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3화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는 연말에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위치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에 있었지만,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음악원의 교수를 십수 년 하고 있으면 그저 교수란 직업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음악의 전문가이자 권위자로서 그를 찾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고, 자연스레 아르카디는 여러 직책을 병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제자들이 하는 연주회를 살피고 조언을 하는 것은 물론,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하고, 문화부 자문위원회의 소속으로 연말 연주회에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겐 홀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주어지곤 했다.
아르카디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이 의견을 낸 무대는 반드시 참가해서 직접 관람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연말 연주회는 직접 보러 가지 않고 집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여러 사람들이 물어보아도 그저 몸이 조금 안 좋은 것 같다고 둘러대고 피했지만, 분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래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두 피아니스트가 연말 연주회에 오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의 사고는 정말 큰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된 것에 따라 타티아나까지 잠잠해진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전까진 그녀의 이름을 다른 곳에서 듣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르카디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설마하니 이럴 줄은.’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대담했다.
12월의 마지막 날 낸 음반 때문에 클래식 세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말에 있는 여러 이벤트에 대한 소식들보다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들려올 정도였다.
아르카디가 평소 연락하고 지내는 많은 음악가들은 모두 타티아나의 음반을 놓고 주제로 삼았다.
그녀가 가지고 온 베토벤, 슈만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세 곡은 모두가 1년 전에 의문과 추측 등으로 남겨 두었던 기억을 다시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난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아르카디는 작년에도 그 무명 음반의 주인이 타티아나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여러 특징적인 부분들이 평소 타티아나가 펼치는 음악과 비슷하게 들렸다.
아르카디는 그녀의 음악에 흥미가 많았으므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확실한 증거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아낼 순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 범주 안에 타티아나를 전혀 넣지 못하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 근거와 설명 등을 듣고 싶어 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르카디는 정말 많은 문의를 받았다.
물론 그건 약간 답답한 일이었다.
1년 전 무명 음반이 타티아나의 것이란 증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고 묻는 말엔 교수인 아르카디조차 무어라 답해야 할지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특정 부분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방식이나 감각적인 부분이 닮아 있다고 하는 건 정말 전문성 떨어지는 설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분석하여 따지고 들어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신년 연휴로 음반사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직접 문의해 볼 수도 없었고, 다른 음악가들 역시 모두 공식적인 메시지 없이 침묵 중이었다.
타티아나가 음반을 연말에 낸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을 터였다.
청자들이 어떠한 다른 채널이나 루트를 통하지 않고 연휴 동안 천천히 음악을 들어보면서 스스로 판단하길 바랐을 것이라고, 그렇게 아르카디는 판단했다.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대답만을 돌려주었다. 열심히 들어보고 직접 확신을 찾아내보란 것이었다.
“…….”
그런데 타티아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진실 여부만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아르카디는 최소한 그게 자신의 제자들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바람이란 늘 배신당하곤 했다.
“아르카디 교수님, 새해 첫 인사 드립니다.”
“새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아르카디는 현관 손잡이를 붙잡은 채 두 제자, 다닐과 알렉산드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간은 오전 7시.
아침부터 신년 인사를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라면 정말 기쁘게 맞이하고 아침 식사라도 거하게 차릴 생각이 있었지만, 두 제자의 얼굴을 본 아르카디는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술에 완전히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교수를 찾아오는 제자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렉산드르는 고개를 건들거리더니 딸꾹질을 하기까지 했다.
“자네들…….”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밤새 술을 마시고도 이렇게 인사하러 온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아르카디가 그렇게 노려보고 있자 알렉산드르보단 조금 덜 취한 다닐이 빠르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간 아르카디가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 성싶다.
“교수님…… 새해 벽두부터 죄송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대론 못 지나가겠어서…….”
“무슨 말인가? 제대로 설명해 보게.”
“그…… 어제 나온 신보 있지 않습니까? 중앙음악학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데뷔 음반.”
난데없는 말에 아르카디가 당황하기도 잠시 다닐은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주장하는 듯 강력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음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렉산드르와 밤새도록 토론을 해도 계속 이 녀석이 엉뚱한 소리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염치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엉뚱한? 뭐가 엉뚱해? 내가 근거까지 제시했는데?”
“그게 근거냐? 진짜 귀는 왜 달고 다니는지.”
“뭐라고 이 자식아?”
교수 앞에서 갑자기 또 다투기 시작한 두 제자를 보며 아르카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발로 뻥 차 버리고 문을 닫고 싶다.
하지만 다닐도 알렉산드르도 평소 그가 아끼는 제자들이었다. 성적도 좋고 열정적이다.
