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8화
오전에 안내받았던 체육관으로 리처드가 앞장섰다.
규모가 꽤 크고 옆의 피트니스 시설과 함께 있어서 찾는 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혹시나 싶었는지 옆에 따라붙어 있던 베니아민은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은 이만 자리를 피해 줄 테니 필요하면 불러 달라고 한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
“…….”
에르네스트는 얼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사실 기분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분명 리처드가 한 말은 옳다. 특히 지금 이곳에 놀러온 건 기분전환도 하고 재활과 치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타티아나가 신경 써준 덕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막상 타티아나가 생각 이상으로 아직 예민한 상태라는 걸 느끼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호자를 자처하며 따라온 루슬란에 대해서도 약간 신경 쓰였다.
에르네스트는 이전에 빅토르와 이야기한 이후로 베르체노프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의식하게 되었다.
자신이 아랑곳하지 않는다 해서 정말로 아무 상관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지금 스스로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 에르네스트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베르체노프의 사람들은 말을 굉장히 아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일단 환자 비슷한 것으로 보일 것이란 점이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루슬란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도 많고, 곡을 쓰고 싶다는 것도 진심이었기에 에르네스트는 체육관에 도착하고 나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을 보니 운동 도구들도 정말 많았지만 지금 그가 쓸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러닝머신 같은 걸 타도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 제대로 뛰기 어렵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에르네스트는 근처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멀쩡한 사람들은 알아서 놀아주었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
가만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어쩌면 타티아나가 느꼈을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면서 묘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를 대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던 중, 리처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져서 에르네스트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지금 그 누구보다 에르네스트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 팔은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건데?”
모두가, 특히 타티아나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이런 태도가 상대하기 편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묻는다고 해서 상처받거나 멘탈이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는 삐걱거리는 팔을 움직여보았다. 여전히 저릿한 고통이 익숙하지 않다.
“어느 정도를 뭐 어떻게 말해줘야 하냐? 백분율로? 아니면 용도로?”
“둘 다.”
“글쎄. 5퍼센트? 할 수 있는 건 재활.”
말해놓고 보니 약간 공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는 짜증나는 녀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증스레 대해 마땅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리처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허리를 짚으며 말했다.
“뭐든 좋아. 그러면 재활 해 보자. 심심하지 않게 옆에서 놀아줄 테니까.”
“난 혼자 하는 게 좋은데.”
“그럴 거면 여긴 왜 왔냐?”
리처드가 말하는 여기는 이 체육관이기도 했고 여행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함께하기로 했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약해진 모습을 다른 누구에게 보이는 것이 꺼려질 뿐이었다. 재활 훈련 같은 건 더더욱.
옆을 보니 한승우는 벌써 사샤, 아나톨리와 함께 있었다.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 배드민턴 채를 가지고는 2:1로 상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운동신경은 좋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루슬란은 시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사실상 주인이나 다름없으니 알아두고 싶은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
에르네스트는 리처드도 저쪽 어디든 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재활 훈련을 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리처드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밴드가 하나 필요한데.”
“밴드? 내가 드럼은 좀 치는데.”
“헛소리 좀 하지 말고. 고무로 된 밴드 말야.”
대체 저런 말장난을 왜 들어줘야 하나 후회할 때였다.
리처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루슬란에게 향했다. 그리고 마치 맡겨놓기라도 한 듯 물었다.
“루슬란. 혹시 고무 밴드가 있다면 쓰고 싶은데요.”
“아까 저기서 본 것 같은데…… 잠깐만.”
루슬란은 루슬란대로 갑작스러운 부탁에 눈썹을 까딱이긴 했지만 그래도 친절하려고 노력하는지 직접 움직여서 운동 도구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을 도구들을 뒤적거리더니 파란색 고무 밴드를 찾아낸 루슬란은 그걸 들고 에르네스트에게 다가와 건네주었다.
“혹시 다른 것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필요하다고 하자마자 루슬란이 직접 움직이는 걸 본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을 꺼내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루슬란은 밴드를 건네주고 나서도 다시 돌아가지 않고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뭘 하는 건지 보여달라는 것 같았다.
그만 되었으니 가보셔도 된다고 할 수도 없는 터라, 대신 그는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그는 마치 잘했지 않냐는 듯 웃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이 고무 밴드를 당겨서 새총처럼 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왼팔에 힘이 들어가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평소 하던 재활 훈련을 시작했다.
“그냥 이렇게…… 당기는 게 다야.”
“오호.”
“그렇게 보고 있으면 재밌냐?”
“아니, 전혀.”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졌다.
리처드는 아예 자리를 뜰 생각이 없다는 듯 말했다.
“난 중간감시자 같은 거라서. 네가 재활도 잘하고 있다는 걸 봐 둬야 할 것 아냐?”
“봐 둬서 뭐 할 거냐고 대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나서야 눈치챘다.
중간이란 말인즉슨 그 위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었다.
“타티아나에게 보고해야지.”
“그걸 왜 네가…….”
어이가 없어서 물어보려 하던 차였다.
가만히 옆에서 보고만 있던 루슬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이 상황의 모든 중심이 그에게 향했다.
그런데 그가 부른 건 에르네스트가 아니었다.
“듣다보니 예전 일이 생각나는데. 리처드.”
