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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36화 (936/1,277)

##  936화

검은 승합차에 모두 올라탔다. 여기서도 운전은 역시 소로킨이 맡아 주었다.

“해안가로 가는 건가요?”

“예, 그쪽 도로를 통합니다.”

미리 봐 뒀던 루트대로 가는 것 같았다.

지금 향하는 방향과 반대인 북동쪽의 카프카스 산맥으로 향하면 소치 올림픽 때 설상 경기들이 열렸던 크라스나야 폴랴나가 나온다.

하지만 그쪽엔 갈 일이 없었다.

내가 부상 위험이 높은 스포츠를 무서워하는 것은 차치하고, 에르네스트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다들 조심해야 할 때인 까닭이었다.

모두들 실수로라도 스키나 스노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때문에 우린 일단 남서쪽의 10분 거리의 아들레르로 향하고 있었다.

아들레르 역시 소치 올림픽 빙상경기가 열렸던 경기장 등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멋진 해변과 공원으로도 유명했다. 박물관과 쇼핑센터 등도 위치해 있었고.

“우리가 묵을 곳이 시내에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얼마나 걸려?”

“글쎄요. 제가 전에 듣기론 아들레르 시내에서 30분 정도? 그렇죠? 오빠.”

“대충 그 정도 걸려.”

그냥 호텔에서 쉬는 것이라면 아들레르 시내에 좋은 호텔이 많으니 그곳으로 가면 된다. 해변도 가까우니 뷰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체노프가의 소치 별장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 해변가로 나오는 건 단지 도로를 갈아타기 위함이었다.

빅토르는 내친김에 아들레르에서 구매할 것이 있다면 잠깐 쇼핑센터에 들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온 캐리어만 열 개였다.

지금 당장 무언가 더 사기보다는 일단 짐을 풀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린 아들레르 시내를 일단 창밖으로만 구경했다.

“예전에 왔을 땐 이런 거 아예 없었는데. 뭔가 엄청 많아졌네.”

“예전이라면 언제?”

“글쎄. 일곱 살쯤이었나.”

“그럼 당연히 다 바뀌었지. 올림픽이 열렸는데.”

“그래도 이건 아예 다른 도시네.”

소치에 와 본 경험이 있는 에르네스트는 이곳을 잘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0년도 더 된 기억은 큰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수 조 루블의 투자가 이루어진 곳이니 더더욱.

이때다 싶었는지 리처드가 꼬투리를 잡고 놀리기 시작했다.

“언제는 익숙한 것마냥 굴더니, 사실상 처음 오는 거였냐?”

“내가 언제 그랬어.”

“딱 보면 보이지.”

“그딴 눈은 뭣하러 달고 다녀?”

걸어오는 시비를 마다하지 않는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와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곧 좋은 자리에서 싸우지 좀 말라는 한마디를 발렌티나에게 듣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흥미롭게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아들레르 외곽으로 빠져나온 차량은 해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겨울에다가 신년 연휴이니 당연히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놀러 온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크라스나야 폴랴나로 스키를 타러 가지 해변가로 나오진 않는다.

“…….”

그래도 모스크바에선 바다를 좀처럼 볼 수 없었기에 귀한 풍경이었다.

늘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바다와 파도의 형태를 소리로 옮기는 것에 골몰하는 것이 또 우리의 일이라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바다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아도 너무도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음속까지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전망대에선 흑해 너머 터키도 보인다던데.”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서 안 보이지 않을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 역시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톨리는 몇 년이나 바다를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해변도로를 잠시 달린 지 얼마 안 되어 차량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공항에서 아들레르 시내, 그리고 해변도로까지 이어지는 잘 뚫린 도로와 달리 이번엔 조금 구불구불한 도로였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수많은 별장들과 머물 수 있는 숙소 등이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소치는 별장이 많기로 유명했다. 우리가 가는 목적지 역시 이 길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사실 나도 정확한 위치가 어딘지, 어떻게 생겼는진 잘 모른다. 단지 오빠가 보여준 사진으로 입구 부근과 전체적인 모습만을 알 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

그런데 도로를 따라가던 차량은 갑자기 옆으로 슥 빠지며 잠시 멈춰 섰다.

설마 벌써 도착한 것인가 싶어 밖을 보았지만 사진으로 봤던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커다란 차량 차단기만이 도로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주차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것이었다.

앞좌석에선 빅토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조금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눈으로 날 본들 나 역시 아는 것이 없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 시선도 오빠에게 향했다.

“왜?”

“빅토르가 지금 어디에 전화를 하고 있는 건가요?”

“우리 왔으니 차단기 열어 달라고 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차단기라는 게 왜 있는 건지 궁금한 건데.

하지만 그간 이런저런 상식과 눈치를 꽤 많이 익힌 나는 곧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추리해낼 수 있었다.

“혹시 이 앞으론 사유도로인가요?”

오빠는 내게 그걸 이야기 안 해 주었다는 것조차 모르는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유도로란 말에 따라붙은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고, 몇몇은 놀라움, 그리고 아예 그게 뭔지조차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사유도로가 뭐예요?”

순진하게 묻는 류보비를 보며 난 잠시 고민했다. 이 앞이 쭉 다 아버지 것이라 굳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용기를 타고 이곳까지 온 시점에서 그런 생각은 의미 없겠지만…….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아나톨리가 소곤거리며 답했다.

“이 앞이 전부 누나네 거란 뜻이지 않나.”

“어…… 정말로?”

“아마도.”

“저기 저 산도?”

“아마도?”

