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1화
거리에서 내 음반에 사인을 해 준다는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것도 연말에 행복한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이다 보니 더더욱 선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인원이 많아지니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진짜로 작년에 이름 없이 음반 냈던 것 맞나요?”
“저도 사인 부탁드려요!”
“거기 줄 서지 그래요? 지금 너무 막무가네인데.”
혼잡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하니 눈앞이 어질거릴 정도였다. 간간이 보이는 스마트폰 카메라도 내 신경을 흐트러지게 했다.
그 와중에도 난 최선을 다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하거나 여러 번 사인을 하다 보니 금방 몸이 차가워졌다.
열 명쯤 되었을 때, 난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더 못 하겠는데.
“물러나 주시죠.”
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빅토르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갑자기 상황을 통제하자 사람들은 의문을 표했다.
“이쪽부터 차례대로 하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사인회라 생각하시나 본데, 아닙니다.”
그렇게 딱 잘라 이야기한 뒤 빅토르는 내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일단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것 같아서 중단시키긴 했지만, 만약 내가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한다면 그걸 딱히 막진 않겠단 의도가 보였다.
하지만 난 지금 도무지 계속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뒤편을 향해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지금 손이 얼어서 글씨를 쓸 수가 없네요. 갑자기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이실 줄은 몰랐어요.”
솔직하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주변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거 행사였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냥 길에서 사인해줬던 거예요?”
그 반응에 아나스타샤가 이때다 싶었는지 나서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그냥 저희랑 같이 거리 구경하러 나온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해도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쉽게 물러나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모두들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물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무리하게 날 붙잡고 있진 않겠다는 배려가 느껴졌다.
난 양해를 구하며 사람들이 비켜 주는 길을 따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작년부터 팬이었어요!”
“앞으로는 다음 음반도 공개적으로 내시는 거죠? 기대할게요!”
사람들을 스쳐지나갈 때,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도 있었고, 중년의 여성도 있었다. 그 모두가 내게 응원을 전해주었다.
지금은 그저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지만, 이 모든 목소리들에 신경을 기울여 기억하려 애썼다.
언젠가 무대에서 이 목소리들을 떠올린다면 분명히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정되어 서 있는 인파를 뚫고 나와, 이동하는 인파에 뒤섞였다. 이렇게 걷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몇 걸음 앞서 나가던 빅토르는 슬슬 괜찮아졌다 싶었는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힌다.
“유명인이십니다? 아가씨.”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길 가다 말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데.”
아무 데서나 이렇게 되는 건 아니다.
내가 마침 음반 매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고, 오늘은 내 음반 발매일이었을 뿐이니까. 이런저런 상황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한다 해도 빅토르는 별로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다시 근처에 있겠습니다.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아예 근접 경호를 하도록 하죠.”
난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빅토르는 사람들 사이로 슥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와, 죽는 줄 알았네. 정말 깜짝 놀랐어. 괜찮니? 타티아나.”
“예, 괜찮아요.”
손이 아직도 조금 차갑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내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내가 이런 주목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목을 많이 받는 건 분명 연주자로서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 관심을 무대가 아닌 거리에서 마음 놓고 즐길 정도로 신경이 굵지 못했다.
되레 많은 관심을 받아버리면 자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아무 준비나 전조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긴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들 많이 놀란 것 같았다.
“…….”
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사실 오늘 계획은 이대로 붉은 광장까지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놀다가 저녁식사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방금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한 번 겪고 나니까 오늘은 내가 일단 돌아다니지 않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미소를 보고 응원을 받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지만, 오늘은 너무 열기가 뜨겁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연휴가 지나면 살짝 사그라들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두 친구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응?”
“저기 앞까지만 살짝 보고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아나스타샤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모처럼 놀러나온 것이니 최대한 길게 있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럴 때 고집을 부리지 않는 편이었다.
“난 더 봐도 상관없긴 한데 네가 불편해질까봐 겁나.”
“나도. 솔직히 방금 같은 상황 나오면 무시하고 뚫고 나갈 수도 없거든.”
발렌티나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는지 의견을 함께 했다.
게다가 우린 오늘만 보고 연휴 동안 못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며칠 이따가 출발할 때…… 그때 보자.”
“예. 그래요.”
여행 계획이 바로 코앞에 잡혀 있었기에 우린 지금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제일 예쁘게 장식되어있는 문 앞에서 다 같이 기념 사진을 찍은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늦게 올 줄 알았는데. 타티아나.”
“저녁식사는 가족끼리 함께 하자고 말씀하셨잖아요?”
연말을 즐기는 방식은 각각 다양하다. 친구들을 만나며 밖에서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연주회 등의 행사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집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꼭 그러했다. 다른 부분에선 꽤 프리하지만 저녁식사만큼은 별일이 없는 한 가족끼리 하는 것을 선호하시는 편이었다.
