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37화 (937/1,277)

##  937화

안내를 받으며 1층부터 2층, 그리고 옥상까지 그냥 한 바퀴 돌아보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넓기도 하고 시설들도 많았다. 어지간한 호텔보다 낫지 않을까 싶다.

“여기까지고…… 질문 있으시다면 받겠습니다.”

마치 호텔의 컨시어지처럼 우릴 안내해준 분은 자신을 베니아민이라 소개했다. 아마 이 별장에서 꽤 높은 책임자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질문 시간을 주자 아나스타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씀하시죠.”

“저녁 몇 시쯤 퇴근하시나요?”

“예?”

난데없는 말에 베니아민은 처음으로 당혹스러워했다. 그녀의 질문이 조금 뜬금없이 느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질문이 조금 이상했나요? 다른 게 아니라, 아무 곳이나 아무 때나 이용해도 좋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밤새도록 놀아도 되는 건 아니겠죠?”

우리가 작정하고 밤새 놀면 그만큼 고용인분들이 일이 많아진다.

물론 알아서 놀도록 내버려둬도 별 상관 없겠지만, 지금 이렇게 깍듯하게 우릴 대하는 걸 보면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베니아민은 곧장 즉답했다.

“밤새 계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특정 시간 이후엔 손대지 않아 줬으면 하는 시설이라든가 지금 말해주시면…….”

“여러분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여러 시설들을 밤새 이용하시는 데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이미 모든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스파는 밤에도 나이트풀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베니아민이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를 슥 돌아보는 그 눈빛엔 자신만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10대 학생들이 아홉 명씩이나 온다고 하니 아마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둔 것 같다.

3박4일 내내 한숨도 안 자고 논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모든 만전의 준비를 해 놓은 사람의 태도였다.

그 준비성이 감탄스럽다가도, 그가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되어서 난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 부분에 대해 이참에 미리 이야기 좀 해 둘게.”

그때, 오빠가 슥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이곳의 호스트는 나, 그리고 게스트들은 내 친구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높은 책임자는 다름 아닌 루슬란 오빠라 할 수 있었다.

오빠는 앞으로 3박4일간 이곳에 머물면서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하게 딱 잘라 규정했다.

“재미없게 성년이 어쩌구 하는 소리는 안 할게. 하지만 밤새 놀고 다음 날 종일 기절해 있으면 손해 보는 게 많을 거야. 어린애들도 세 명이나 있기도 하고. 그러니 되도록 도를 지나치진 않았으면 해.”

오빠 생각엔 꽤 걱정이 되나 보다.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오빠를 올려다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보호자로서 오셨나 보네요?”

“이미 타티아나에겐 그렇게 말했어.”

“믿음직스럽네요.”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빙그레 웃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오빠가 말했다.

애초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은 여기서 정하고 가자는 듯 베니아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야말로 이런 똑부러진 모습을 보면 보호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모두들 딱히 반발하거나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사람 여기 없어요.”

“전에도 밤에는 다들 자지 않았어?”

“그랬지.”

간단하게 동의를 받은 오빠는 다시 베니아민에게 전했다.

“정확하게 딱 잘라 정해놓긴 어렵지만, 밤 12시쯤 되면 정리하는 걸로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챙기도록 하죠.”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슬란 님.”

베니아민은 3박4일 내내 그야말로 파티가 이어지는 것도 감수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되도록 우리가 얌전히 제때 방으로 돌아가 준다면 그 역시 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우리가 건전하게 신년 연휴를 보내게 하겠다는 모종의 의무감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 정도는 미리 눈치챘으므로 협조도 빨랐다.

그렇게 별장 안을 둘러보는 안내는 모두 끝났다.

시간을 보니 이미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차량과 비행기를 타면서 간식을 먹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진 못했기에 모두들 배가 고플 때였다.

좌중에 감도는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캐치한 베니아민이 곧장 물었다.

“다음은 연회장으로 모실까요?”

정말 호텔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자연스럽고 노련한 사람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니아민은 앞장섰다.

1층 로비를 지나면 바로 있는 연회장은 아까는 그냥 지나쳐서 몰랐지만, 그 너머 주방에선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불 앞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자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열 명 모두가 천천히 즐기기에 충분한 코스식 만찬이었다.

“레스토랑이나 호텔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감동적이야.”

“뭔지 잘 몰라도 일단 입에 넣게 되네.”

여기저기서 찬사가 터져 나왔다. 기대하던 식사였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훌륭했다.

난 여전히 드미트리의 솜씨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이곳의 실력도 만만찮았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살짝 주방에 놀러가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옆에 앉은 아나톨리와 류보비를 챙기고,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마치 식사가 아니라 담소가 주목적인 것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디저트로 나온 요거트를 먹으며 난 모두에게 제안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지 않으실래요?”

“그럴까? 그렇지 않아도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어.”

모두 하는 생각은 비슷비슷한 것 같다.

우린 겉옷만 다시 걸치고는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아서 잠시 걷기에 딱 적당했다.

안내로는 베니아민과 빅토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우리 옆에서 딱 달라붙어 있진 않고 살짝 떨어진 상태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우린 또다시 세세한 곳까지 감탄했고, 미처 보지 못했던 시설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

오빠까지 포함해 열 명이나 되는 인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난 이후의 일들을 생각했다.

한참 전부터 여러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확신도 꽤 섰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난 호스트로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응?”

“뭔데?”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약간 기대하는 눈빛이다.

난 천천히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 여행의 목적을 휴양이라고 말씀드리면서도 이후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있었어요. 모두 함께 다니는 계획들이었죠.”

