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35화 (935/1,277)

##  935화

아나톨리도 이제 열한 살로 마냥 어린애가 아니다.

오늘 다른 친구들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처럼, 굳이 이렇게 데리러 오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대중교통을 타고 잘 공항까지 왔겠지.

그러니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는 건 어쩌면 아나톨리를 너무 어린애처럼 대하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젠 나와 키도 거의 비슷한데. 어린애 취급하면 화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고.

“…….”

하지만 인사를 드리진 않을 순 없었다.

새해부터 며칠 동안이나 여행을 계획한 책임자로서 난 아나톨리의 부모님을 제대로 뵙고 안심시켜드릴 의무가 있었으니.

다행히 부모님들은 날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고, 아나톨리도 생각보다 부담스러워하진 않는 듯했다.

옆을 보니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어서 앞으로 놀러 갈 일에 기분이 들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기대하고 계시나요?”

“물론이죠. 소치는 처음 가보거든요.”

살짝 물어보니 아나톨리는 밝게 대답했다.

소치는 유명 휴양지이긴 하지만 작정하고 여행으로 가지 않는 이상 가볍게 가기엔 너무 먼 곳이긴 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처음이라서 기대되네요.”

“……예? 별장이 있다고 했잖아요?”

“별장이 있더라도 그건 아버지 소유라서요. 제가 가본 적은 없어요.”

“전 만약 소치에 별장이 있으면 매 방학마다 갔을 것 같은데.”

기억을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서 나와 오빠를 데리고 여행을 간 적은 많았다.

국내 관광지들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에도 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소치는 가본 적이 없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당시 불안정하고 예민했던 내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선 되도록 신기하고 볼거리가 많은 곳을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해수욕과 스키, 그리고 휴양이 메인인 소치는 당시 내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와 오빠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겠지.

자주 우울해했던 날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주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다만, 그때 난 세상 어딜 가더라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

예전 일들을 돌이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쉬움과 후회를 딛고 보상하는 일이다.

모두가 바랐을 일들을 하나씩 되돌아보며 반복해나가면 언젠가 전부 잘 되리라 생각한다.

그에 대한 확신은 여러 가지 근거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 더 자주 웃고, 많이 이야기하자.

물론 이렇게 새삼스레 떠올리지 않더라도 난 이미 충분히 여행에 대해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을 확인하는 건 내가 조금 더 발걸음을 자신 있게 내딛는 데에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아파트에서 내려와 길가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으로 다가갔다.

마치 자동문처럼 뒷문이 열리며 루슬란 오빠가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

“그, 안녕하세요……!”

바짝 긴장한 아나톨리는 차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인사했다.

“아나톨리 이고르비치 네스트로프라 합니다!”

루슬란 오빠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 와서 다시 자기소개야? 너 나랑 알잖아.”

“어…… 예?”

“작년에 했던 타티아나의 리사이틀에 왔었던 것,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아…….”

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오빠가 제대로 기억해줄지 확신이 없었기에 아나톨리는 아예 처음 본 것처럼 대하려고 했지만, 오빠는 단번에 아나톨리를 알아보았다.

이야기하는 걸 보니 가볍게 인사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나톨리는 되레 더 당혹스러워했다. 결례가 된 게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다.

“뭐 해? 찬바람 들어오잖아. 일단 타, 빨리.”

하지만 오빠는 이런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간에 이렇게 다시 봤으니 상관없다는 듯 안쪽으로 손짓했다.

그 손짓에 이끌리듯 아나톨리는 차에 올라탔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탔다.

우리가 모두 탑승한 것을 확인한 후 소로킨이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깬 건 루슬란 오빠였다.

“사탕 먹을래?”

“아…… 고맙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굴 것 없어. 그리고 넌 지금 타티아나의 손님인 거니까, 내 눈치를 그렇게 볼 것도 없고.”

꽤 긴장한 것으로 보이는 아나톨리를 달래기 위함인지 오빠는 태연하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왔다.