이렇게 새해부터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무작정 교수의 집에 쳐들어오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 열정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웃으며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기에 아르카디는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지금 문제가 있다는 자각은 있나?”
“문제…… 너무 이른 시간이긴 하죠.”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겐가?”
“그, 별로 안 마셨습니다…….”
다닐은 어색하게 변명했지만 옆의 알렉산드르를 보면 가볍게 마신 수준이 아니었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아르카디의 부인인 세라피마가 현관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어머나, 학생들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아르카디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전 다닐, 이 녀석은 알렉산드르이지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모님.”
“거기 그렇게 있지 말고 들어와요. 어서.”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고 냉큼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아르카디는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서 만나면 이 철부지 주정뱅이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일단 식탁에 둘러앉아서 라솔니크로 술기운을 몰아내고 나자 다닐과 알렉산드라는 다시 피아니스트로서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다닐은 밤새 분석한 것처럼 보이는 악보 뭉치와 음반을 손에 쥐고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특히 이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그중에서도 5번, 7번, 9번 변주를 보면…….”
특유의 아카데믹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다닐은 상당히 또렷한 근거를 가지고 음악을 읽어내리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부분들에 대해선 아르카디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거기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
“그 이야기는 아까도 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이 같다는 걸 내가 부정하진…… 콜록, 않아. 그렇게만 짚어보면 같은 사람의 연주 같지만, 디테일한 처리에선 차이가 있다니까?”
“1년이 지났으니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 아예 차이가 없으면 새 음반을 내겠냐?”
“그 부분도 이상한 거지. 그 실력을 가지고 뭐하러 그렇게 해? 애초에 작년에 데뷔했으면 될 일을.”
알렉산드르는 격하게 이야기했다.
“그보단 이전 무명 음반을 미하일 표도로비치가 냈다고 보는 쪽이 맞다니까. 이후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같은 레퍼토리를 따라 친 것이고.”
“너 미하일 표도로비치의 음악을 들어보긴 했어? 그분이 슈만을 이렇게 연주해?”
“라흐마니노프는 빼닮았던데 뭘. 그리고 아까 찾아봐서 알겠지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그분을 사사한 건 사실이잖아?”
아르카디는 왜 이런 의견이 나오는지도 납득했다.
만약 알렉산드르가 사전 정보 없이 미하일의 이름을 떠올린 것이라면 굉장히 날카로운 식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타티아나는 미하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그건 재작년만 하더라도 굉장히 두드러지는 부분이었다.
아르카디는 그 점을 분명하게 느꼈다. 타티아나는 마치 미하일과 구세프의 장점만을 섞어서 쌓아올린 성곽 같은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부분이 상당 부분 옅어지면서 그녀만의 색을 찾아간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러니 알렉산드르처럼 생각하는 것도 아주 근거 없는 판단이라 할 순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님은?”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눈을 번뜩이며 두 제자는 동시에 아르카디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해질 뻔했던 아르카디는 이제 꽤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의견을 교류할 수 있다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여기서 갑자기 해답을 휙 하고 던져주기보단 알아서 더 답을 찾아내도록 하고 싶었다. 아르카디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생각하는 바는 있지만 확실하게 답을 알려주긴 어렵겠군.”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어디 물어볼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어볼 곳? 음, 난 타티아나에게 안부 인사도 받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일부러 묻지 않았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예? 안부 인사요?”
“그래. 보여줄까?”
아르카디는 어젯밤 받았던 메시지를 찾아내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뭔가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이었지만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두 제자를 보니 아르카디는 크게 웃었다.
아마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광경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타티아나의 음악성과 그 역량의 발전에 대해 수많은 음악가들이 격렬한 토론을 나누리라 생각하면, 그 무시무시한 평가의 늪에 직접 발을 디디는 건 대체 얼마나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가늠조차 잘 되지 않았다.
‘그녀답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일지…….’
얼마 전 봤던 타티아나는 꼿꼿한 태도로 자신의 음악을 관철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이슈를 끄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고 묵묵하게 연주를 하는 스타일이었기에, 아마 무명 음반도 그냥 그 음악들만 세상에 남기고 그 이상 밝힐 생각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것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않고 다시 끌어오며 주목을 끌면서 자신을 그 한가운데로 던져넣었다.
거기에 대해선 어렴풋이 드는 생각들이 있었지만, 당장은 약간 애잔하기도 했다.
‘아마 타티아나도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
아르카디는 잔뜩 긴장한 채로 연휴를 보낼 타티아나를 생각하며 나중에 그녀와 에르네스트를 다시 한번 찾아가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