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4화
여행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해 왔지만 그래도 막상 코앞에 닥치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실질적인 부분들은 루슬란 오빠와 예고르, 빅토르 그리고 나제즈다가 정말 많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내 친구들이 많이 참가하는 만큼 그만큼 신경 써서 마지막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물론, 내일 이동 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리처드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다른 이야기를 슬쩍 꺼내기도 했다.
- 네 음반으로 떠들썩하던데, 이럴 때 그냥 떠나버려도 되는 거야?
그는 딱히 내게 책임 같은 걸 묻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빅토르에게 어마어마한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는 건 내게 그만큼 답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난 음악 외적인 대답은 되도록 피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입장을 단 며칠만이라도 지키고 있기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합의를 마친 후였다.
그야말로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추라 할 수 있었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이즈베스티야의 라시드와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을 필두로 다른 사람들의 질문 등에도 답해야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연휴 동안은 여행에만 집중하기로 정했으니까, 그렇게 하려고 해요.”
- 보통은 자기 음반 반응 같은 것이 걱정되어서라도 그렇게 못 할 텐데.
“제가 걱정하면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하나요?”
- 그건 아니지만.
“평가에 대해서라면…… 연휴가 끝날 때쯤이면 정리가 되리라 생각해요. 그럼 그때 가서 보면 되겠죠.”
내 대답에 리처드는 그런 쿨한 대응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며 웃기만 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소치까지의 이동 편이나 숙소인 별장의 상황 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등 여행 전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타티아나, 식사하러 와.”
“예. 갈게요.”
루슬란 오빠가 방문을 노크하며 날 불렀다.
복도로 나가니 먼저 가버리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던 오빠가 날 보고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자연스레 그 옆에 따라붙었다.
오전 내내 방에서 내일부터 이어질 일정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난 약간 들떠 있었기 때문에 그 텐션 그대로 오빠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는 어떠신가요?”
“준비? 무슨 준비.”
“내일 가는 여행 말이에요.”
“아, 그거. 글쎄…… 우리가 딱히 할 일이 남아있나? 이미 비행기도 빌렸고. 예약도 할 것 없고. 난 그리고 보호자로 가는 거니까.”
오빠는 다시 생각해보는지 시선을 살짝 위로 올렸다가, 휙 돌려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너희 감시 역할이란 말이지.”
“후후, 감시요.”
“그래. 건전하게 노는지 지켜볼 거야. 알지? 나한테 봐달라고 해도 소용없는 거.”
“……무슨 말인지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우리가 가서 논다고 해 봐야 주변을 관광하거나 편하게 쉬는 것 정도뿐이다. 신년 연휴라서 어차피 할 것도 별로 없다.
뭔가 오빠에게 양해를 구할 정도로 파격적인 일을 할 계획은 전혀 없다.
그럴 만한 아이디어도 없을뿐더러, 에르네스트에겐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오빠도 그럼 상관없다며 웃기만 했다.
***
아나톨리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훨씬 더 정신없어 보였다.
“짐은 그 정도로 가져가도 되나? 빼먹은 건?”
“머리 다시 정리할까?”
“…….”
막상 아나톨리는 차분하게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겼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은 타티아나라는 친한 누나의 권유로 가게 된 여행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받아들인 여행의 의미는 베르체노프가에서 온 초대에 가까웠다.
사회에서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이 어떻게 통용되는지 대충이나마 아는지라 이런 유난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아나톨리로선 약간 안타깝기도 했다.
타티아나가 절대로 이런 광경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떠나기 전까진 이 유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나톨리는 얌전히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 시간 5분 전에 벨이 울렸다.
현관으로 나가 본 아나톨리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사이 마음의 준비는 충분히 했는지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 뒤엔 베이지색 코트 차림의 타티아나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아하하,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어머님.”
아나톨리가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니 되레 방문객인 타티아나보다 어머니가 더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서 가서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재차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해요. 오늘은 전화상으로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나톨리를 데리러 왔어요.”
“아, 그래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들어오시죠.”
아나톨리의 아버지도 그 뒤편에 가서 타티아나를 맞았다.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이미 텔레비전에도 나온 적이 있는 피아니스트였고, 아나톨리와 친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타티아나에 대해 여러 번 찾아본 후였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한 타티아나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미 첫 만남만으로도 부모님이 한계까지 감탄 중이라는 걸 느낀 아나톨리는 여기서 더 내버려두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섰다.