상냥하게 웃어 준다면 조금 더 효과가 좋겠는데, 그냥 적당히 이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더 편안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톨리는 처음엔 오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는지 다시 좀전의 들뜬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음은 어떤 애라고 했지?”

“류보비라고 해요. 저번에 보셨을 거예요.”

“아, 알지.”

이미 내 몇 안 되는 친구들에 대해선 다 알고 있는 투였다.

오빠가 이렇게 내 교우관계를 꿰뚫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조금 기뻤다.

어쩐지 관심을 제대로 두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모스크바 시내를 조금 더 달려 이번엔 류보비의 집 앞에도 도착했다.

아나톨리를 데리고 왔던 것처럼, 난 이번에도 직접 올라가서 벨을 누르고 류보비의 부모님에게 제대로 인사를 드렸다.

새해부터 따님을 데리고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사과 역시 포함이었다.

류보비의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뇨, 아뇨, 아뇨. 이 애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만약 가지 말라고 했다면 아마 무척 떼를 썼을걸요?”

“내, 내가 언제 떼를 썼다고 그래!?”

“그래서 안 말렸잖니?”

“엄마가 그러면 오해가…… 아, 진짜 아닌데!”

묘하게 휘둘린 느낌으로 류보비가 발을 동동 굴렀고, 그 모습이 귀여운지 부모님들은 웃기만 하셨다. 나 역시 그 웃음에 동참했다.

류보비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물씬 느껴지는 이 가정의 일면을 살짝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무언가가 충족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잠시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충분히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이 될 즈음 인사를 건넸다.

“후후, 그럼 돌아올 때 뵙겠습니다.”

“그러세요. 우리도 이참에 마음 놓고 어딘가 여행이나…….”

“엄마!!”

괜한 장난이 분명한 그 말에 류보비는 또다시 걸려들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투덜투덜하는 류보비를 데리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루슬란 오빠가 문을 열며 인사했고 류보비 역시 친근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어색해하진 않는 모습이었다.

좌석에 얌전히 앉은 류보비는 옆자리의 아나톨리의 어깨를 쿡 찔렀다.

“너도 언니가 데리러 갔었어?”

“어.”

“뭔가 우리만 편하게 가게 되는 느낌이네.”

아나톨리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류보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들 공항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둘만 내가 이렇게 픽업하러 온 것이 신경 쓰이나 보다. 사실 특별취급이 맞긴 하지만.

하지만 제일 어리고 잘 봐줘야 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두 사람을 케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거기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직접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난 빙그레 웃으며 류보비에게 말했다.

“공항까지 가는 길이 머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후후.”

난 아까 오빠에게 배운 방법대로 사탕을 하나 꺼내어 류보비에게 건넸다. 그녀의 이런저런 생각을 한 번에 날려버리기엔 충분한 당분이었다.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진 1시간 정도 걸린다.

그사이 우리 네 사람은 새해를 맞이해 있었던 특별한 일이나 앞으로의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건 내 음반 이야기였다.

“오늘 아침에도 텔레비전에서 언니 이름 들리던데요?”

“그랬나요? 전 안 봐서…….”

“어떻게 그걸 안 봐요!? 저라면 모든 채널 다 찾아서 녹화했을 텐데.”

류보비는 열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여행을 가는 건 물론 기쁘고 기대되는 일이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내가 막상 내 음반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같이 보이는 태도가 좀처럼 이해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명의 음반사 대표와 논의하여 이 시기에 발매하기로 한 데엔 정말 여러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신경 쓴다 한들 연휴 기간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의 프로젝트를 구구절절 설명해주기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난 지금은 이미 세상에 던져진 음반보다는 여행에 집중하고 싶다고 류보비에게 이야기했다.

류보비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이내 감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여행에 몰입해주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 같았다.

네 명이 한 마디씩만 돌아가며 이야기하더라도 1시간 정도는 금방 흘러버린다.

