연의 질문에 대해선 모른다고 답하는 쪽이 낫겠지.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날 알아봐주길 어필한 적이 없었다.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음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면 다행이고, 그것은 꼭 내게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온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도 철저하게 친구에게까지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젠 얼마 수명이 남지 않은 비밀이다. 그러니 지금 조금 더 장난을 쳐도 괜찮으리라.
{예.}
- {우와! 진짜? 같은 음반사라서 알게 되었구나!? 직접 봤어?}
{직접 봤다고 해야 할까요…….}
난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결국 반사된 모습이다.
사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접 전부 볼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반향을 통해 스스로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담론을 이야기해 봐야 재미없다. 영어로 어려운 이야기를 할 실력도 되지 않고.
때문에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느낌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 {와, 1년이 훌쩍 넘게 계속된 미스터리의 해답이 여기 있었네. 내가 왜 진작에 너한테 전화로 물어보지 않았을까? 진짜 바보 같아. 으아.}
{어, 저기…… 세연.}
- {아니, 잠깐만. 말해주지 마. 아마 음반사에서 네게 말하지 말라고 비밀 엄수 계약 같은 걸 시켰을 테니까. 난 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어.}
{……그, 그러신가요.}
세연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맞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지만, 그런 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기심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이곳저곳 날아다니던 세연의 목소리는 슬금슬금 다가오기도 했다.
- {대신 내가 먼저 맞추는 건 괜찮겠지? 음, 혹시 즈베레프야?}
즈베레프라면 몇 년 전 유명세를 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 남성 연주자였다.
예전에 있었던 평론 등에서도 연주자에 대한 추측은 남성 반 여성 반 정도로 갈려 있었다.
그런 추측은 꽤 재밌었다.
난 기술과 힘에서 남성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것이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결과를 냈다는 증명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틀린 건 틀린 거다. 난 딱 잘라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 {윽. 타건력이 워낙에 좋아서 즈베레프라 생각했었는데.}
{여성이에요.}
- {그래……? 그 정도 소리를 내는 여성 피아니스트가 또 누가 있지?}
세연은 머릿속에 있는 모든 연주자들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난 보채지 않고 여유 있게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세연은 면목 없다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해왔다.
- {저기, 타티아나. 그 비밀 엄수 혹시 얼마나 깐깐해? 혹시 나이 같은 것도 안 될까?}
{절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그, 그…… 그런가? 안 되려나?}
이렇게까지 궁금해한다면 알려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했다. 너무 귀여워서 가까이에 있었다면 이쯤에서 져버렸을 것 같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장난을 칠 수 있었다. 난 즐겁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후후, 농담이에요. 비밀 엄수에 관한 계약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알려드릴게요. 무척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 {진짜!?}
{대신, 조금 나중에요.}
- {어?}
세연의 목소리에 절망이 서린다.
이렇게 괜히 괴롭히다가 며칠 후에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쯤 하고 싶었다.
내가 말해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음악을 비교하면서 세연이 직접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세연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조금만 더 고민해보세요.}
- {안 돼! 여기서 멈추면 나 오늘 하루 종일 그 고민밖에 못 해! 지금 알려주면 안 돼? 오늘 크리스마스인데.}
{제 쪽은 아니니까요.}
- {깐깐해! 타티아나.}
너무한다는 듯 세연은 떼를 썼지만 난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조용히 웃기만 하고 있자 이윽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세연은 갑자기 쿨하게 태도를 휙 바꾸며 말했다.
- {뭐,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건 다름 아닌 31일에 발매될 네 음반이니까.}
{약간 부끄럽네요.}
- {이제 와서? 전혀 그럴 거 없어! 난 진짜 진지하게 기대하고 있으니까!}
기대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난 거기에 부응해주고 싶어진다.
물론 음반은 이미 제작이 다 된 상태이니까 더 무언가 할 순 없겠지만…… 이러한 기대와 응원은 내년에도 내가 또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터였다.
그리고 나 역시 세연에게 기대가 있었다.
지금은 아직 상상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마 이번 음반을 듣게 된다면 그녀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부 알게 될 테니까.
며칠 뒤를 상상하며 난 그녀에게 물었다.
{진지하게 들어주실 건가요?}
- {응? 응. 당연하지.}
{누군가 이상한 평을 하면 대신 싸워주실 거고요?}
- {응……?}
뭔가 질문이 기묘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세연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 {그래야지. 나 네 음반 열 장은 사서 교수님한테도 드릴 거거든? 교수님도 네 팬이니까. 그럼 그렇게 평 받은 다음에 누가 이상한 소리 하면 교수님보다 음악 잘 아냐고 따져야지.}
{그건 반칙이에요…….}
대뜸 권위자의 의견을 빌리려는 세연의 당돌함에 난 나도 모르게 말리고 말았지만, 교수님도 내 팬이라는 말은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울렸다.
세연에게서 종종 이렇게 전해 듣는 이야기는 날 조금 안심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날 얼마나 지탱해주는지 알고 있을까.
음악적으로도, 그리고 실제로 정신적 궁지에 몰렸을 때도 세연은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얼마 전 가을 연주회 때 세연이 모스크바로 와준 것을 난 크나큰 빚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떠올려보았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신년에 갈 여행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서울에 있는 세연을 부를 순 없었다.
게다가 한국은 1월 1일 하루만 쉬기 때문에 일정이 맞지 않기도 하고.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갚을 방법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 세연도 급박하게 이야기했다.
- {아, 엄마가 불러. 끊어야겠다.}
{저도 공부하러 가 봐야겠어요.}
- {오늘 학교라고 그랬지. 미안해. 전화로 오래 붙잡고 있어서.}
복도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자니 조금 몸이 차가워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난 멀리 6시간 빠른 세계에서 이제 하루를 마무리 지을 준비 중일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럼 또 통화해요. 메리 크리스마스.}
- {그쪽은 아니라면서?}
{상관없잖아요? 그쪽은 맞으니까요.}
- {아하하, 고마워.}
세연은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웃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