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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30화 (930/1,277)

##  930화

작년 이맘때 뭘 했더라 떠올려보면, 연주회 준비로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달리 여유를 가지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12월 31일이란 날짜 자체가 한 해의 마지막이라기보단 연주회 당일로 내게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연주회 일정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난 훨씬 더 여유롭게 31일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달, 마지막 주말 등등 올해 마지막인 것들을 하나씩 지나치다 보니 마지막 날까지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특별한 감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평일이니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같고…… 대신 오전 수업 후 오후 일정이 없기 때문에 일찍 끝난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반에 들어선 난 오늘이 평범하게 지나가진 않을 것이란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타티아나! 오늘 음반 나오는 날이지?”

바르바라가 큰 소리로 인사해주었다.

음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기억해주고 인사해 줄 줄은 몰랐다. 난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네요.”

“그렇네요가 아니지. 중요한 날이잖아? 왜 31일로 발매일을 잡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르바라가 생각하기엔 아무리 봐도 시기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바깥쪽으로 펼쳤다.

“이따가 음반매장 가서 사려고.”

“아…… 제가 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미안해요. 저도 샘플만 한 장 가지고 있는 게 아직 전부라서.”

“괜찮아, 괜찮아.”

손가락을 튕기며 바르바라는 그렇게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며 웃었다.

며칠 전에 여행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도 그녀는 미리 일정이 있어서 미안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때도 그녀는 별로 아쉬워하지 않고 쿨하기만 했다.

바르바라가 그렇게 크게 내 음반 이야기를 하자 자연스레 다른 친구들도 이쪽으로 관심을 주었다.

이미 모두들 음반을 사 주는 건 약속되어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지금 여유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정말 아쉬운 일이었으나, 굳이 말리진 않았다.

내 음악을 친구들이 직접 구매해서 소장해준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 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안드레이는 그 의미를 한층 더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나도 사려고 하는데, 음반 사 오면 사인은 해주는 거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죠.”

“그거면 됐어.”

안드레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옆에서 바르바라가 의심쩍다는 듯 물었다.

“안드레이. 너 나중에 타티아나가 유명해지면 비싸게 팔려는 거 아니야?”

“무슨……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그러고도 남을 녀석?”

“너무한 거 아니야? 타티아나,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억울하다는 듯 안드레이는 급히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난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서글프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안드레이…….”

“말을 해!”

안드레이가 제발 살려달라는 듯 소리를 쳤고, 주변에선 웃음이 터졌다.

난 이럴 땐 장난에 곧잘 편승하는 편이다. 모두들 그런 걸 재미있어하기도 했고.

물론 서로를 믿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난은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

한창 안드레이를 놀리던 친구들은 그가 진짜로 삐쳐버리기 전에 달래주었다.

화가 풀리고 나서도 안드레이는 투덜거리더니 이윽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무조건 사려고 하긴 하는데. 곡은 뭐 쳤어?”

그걸 지금 알려주면 재미없다.

난 지금까지 친구들이 음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일관적으로 대답했던 방식이 있었다. 오늘은 발매일이었지만 그래도 달라지진 않는다.

“들어보면 아실 거예요.”

“응? 뭐 그렇겠지. 알았어. 들어보고 이야기해줄게.”

별 의심 없이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도 별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직 막 발매된 음반에 대한 감상이 나오기 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난 오후부턴 슬슬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타티아나, 네 이야기가 벌써 인터넷에 많이 올라왔는데?”

커피를 마시던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딱히 하나하나 찾아보지 않는 나와 달리 그녀는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없다는 듯 꽤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내가 인터뷰를 하고 난 뒤에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모니터링하곤 했다.

발렌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연말을 맞아 거리로 놀러나오긴 했지만 장식들을 구경하거나 거리 매점을 돌아다니는 것 보단 내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쪽에 더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보자…… 정확하네. 네가 작년 무명 음반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이라고 맞히고 있어.”

“또 어떤 사람은 그냥 곡만 같은 게 아니냐고 하기도 하네. 에우테르페 레코즈에서 여러 연주자들을 두고 하는 일종의 기획이 아니냔 것 같아.”

“이 사람은 전화해봤는데 답이 없다면서 화를 내고 있네.”

역시 이런저런 의견들이 있는 것 같다.

음악을 듣자마자 바로 내 특징을 겹쳐보고 사실을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아예 달리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음악과 관계없는 추리를 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확신으로 음악을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모든 걸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리스너들을 하여금 추리해서 판단하게끔 만드는 방식이 나은 것인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이슈를 끌었던 프로젝트이니 만큼 끝까지 잘 마무리 지으려면 이렇게 하는 편이 옳았다.