속닥이는 모습을 보니 꽤 장대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나도 혹시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러시아는 토지제도에 개혁이 여러 번 있었고 지금은 개인이 매매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치를 마음에 들어하셨다면 이 도로뿐만이 아니라 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끝났다. 루슬란 오빠는 크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산까지 갖고 있진 않아. 그냥 도로만 만들었을 뿐이야.”

“도로를 만들었으니까 사유도로인 건가요?”

“그렇지.”

“왜 굳이 더 만든 거예요?”

류보비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는 길에도 우린 이미 몇 개나 되는 별장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별장만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 옆에 짓는다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면 위치가 중요하다.

“저 안쪽에서 온천수가 나오거든.”

“아, 정말요!?”

그제야 난 소치에서 유명한 것이 바다와 산뿐만이 아니었단 것을 깨달았다.

소치에 별장이 유독 많은 것은 바로 온난한 기후뿐만이 아니라 자연온천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일반적인 온천보단 유황 온천이 많은 편이라 치료 등을 목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얼마 전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에르네스트의 치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꼭 알아보고 가봐야겠단 것이었다. 때문에 근처에 유명하다는 마체스타matsesta 등도 알아보고 있었는데…….

“설마 별장 안에 온천도 있나요?”

“내가 말 안 했었나?”

“안 했어요!”

깜짝 놀라 말해도 오빠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별장에 온천이 있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에 가까웠기에 무슨 상관이냐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관이 있었다. 별장에서 편하게 쉬면서 치료에 도움이 될 온천욕도 즐길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을 수 없었다.

잔뜩 들뜬 기분으로 난 기다렸고, 그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도로가 길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별장까진 한참이나 더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와.”

차에서 막 내린 우리 입에선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산속에 있는 별장이라기엔 화려한 건물이었다.

높이는 2층 정도라 별로 높지 않아서 근처의 높은 나무들로 가려질 정도였지만, 우아한 양식으로 넓게 펼쳐진 모습은 오래된 미술관을 연상케 했다.

물론 이곳에 오기까지 차단기를 통과하고 정문에서도 차량을 확인한 모든 것은 현대적이었지만.

한승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별장이라길래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같은 걸 생각했는데…….”

“야, 타티아나가 그런 걸 별장으로 쓰겠냐?”

괜히 리처드가 면박을 주었지만 난 사실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같은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조금 좁아야 재미있을 것 같단 생각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러면 온천이 있기 어렵겠지.

결국 내 관심사는 이곳의 온천에 쏠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슬란 님, 타티아나 님.”

각자 캐리어를 내리고 입구 근처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자 고용인 분들이 몇 분 나와 우리에게 인사하고는 안내했다.

이런 숲속에서 별장을 관리하려면 정말 힘들 것 같단 생각을 했지만, 사실 항상 상주하는 건 아니고 꽤 긴 텀을 가지고 교대로 최소한의 관리만 하면서 사용할 때만 본격적으로 일을 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 같았다.

내가 안내를 받아 간 곳은 1인실이었다.

가족 단위로 잘 수도 있는 큰 방이 있기도 했으니 남자들과 여자들로 나누어서 지내도 괜찮겠지만, 인원수보다 방도 많이 있으니 그냥 편하게 있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하기로 정했다.

개인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도 중요했다. 우린 단체로 놀러다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휴양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니까.

“…….”

캐리어를 대충 내려놓고 창문부터 열었다.

이미 청소를 말끔하게 해 둔 상태라 방 안엔 정말 먼지 하나 없었지만 공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더 상쾌한 기분이 든다.

숲의 바람이 불어온다. 1월인데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피로감을 내려놓고 멍하니 있던 난 잠시 후 다시 로비에서 모두들 만나기로 했던 걸 떠올렸다.

급히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 정도만 빗어내린 후 로비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모두 모여서 고용인 분들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궁금한 것을 묻고 답을 받는 것 같았는데, 사실 대답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원하실 때 이용하시거나, 저희를 불러주시면 됩니다.”

식사 시간이나 여러 시설들을 사용하는 시간 등은 전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냥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 사용하면 되는 식이었다.

단 별장 밖으로 나갈 땐 가급적 고용인이나 경호원을 부르는 것이 조건이었다.

밖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숲인데, 자칫 저 숲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정말 큰일이니 그건 멋대로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에 있는 시설 등에 대한 질문이 오가는 사이, 나 역시 처음인 이 별장에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기, 온천은 어디에 있나요? 이용할 수 있을까요?”

“온천은…… 이참에 아예 보여드리면서 설명드려도 될까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아,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쪽으로, 타티아나 님. 그리고 손님분들도.”

말로 쭉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아무 때나 이용할 시설들이라면 직접 안내를 받는 편이 낫다.

그렇게 복도를 따라 걸으며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피트니스, 실내체육관, 영화관, 카페, 연회장, 수영장, 사우나 등 3박4일 동안 다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많은 시설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해했던 온천 역시 제대로 운영 중이었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설명이 이어졌다.

“온천은 아무 때나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유황 온천이니만큼 준비가 그만큼 필요하죠. 만약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상주하고 있는 의사를 찾으시면 됩니다. 간단한 검진을 한 후 계획에 따라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의사 선생님이 계신가요?”

“예, 마체스타에서도 유명하신 분입니다.”

생각보다 더 본격적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옆을 돌아보니 에르네스트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던 난 그를 살짝 부르며 속삭였다.

“온천에도 꼭 들어가 주세요. 아셨죠?”

에르네스트는 굳이 왜냐고 묻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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