거실에서 걸어나오는 아나톨리를 보며 타티아나가 환하게 웃었다. 아나톨리도 웃으며 새해 인사를 건넸다.
“해피 뉴 이어예요.”
“후후, 그래요. 해피 뉴 이어.”
“오늘 같이 가자 해 주셔서…… 고마워요. 누나한텐 다시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가요?”
그냥 10학년끼리 놀러갔다 하더라도 아나톨리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같은 스터디룸에서 공부하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주긴 하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다루는 악기도 다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것들에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챙기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한참 지난 일도 전혀 잊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전 작년 여름에 아나톨리가 콩쿠르 일정으로 저희 집에 놀러오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조금 걸렸거든요. 이번엔 시간이 맞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정말 기뻐요.”
아나톨리는 살짝 놀랐다.
그 당시엔 그도 일정이 안 맞아서 아쉽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타티아나가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이번엔 아나톨리의 부모님 쪽으로 향하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여행에 귀한 자제분의 동행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아버님.”
타티아나의 목소리엔 사람을 이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평소에 나긋나긋한 톤으로 말할 때도 그런데, 이렇게 격식을 차려서 말할 땐 정말 누구라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힘이 느껴지곤 했다.
아나톨리는 타티아나가 그런 말까지 해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고, 그건 그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야말로요. 하하하하.”
“마음대로 데려가시죠.”
“…….”
거의 그냥 데려가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아나톨리도 그게 나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나톨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타티아나는 아무리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 할 부분들은 지금 말하고 가야 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다시 네스트로프가에 돌아오는 것까지 책임지고 약속드릴게요. 매일 안부 전화도 당연히 드릴 테고요.”
“뭐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안전하겠죠.”
“되레 아나톨리가 사고를 치진 않을까 걱정이네요.”
괜히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이지 않나 생각할 즈음, 타티아나가 대신 아나톨리를 변호해주었다.
“그런 걱정은 않으셔도 되어요. 아나톨리는 평소에 학교에서 정말 모범적이고 어른스럽거든요. 제가 보장드려요.”
존경하는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준다는 건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아나톨리는 무어라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슬쩍 끼어들며 장난스레 아나톨리에게 물었다.
“세상에 너 대체 학교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니?”
“……잘 한다고 누나가 말하잖아. 엄마가 안 믿어주면 어쩌자는 거예요?”
도저히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아나톨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가 괜히 곤란해하기라도 할까 싶었다.
얼른 집을 나가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도 그리 넉넉한 건 아니었다. 아나톨리는 서둘러 그녀에게 말했다.
“가요, 누나. 시간 늦겠어요.”
“부모님들이 걱정하시는…….”
“전혀 걱정 안 하잖아요.”
타티아나는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한 아나톨리는 빠르게 준비한 캐리어를 가지고 왔다.
캐리어의 크기를 가늠해 본 타티아나가 물었다.
“짐은 그것뿐인가요?”
“예, 타티아나 누나가 거기에 있을 건 다 있다고 해서…… 제가 입을 거랑 이것저것요.”
“사실 몸만 가도 괜찮긴 해요.”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겠다는 듯 농담조로 이야기하던 타티아나는 손가락으로 입술 부근을 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진 않겠네요.”
“예?”
“아나톨리, 미안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바이올린도 챙겨가지 않을래요?”
“!”
사실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는 건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연주 연습을 주로 하는 여행도 아니었고, 피아노과가 대부분인 그 일행 사이에서 괜히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는 건 튀는 행동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아나톨리는 기본적으론 그냥 바이올린 없이 가기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먼저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자고 말을 해주었다면, 분명히 가져갈 이유가 생긴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누나.”
“우리 중 유일한 바이올린 연주자이시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아나톨리는 방으로 곧장 뛰어들어가선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나왔다.
캐리어는 타티아나가 대신 끌고 가 주었다. 아나톨리도 그의 부모님들도 당황해했지만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돌아와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와요.”
“말 잘 들어야 한다. 아나톨리.”
너무 과하게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아나톨리는 대답하지 않고 퉁명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타티아나가 유일한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인정해주었단 사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