무슨 일인진 몰라도 루슬란은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가 돌아보자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타티아나의 손목을 다치게 한 적 있었지?”
“하하하.”
“뭐라고??”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리처드는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밴드를 떨어뜨렸다.
예전 일이라는 것은 비단 리처드와 루슬란 두 사람만 아는 일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도 한참 전 기억을 떠올려냈다.
편입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에르네스트를 말 그대로 피아노로 박살 내 버렸던 타티아나가 막상 그 후로는 제대로 된 실력을 잘 못 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였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라 생각했을 때, 갑자기 타티아나는 손목을 다쳤다면서 보호대를 차고 학교에 왔었다.
“기억나…… 그런데 그게 네가 했던 거라고?”
“정확하게는 한승우가.”
“……대체 너희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글쎄, 너도 여기에 있잖아? 너무 흥분하지 마. 지나간 일이잖아. 루슬란도 용서해준 것 같고.”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다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부상 등에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때문에 당시 타티아나가 얼마나 힘겨웠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 일에 대해선 이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에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해주는 건 사실 고마운 일이었지만, 타티아나에게 그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자식 이 정도로 쓰레기였나?’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에르네스트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슬란 역시 리처드의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 것 같았다.
지금껏 그 일을 가지고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오래된 감정이 불쑥 올라왔는지 루슬란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었다고 들었으니까.”
“2주짜리였죠.”
“타티아나가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기도 했기도 하고…… 솔직히 그건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그 예민한 애가.”
그 말엔 에르네스트도 동의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는 그 어떤 상황도 무서워한다.
그 이성적인 면모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은 공포 외에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난 일이라 해도 이 상황에선 미안해하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겠지만, 리처드의 평은 달랐다.
“제가 보기엔 타티아나는 자기 일에 대해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에요. 되레 멘탈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죠.”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그건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괜찮죠? 문제는 이제 여기 이 녀석에게 있고.”
루슬란은 진득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막상 에르네스트를 힐긋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에르네스트의 부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나오는 태도였다.
그렇게 대할 것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루슬란에게 무어라 말하기도 정말 어색했다.
그건 어느 쪽이나 같았다. 이윽고 루슬란은 조용히 이야기하고는 몸을 돌렸다.
“……운동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쉬러 와선 스트레스만 쌓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리처드에게 말했다.
“너네 진짜 또라이들이구나.”
“뭐가?”
“그 애는 예민한 게 맞아. 오늘만 해도…… 그런데 그런 애의 손을 다치게 해 놓고는 뭐라고? 예민하지 않은 것 같으니 괜찮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그렇게 말했어.”
유치한 말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지금 리처드에게 굉장히 실망해 있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그런 그의 표정을 봤는지 리처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오해를 하나 풀자면, 그때 타티아나는 다치지 않았어.”
“……? 무슨 소린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짜증스럽게 바라보자 리처드는 예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한승우와 함께 작전을 짜고 타티아나를 볼링장에 데리고 가선 그대로 병원을 거쳐 보호대를 씌워버린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엔 타티아나 역시 동의했다는 것까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들어도 하나도 이해 가는 것이 없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그 때문에 루슬란은 널 지금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 대 맞았어도 할 말 없는 것 아냐?”
“글쎄…… 타티아나의 그 강한 집념에 잠깐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나도 비슷한 걸 겪어본 적이 있어서.”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단 이유로 사고를 가장해서 피아노를 치지 않고 쉬게 만들어주었단 건가?
그것보단 거기에 타티아나가 동의했다는 것이 더 놀라울 정도였다. 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그 애를 설득한 거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리처드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아무튼 비슷한 상황인 것 같지만 전혀 다르지, 네 상황은. 넌 조금 더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 재활하는 것도 노는 것도.”
이 또한 일종의 휴식이지만 리처드가 타티아나에게 한 것과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하려는 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리처드가 아주 단순한 이유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바로 피아니스트로서 제대로 복귀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어정쩡하게 무슨 작곡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겠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런 말은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렵다. 에르네스트는 곧장 반박했다.
“어정쩡한 게 아니야. 진짜로 일해야 해.”
“왜? 작곡 콩쿠르라도 나가게?”
“그래야지. 올해 놀고만 있을 순 없잖아.”
“……오.”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듯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하던 리처드는 곧 시원스레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오해했네. 어정쩡하다고 말한 건 사과할게.”
“여기서 얼쩡거리는 것도 사과하고 저쪽으로 가.”
“싫어.”
단숨에 잘라 말하더니 리처드는 한승우가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루슬란이 지금 한승우를 표적으로 괴롭히려는 것 같거든. 옆에 가면 표적에 내가 추가되잖아.”
“이제 와서 그런 걱정을 하냐? 그렇다면 사실대로 이야기하든가.”
“그거야말로 이제 와서? 구구절절 이야기하라고? 퍽이나 감동적으로 들어주겠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겐 안 하겠다는 듯 리처드는 단호했다.
그러면서 왜 나한텐 구구절절 이야기한 거야?
정말 하나하나 다 이해가 안 가는 말밖에 없었지만, 지금 더 물어본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떨어져 있던 밴드를 주워들고는 다시 왼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과 무기력함은 그의 머릿속에 바쁘게 도는 생각들과 충돌해서 조금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