한창 이야기가 달아오를 때 즈음, 우린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는 소로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리자.”

“예.”

오빠가 선두로 우린 리무진에서 내렸다.

따뜻했던 리무진에서와 달리 밖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1월 초의 모스크바 날씨는 그야말로 혹독하다.

자꾸 날리는 머리를 정돈하며 약속장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미 모여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혹시 늦나 했는데.”

“어서 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리처드, 한승우. 그리고 에르네스트와 사샤가 손을 흔들었다.

분명 며칠 전에도 학교에 모두 함께 있었는데, 이렇게 밖에서 보게 되니 더없이 반갑고 기쁘다.

난 모두와 다시 인사를 나누면서 오는 데에 문제는 없었는지, 또 가는 데에 문제는 없는지 다시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 난 쟤들이랑 같이 왔어.”

“같이 만나서 오셨군요?”

“응.”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렌티나는 리처드, 한승우와 함께.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혼자서 왔다고 한다. 에르네스트와 사샤는 함께 왔을 테고.

시간관계상 공항까진 이렇게 각자 오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는 모두 함께다.

난 활주로 쪽을 살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적당히 알맞은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여권은 챙겨왔냐? 비행기 표도?”

“너야말로 일반 여객기랑 달리 저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알지?”

그사이 모두들 몸을 녹이고 장난을 치면서 서로의 기대감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다는 것은 역시 그 자체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사샤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에르네스트를 슬쩍 보니 컨디션은 괜찮아 보였다. 다행이었다.

잠시 후, 빅토르가 우릴 부르러 왔다. 우린 공항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곧장 활주로로 향했다.

그곳엔 아버지가 빌려준 전용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용기 옆으로 붙어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바로 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의 다 올랐을 즈음, 한승우가 문득 날 돌아보며 물었다.

“타티아나, 진짜로 신발 벗어야 하는 건 아니지?”

“……?”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한승우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오래 알고 지냈지만, 정말 순진한 건지 아니면 개그에 욕심이 있는 건지 아직도 가끔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

일반적으로 자연 관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자면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과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 터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광지는 둘 중 하나에 집중하게 되어 있지만, 소치는 거대한 카프카스 산맥과도 가깝고 흑해를 따라 길게 조성되어 있어서 산과 바다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는 러시아 서남부의 휴양도시였다.

145km나 되는 유럽에서 가장 긴 도시였기에 여름엔 흑해를 만끽할 수 있고,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1월 평균 온도는 7도 정도로 러시아에선 따뜻한 도시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강설량이 무척이나 높아서 동계 스포츠에 적합했다.

게다가 몇 년 전엔 동계 올림픽이 열리면서 수 조 루블이나 투자되어 더더욱 주목을 많이 받게 되어서, 이젠 명실상부 러시아에서 제일 가볼 만한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였다.

“날씨 따뜻한 거 봐.”

“진짜 오랜만에 와 본다.”

소치 국제공항까진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우린 어떤 수속을 거칠 것 없이 바로 사다리를 통해 내려선 짐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느낀 건 정말 하나도 안 춥다는 것이었다.

항상 영하권에서 맴도는 기온을 마주하고 있다가 이런 곳에 오니 갑자기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공항 근처 곳곳에 보이는 아열대 식물들이 더더욱 이곳의 분위기를 이국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새롭게 느껴지는 공기를 마시며 잠시 익숙해지고 있자, 빅토르가 다가와서 물었다.

“별장까지 이동을 위해 승합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혹시 라스토치카lastochka를 원하시면 그렇게 하셔도 괜찮으나 되도록 승합차로 이동하길 추천드립니다.”

라스토치카는 소치 올림픽을 위해 도입된 도시전철이었다.

이런 곳까지 왔으니 전철로 이동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챙겨야 할 인원이 여덟 명이나 되는 만큼 빅토르의 추천에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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