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9화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괜히 신경 쓰인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린 말 그대로 휴양하러 온 거잖아. 그럼 얌전히 좀 있을 것이지…….”
불만과 걱정이 한데 섞인 목소리였다. 난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복잡한 심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키로 유명한 이 소치에 와서도 우리가 전혀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건 바로 부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에르네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건 하라고 할 사람이었지만, 사실 스키 자체도 꽤 부상 위험이 있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더 우리가 알아서 자중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
그러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에 리처드는 반발했다. 겁을 먹고 쭈뼛거리고 있는 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그는 에르네스트를 일부러 도발하고는 체육관으로 데리고 가 버렸다. 어떻게든 무언가 하려는 것 같았다.
난 리처드의 진의를 어느 정도 알고, 또 믿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더라도 따라갈 생각까지 들진 않았다.
“활동적인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에르네스트도 같이 재활 훈련을 하시려는 것 같고.”
“사실상 억지로 끌고 간 거였잖아. 리처드가 진짜로 도와줄까? 어떻게 생각하니?”
“어…… 괜찮지 않을까요? 리처드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닌…….”
리처드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이야기하던 난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정말 막무가내가 아니던가? 사실 그는 이미 예전에 내 손목에 보호대를 채운 일도 있었다.
줄곧 지면서도 내기 등을 서슴잖고 하기도 하고.
그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곧장 실행하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진의가 선한 것과 사람이 약간 대책 없는 건 공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조금 불안해져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거보라는 듯 웃었다.
“네가 생각해도 아니지?”
“갑자기 걱정되는데요. 보러 갈까요? 이미 싸우고 있으면 어떡하죠?”
지금 리처드가 에르네스트를 대하는 태도를 두 사람은 서로 딱히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만약 에르네스트에게 참아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리처드가 까딱 잘못하면 늘 하는 투닥거림이 심각하게 번지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거야 뭐 루슬란이 잘 중재해 주겠지. 그 애들은 좀 혼이 나보긴 해야 해.”
오빠는 가급적 우리 일에 참견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래도 보호자는 보호자다.
만약 에르네스트와 리처드가 선을 넘는다면 가만 보고 있진 않을 터였다. 따끔하게 혼내겠지.
그나저나 루슬란 오빠도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인데, 그런 일까지 가진 않았으면 한다.
여러모로 걱정이 들어서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보면 생기지 않을 일이고, 눈에 안 보이면 상관없는 일이야.”
그런 쿨한 태도는 조금 배울 점이 있었다.
난 보고 있어도 걱정이고 보지 않아도 괜한 걱정을 하는 면이 많았으니까. 그런 불안한 마음은 곧 다른 친구들도 금방 눈치채버린다는 것을 이젠 안다.
되도록 생각 자체를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발렌티나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엔 알아서 잘 놀고 있을 것 같은데. 저녁에 되레 지쳐서 다들 일찍 자버리지 않을까 싶네.”
“그럼 좋지. 우리끼리 놀자.”
“지금은 뭐 할까?”
아나스타샤와 나. 그리고 발렌티나, 류보비.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미 난 자유롭게 있어도 좋다고 말한 참이었다. 때문에 이제 와서 무언가 같이 돌아다니자고 하면 내 말을 바로 뒤집는 것이 된다.
하지만 진짜 자유롭게 지낸다면 같이 다니는 것 또한 자유였다. 이미 남자애들은 우르르 몰려가 버린 뒤였다.
잠시 생각하던 류보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까 보니까 도서관이 있던데…… 가 보고 싶어요.”
“도서관?”
“그런 게 있었나?”
“미술관이랑 붙어 있었어요.”
베니아민에게 안내를 받으면서 아버지의 소장품들이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류보비의 말대로 그곳은 거의 미술관이나 다름없는 곳이긴 했다.
“가 볼까요?”
“그러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하나로 맞추어 우린 다시 정문 쪽으로 향했다. 위치는 내가 대략 기억하고 있었으니 헤맬 일은 없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길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군가 입구에서 지키고 있다면 양해를 구해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되레 이렇게 되어버리니 마음대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가 움직이지 못한다. 난 마음을 다잡고 살짝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
“멋지네.”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리며 날 따라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은 공간이 우릴 맞이했다. 아깐 밖에서 베니아민에게 살짝 듣기만 해서 이렇게까지 넓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엔 띄엄띄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누가 관리하는 걸까? 눈에 보이는 구도와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 자체가 이미 진짜 미술관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상당한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 있음이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절로 자세가 진지하게 된다. 난 차분히 앞으로 다가가선 가장 가까이 있는 그림을 마주했다.
“…….”
들판과 양을 그린 그림이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엔 그저 목가적인 분위기의 근사한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더 알고 싶어도 작가 이름이나 제목, 설명 등이 붙어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개인 소장품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그림을 보던 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서 중얼거렸다.
“진품인 걸까요……?”
“너희 집 별장에 위작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발렌티나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잘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그림인 것 같아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일 것 같아. 누굴까?”