내가 무언가 하자고 하면 다들 이견 없이 따라주겠지. 열 명이서 단체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시설 중 무엇을 떠올려봐도, 소치 시내로 나가도, 결국 에르네스트가 그것들을 정말로 잘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계속 에르네스트에게 신경이 향해 있는 상태로 이 아이들을 무작정 데리고 다니면서 정말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도 없었고.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모처럼 좋은 곳에 왔으니 지금 내가 괜한 계획을 고집하며 이 아이들을 강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딱 좋은 타이밍과 환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직접 와서 이렇게 보니 즐길 만한 시설도 많고…… 각각 하고 싶은 것들을 하시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체육관에서 스포츠를 하셔도 좋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으신 영화를 봐도 좋고요. 아니면 방에서 주무셔도 좋아요. 그게 진짜 휴양의 일환일 테니.”

그야말로 전부 프리하게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씩 확인을 하거나, 괜찮으면 잠깐 그 틈에 끼어들어도 되겠지.

재작년엔 호스트로서 확실하게 책임을 지고 모두를 이끄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역시 호스트로서의 책임은 잊지 않되 나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래서 방도 각각 준 거니?”

“최대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내 말에 다른 뜻이 있지 않고 정말로 모두 편하게 쉴 수 있길 바란다는 것뿐이라는 걸 느꼈는지 아나스타샤도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이름 모를 나무들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그녀는 곧 쾌활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뭐 그것도 좋지. 그럼 오늘 지금부턴 각자 자유시간인 거야?”

“예. 다만 식사는 꼭 함께 했으면 해요.”

“그건 당연하지.”

모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건 좋지만, 식사까지 시간에 맞추지 않고 따로 한다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때문에 그 부분만 살짝 부탁했더니 모두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시간이라…… 뭐 하지?”

“구경이나 조금 더 할까?”

벌써 호기심과 흥미에 찬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난 지금 들리는 곳들을 적당히 돌아다닐 생각을 하며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옆에 온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그런데 넌 뭐 할 거야?”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라서 살짝 말문이 막혔다.

내가 뭔가 할 거라고 하면 같이 해 줄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보내고 싶은 곳은 온천이었다.

“글쎄요…….”

말꼬리를 흐리는 날 에르네스트는 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제안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발끝을 살짝 끌었다.

“그럼 난 그냥 좀 쉴까 하는데. 말 나온 김에.”

“피곤하신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곡 좀 쓰고 싶어져서.”

그런데 난데없이 그는 곡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어지간히 음악에 미친 나도 그 발언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전혀 농담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지금 어떠한 악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실 할 말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본래 작곡가들이 평소 사는 곳과 다른 색다른 여행지에서 떠오른 악상으로 곡을 쓰는 경우는 정말 많았다.

모차르트와 쇼팽이 그러했고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가 그러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사실 지금은 더더욱 강하게 에르네스트를 응원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까 보니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살롱도 있었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

하지만 또다시 내 시선은 자연스레 에르네스트의 왼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온천에 집어넣고 싶다는 충동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

이거 약간 위험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마치 한 소리 하듯 리처드가 말했다. 물론 그 대상은 내 쪽이 아니었지만.

“중증이네 진짜. 여기까지 와서도 곡 쓴다 소리 하고 있냐?”

“생각났을 때 해야지.”

“어차피 안 잊어버리잖아. 넌 기억력 좋으니까.”

“……잊어버릴 때도 있어.”

괜한 시비 좀 걸지 말라는 듯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런 것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가늘게 눈을 뜬 채로 리처드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정 음악 할 거면 그거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뭔데?”

“운동하러 가자.”

“어?”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소리인가 싶다. 아까 에르네스트의 말에 놀랐다면, 이번엔 정말 아연실색하게 된다.

운동 같은 걸 해도 되나? 물론 사람이 그렇게 쉽게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떨리는 건 별개였다.

난 지금 그 무엇이든 조심스레 눈치를 보곤 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할 뿐이지.

그러나 리처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정말 태연하게, 사람은 유리나 설탕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듯 강하게 말했다.

“너 어차피 재활해야 하잖아. 아까 보니까 체육관 있더만. 가서 운동해.”

“방에서 해도 돼.”

“그럼 무슨 재미냐? 그리고 체육관에서 해야 능률이 오르지.”

“…….”

재미란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이미 그가 리처드에게 설득되었다는 건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리처드는 지금 그의 재활을 지켜보고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대충 알아들었으면 따라오라는 듯 아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자. 아, 한승우. 아나톨리. 너희도 따라와. 가볍게 땀 좀 흘리게.”

“결정된 거냐?”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묻자 리처드가 짧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우린 열일곱 살 아니냐?”

지금 정말 필요한 건 사실 저런 도움이었을 터다.

난 내가 하지 못한 걸 용기 있고 태연하게 해준 리처드에게 정말 감사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남자애들을 이끌고 가다 말고 휙 돌아서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은 하고 가야겠다는 듯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너도 우리나 이 자식 눈치 볼 것 없어.”

“……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호스트잖아.”

내가 계속 생각이 많았다는 걸 그는 예리하게 알아본 것이다.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처드는 그제야 고개를 흔들거리더니 다시 뒤돌았다.

루슬란 오빠도 재미있어 보이는지 리처드를 따라갔다. 앞서가는 남자들을 보며 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녀도 스포츠나 운동에 꽤 재능이 많았으니까, 지금 저기 끼어도 이상할 건 없다.

“저희도 체육관에 갈까요……?”

“아니, 난 땀 흘리기 싫어.”

하지만 그녀는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발렌티나나 류보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이렇게 네 명이 할 만한 걸 떠올려봐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