특히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날이라면 더더욱.
매번 이러했기 때문에 나와 루슬란 오빠 또한 밖에서 보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연말은 다 같이 식사하고 조용히 보내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오늘처럼 특별한 일이 있기도 했다.
“타티아나, 그리고 보니 빅토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고하던데. 네가 거리에서 사인회를 했다고?”
“……!”
난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빅토르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필요하다면 보고한다는 것도 알지만…… 이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딱히 둘러댈 말도 없고, 난 사실대로 이야기하며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한 명이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람들이…….”
“네 음반 덕분이었겠지?”
“그렇죠. 오늘이 발매일이라서요.”
아버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똑바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다른 건 알지 못하다만, 사람들의 반응을 모아 놓으면 그것이 곧 결과이자 가치라는 점은 알지. 네 음반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구나. 타티아나.”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난 그것을 조금이나마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상당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길 바라며 만들었어요.”
“그렇다면 응당 그럴 테지.”
아버지는 마치 내가 바란다면 의심할 것 없다는 것처럼 말씀하시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하셨다. 난 아버지의 이런 견고한 신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루슬란 오빠는 식사를 하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지금 잠깐 찾아봐도 네 이야기가 엄청 많은데? 어떤 곳에선 연말 거리를 찍은 사진보다 네 사진이 더 많아.”
“……찾아보진 말아주세요.”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해?”
내 음반에 대한 내용이 많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작정하고 표트르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진행한 일이니까 이 정도 이슈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함께 진행했다고 해서,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내 성격을 잘 아는 오빠는 갑자기 연극조로 대사를 읊듯 헤드라인을 읽어내리기도 했다.
“두 번이나 클래식계를 뒤엎은 앙팡 테리블이라고 하는데? 멋지네. 마음에 들어?”
“그만하시면 안 되나요? 식사를 할 수가 없잖아요…….”
“왜 못 해?”
“부끄러우니까요!”
결국 참지 못한 난 소리를 빽 질렀다.
애초에 난 내게 붙은 별명들도 굉장히 부끄럽게 느낀다.
그 자체가 싫다거나 반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언론 등에서 날 그렇게 부르거나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치장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낀다. 기뻐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오빠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아직도 그러냐는 듯 물었다.
“익숙해져야 하지 않나? 그럴 것 같은데.”
“……시간이 필요해요.”
“뭐…… 그러면 그만 괴롭힐게.”
“괴롭히신다는 자각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당연한 것 아냐?”
진짜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아도 오빠는 피식 웃기만 했다.
오늘은 도저히 이겨먹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때였다.
“그래도 난 네가 자랑스러워. 타티아나.”
갑자기 오빠가 그런 말을 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빠는 약간 내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내가 부끄러워한 만큼 자기도 부끄러워지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 말은 정말 진심이라는 걸 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일단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올랐다.
식사를 마치고 나선 텔레비전이 있는 응접실에 모여 앉아 연말 특집으로 나오는 방송들을 시청했다.
사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1년에 몇 번 없다.
정말 평범한 일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있어선 이렇게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때여야만 가능한 특별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귤 드시겠어요?”
“그래.”
귤을 까서 아버지에게 드리기도 하고, 샐러드가 부족해지면 새로 만들어 오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잠깐 방송이 쉬어갈 때면 응접실의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원하시는 곡이 있으신가요?”
“난 아무거나 좋단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하는 피아노 연주자로 살고 있으면서 막상 가족들에겐 그런 적이 많지 않다는 건 굉장히 창피한 일이다.
물론 그간 기회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이럴 때는 놓치면 안 된다.
리퀘스트는 없었지만 난 이 상황에 제일 잘 어울릴 만한 곡을 하나 떠올렸다. 브람스의 인터메조 op.118의 2번이었다.
“…….”
겨울밤에 어울리는 가장조의 선율이 응접실에 울려 퍼진다.
음향적인 구조를 고려해서 지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충분히 좋은 피아노라면 얼마든지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인터메조는 연주회에서 쉬는 시간에 해당하는 인터미션에 연주하는 짧은 곡이다.
때문에 음악과 음악을 잇는다는 역할에 충실하여 이 곡 자체엔 특별한 주제나 이미지가 없다.
그저 순수음악으로서의 구성에 충실한 곡이다. 때문에 음악적 해석을 동반하지 않아도 그저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버지도 오빠도 이 곡이 마음에 드는지 편안하게 듣다가, 연주가 끝나자 박수를 보내왔다. 난 미소를 지으며 묵례로 그 박수에 답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곧 자정에 가까워졌다.
11시 55분이 되자 대통령의 신년인사가 텔레비전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5분이 더 지났을 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된다는 의미의 종소리였다.
“…….”
졸린 눈을 비비며 난 옆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오빠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난 진심에서 나오는 기쁨으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팔을 뻗어 나와 오빠를 끌어안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