천천히 차를 입에 머금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난 다른 사람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음악을 추구하는 연주자이고자 했으나, 수많은 나라에 음반을 내놓은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진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심장인 건 아니었다.

당연히 걱정스럽다. 그래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열심히 진행한 프로젝트이니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싶다.

막 시작된 음반에 대한 반응은 전화로 내게 직접 향해 오기도 했다.

- {전에 전화했을 때 왜 안 말해 주나 했더니! 너였어!?}

세연은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그렇게 소리쳤다. 꽤 많이 놀란 모양이다. 난 미안하다는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일 거라 말씀드렸잖아요?}

-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바로 그렇게 생각하겠어? 아니지…… 아,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네 느낌이 정말 많이 났었는데…….}

후회막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세연이 한탄했다. 분명 어렴풋하게 날 떠올리긴 했을 터다. 단지 그녀의 상식이 더 강했을 뿐.

게다가 세연은 내가 모든 걸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하고 있었단 사실에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많이 놀라셨나요?}

- {당연하지! 내가 음반 사자마자 프로그램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듣고 나서는 진짜 기절할 뻔했고. 지금 거의 2시간 동안 음반 두 개만 번갈아가면서 들었어.}

{정말요? 후후.}

- {진짜 너도 참 대담해.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할 수가 있어?}

원래는 그냥 이름 없는 음반은 단발적으로 끝낼 프로젝트였고 이렇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걸 지금 확인한 사람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걸 차근차근 설명해주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 때문에 난 또 그저 웃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지.}

세연은 다시 몇 번이나 생각해봐도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내더니 말했다.

- {연주 정말 좋더라. 타티아나. 작년에도 느낀 거지만, 네 슈만과 라흐마니노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아.}

{……고마워요.}

- {1년 동안 이 세 곡만 붙잡고 있었다고 해도 믿길 정도야.}

누구에게 감상을 전달해줘야 할지 몰라서 한참 동안 아끼고 참고 있다가 드디어 쏟아낸다는 듯, 그 뒤로도 세연은 한참이나 내게 곡들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러한 실질적인 평가는 내가 정말로 바라던 것이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기쁘네요.}

- {당연하지. 좋은 곡이니까. 작년부터 난 이런 곡들을 연주하고 싶었어. 지금은 얼마나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세연은 이런 부분에서 늘 솔직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솔직한 그녀를 좋아한다.

이번에도 내 음악이 조금이나마 그녀의 동기가 되고 의욕이 되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음반에 대해 이야기하던 세연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 {앞으로 여기서도 아마 한창 이야기 많이 나올 건데, 내가 똑바로 체크한 다음에 너한테 알려줄 만한 건 알려줄게.}

아마 거기엔 박 교수님의 평가도 있겠지. 난 기쁜 마음으로 세연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전화를 마치고 나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영어로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누군진 벌써 아는 눈치다.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먼 곳에도 네 음반이 나와서 연락이 왔나 봐?”

“그러네요.”

이렇게 발매 당일부터 반응을 들으니 약간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것도 다 표트르가 여러 방면에서 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트베르스카야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붉은 광장까지 이어진 이 대로엔 연말을 맞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광장까지 반쯤 갔을 때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탄성을 질렀다.

“어?”

그리고 곧장 내 쪽으로 걸어온다. 난 이 사람이 날 정확하게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맞으시죠?”

“예, 그래요.”

“길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 남자는 엄청난 행운을 맞이한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더니 곧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내 음반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바이긴 하지만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남자는 정중하게 음반을 내밀며 청했다.

“친구분들과 계신데 미안해요. 그런데 도저히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어서…… 혹시 음반에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렇게 정중한 요청을 거절할 순 없었다.

“예, 해 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전에 에르네스트가 길거리에서 팬을 만나 사인을 해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난 능숙하게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앨범 커버를 꺼내어 적당해 보이는 곳에 사인을 해 주었다.

내가 한 사인이 마음에 드는지 남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웃었다. 서

른 살도 훌쩍 넘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순수한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트베르스카야 대로에서 때마침 음반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마주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대로엔 음반 매장이 있었다는 걸.

아무 생각 없이 그 근처에 가버린 나는 곧바로 날 알아본 몇몇 사람들을 마주하고 말았다. 이야기가 옆으로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음반 매장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선 내게 사인을 받고자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자 그냥 길을 가던 사람들도 무슨 연말 행사라도 있나 싶었는지 우리 주변에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

그렇게 난데없는 사인회가 길거리에서 열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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