“생각나시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글쎄, 모네?”
“전혀 아니잖아요.”
모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다. 발렌티나는 그냥 말해본 것이라면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우린 이름 모를 작가의 이름 모를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저마다 나름의 평을 하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느끼는 어떠한 기쁨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작품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작년에 네 음반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예?”
“그렇잖아?”
느닷없는 발렌티나의 말에 난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마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방식 자체는 같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소장할 정도의 작품들과 제 음악이 같은 선에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너희 아버지는 네 음악을 더 소장하고 싶어 할 것 같은데?”
“…….”
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고, 발렌티나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나스타샤도 처음엔 별생각 없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꽤 진지한 태도로 감상 중이었다.
삐딱하게 서선 한 팔로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론 턱을 만지며 그녀가 말했다.
“유리 아저씨 취향이 참 고풍스러우시네.”
그녀는 아버지와 이야기나 취향 등이 잘 맞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이번에 이 그림들을 감상한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서 아버지와 이야기한다면, 아버지가 꽤 기뻐하실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역할은 아나스타샤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무엇이라도 하나 이야기해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때문에 조금 더 집중해서 그림들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기억에 넣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서, 우린 이어진 다음 섹터로 넘어갔다. 분명 같은 방이긴 했지만 옆과 분명히 분리되어 있었다.
“진짜로 도서관도 있었네. 한 권씩 골라서 저기 앉아서 보면 되겠다.”
아예 책을 볼 수도 있게 책상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가끔 아버지와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서 독서를 하며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린 책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처음 보이는 책들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발렌티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거 어느 나라 말이야?”
“프랑스어네.”
다재다능한 아나스타샤는 그 언어들을 알아보긴 했지만, 그래도 읽는 것까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옆엔 러시아어로 된 책도 있었다. 하지만 유심히 책장을 보며 옆으로 가봐도 쉬운 책은 보이지 않았다.
경제나 경영은 물론이고 외교, 정치, 역사, 문화 등 정말 여러 분야에 걸친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교양 삼아 볼 수 있다기보단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냄새가 난다.
우린 허공에 손가락 끝만 까딱이면서 한 권도 마음대로 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
이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한 권도 볼 용기가 나는 책이 없다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난 철학과 심리학에 관련한 책들을 보다가 그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심리학이라면 그래도 조금 흥미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옆엔 음반들이 종류별로 있었는데, 클래식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옛날 가수들의 음악인 것 같았다.
난 굳이 그것까지 살펴볼 생각은 들지 않아서 책을 쥐고 돌아섰다.
그런데 어떻게서든 한 권 집어낸 나와 달리 류보비는 조금 당황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도서관에 오고 싶다고 했던 건 그녀였으니 한 권 정도는 읽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어린 그녀가 보기엔 책들이 너무 어려웠다.
난 그 옆에 다가가선 살며시 말했다.
“책들이 조금 어렵네요.”
“언니도 어렵게 느껴요?”
“당연하죠.”
그간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배워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며 난 싱긋 웃었다.
“우리 조금 더 같이 찾아볼까요?”
“네.”
아버지가 읽는 책들이라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으면 한 권 정도는 분명 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난 조금 더 천천히 책장을 살폈다.
그리고 조금 위쪽에서 소설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아버지가 문학에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그중에서도 읽을 만한 건 톨스토이였다. 난 단편집 한 권을 뽑으며 류보비에게 물었다.
“톨스토이는 어떤가요, 류보비. 이미 읽었나요?”
“몇 개 정도…….”
중얼거리던 그녀는 책을 받아 들더니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이거 재미있겠다. 이거 볼게요, 저.”
“잘되었네요.”
그렇게 우린 책 한 권씩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갔다.
이미 발렌티나는 책을 고르는 걸 포기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다가오는 우릴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너희는 책 보게?”
“예. 아나스타샤는요?”
“저쪽 보니까 음반들이 있어서, 그거 구경하려고. 혹시 들어봐도 될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지금 전화로 묻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의 수집품이겠지만…… 누군가 듣지 않는 음악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아나스타샤가 들어준다면 그제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조금 편하네.”
아나스타샤는 밝게 웃더니 의자를 탁 차고 일어섰다.
“오픈된 것들만 얌전히 들어보고 되돌려놓을게. 유리 아저씨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알겠어요.”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책장 옆에 있는 음반들 쪽으로 향했고, 발렌티나는 우릴 보더니 책상에 반쯤 엎드렸다.
“난 그냥 놀다가 잘 것 같아. 졸려…….”
정말 엎드려 자더라도 상관없긴 했다. 물론 편하게 쉬길 바라긴 하지만, 발렌티나라면 분명 지금 이게 가장 편하다고 할 테니까.
난 각각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자고 하긴 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그리고 이 안정감은 학교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문득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가 싶어 옆자리에 앉은 류보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쩐지 스터디룸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류보비.”
“그러게요.”
류보비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역시 우린 비슷한 생각을 한 것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