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40화 (940/1,277)

##  940화

류보비는 평소 국어 성적도 좋고 책을 읽는 속도도 빠른 편이라 톨스토이의 단편도 곧잘 읽었다.

물론 간혹 모르는 단어나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장면 등이 나오면 내가 옆에서 설명해주긴 했지만, 그렇게 설명해주면 바로바로 알아듣고 그다음부턴 묻지 않는다.

가르칠 보람이 있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단편 하나를 다 읽고 나니 1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류보비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자 음악을 듣고 있던 아나스타샤도 허리를 일으키고는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슬슬 그녀도 음악 감상은 이쯤 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만 나갈까? 남자애들 뭐 하고 있는지도 궁금한데.”

“그럴까요?”

아깐 아나스타샤도 별 관심 없어 보였고, 바로 따라가자고 하지도 못했지만 사실 난 그쪽 상황이 꽤 궁금한 상태였다.

게다가 아마 아무것도 하지 못할 에르네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재활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만으론 아무래도 또 어두운 생각이 든다. 난 일단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아나스타샤와 류보비가 자연스레 내 옆에 따라붙는다.

“발렌티나는? 여기 두고 갈까?”

아까 놀다가 한숨 자겠다고 했던 창가 근처 햇살이 드는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리 춥진 않지만 그래도 저대로 두었다간 감기가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냥 두고 갔다간 아마 난리가 날 테고.

“무슨 말씀이세요. 깨워야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시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요?”

“울어야지.”

“…….”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류보비가 그런 건 자기 역할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웃기만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몇 번 이름이 들렸던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발렌티나의 귓가에 닿은 모양이다.

“뭐야…….”

웅얼거리며 눈을 뜬 발렌티나는 우리 쪽을 보더니 대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미술관이자 도서관인 곳에서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 좀 자자.”

“네가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하지 않니?”

“뭐가?”

“……됐어. 일어나, 발렌티나. 나가게.”

“잘 거면 나가래?”

비몽사몽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발렌티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 보니 안이 너무 건조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림이나 책을 보호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체육관으로 갈까 아니면 먼저 카페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실까 생각하다가, 어차피 카페로 가는 길에 체육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그쪽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체육관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친구들과 마주쳤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저도 가르쳐줘요.”

“저도요. 저도.”

묘하게 한승우가 인기 만점인 것 같다.

아나톨리와 사샤가 거의 한승우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함께 운동을 하면서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준 모양이다.

그 옆에 있던 오빠가 먼저 날 발견했다.

“아, 타티아나.”

날 부르는 소리에 다른 친구들도 이쪽을 바라본다. 난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뜨거운 열기가 확 느껴져 온다. 리처드가 땀 좀 흘리러 가자고 했던 말을 지킨 모양이다.

그에 비해 오빠는 뽀송뽀송한 편이었다. 그냥 구경만 한 걸까? 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방금까지 있다가 나오신 건가요?”

“응.”

“뭐 하셨는데요?”

“난 시설 점검. 다른 애들은 알아서. 저기 있는 승우란 애는 애들이랑 잘 놀아주더라.”

“그랬나요?”

은근히 평가가 좋다. 다른 사람을 평할 때 차갑고 단호한 면이 있는 오빠답지 않게 오늘 좋은 모습을 본 모양이다.

뭘 하고 놀았는지 물어보니 아나톨리와 사샤가 앞다투어 한승우의 대단한 점들을 열거했다.

너무 빨라서 무어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잘 지내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내 시선은 그 옆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난 분명 체육관으로 모두를 이끈 리처드야말로 앞장서서 무언가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역시 오빠처럼 땀을 흘리지 않았다.

되레 에르네스트가 이마가 젖어 있었다.

재활 훈련이 꽤 고된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도 잘 모를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하고 있는 건 아까 아무렇지도 않게 에르네스트를 대했던 리처드가 기껏 조성한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었다.

분명히 걱정은 하지만, 그것을 너무 내색하지는 않도록. 되도록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에르네스트. 재활은 어떠세요?”

“좋아. 뭐…… 그거에 대해선 리처드가 봤으니까. 증언해주겠지.”

“증언까지…….”

난 그가 재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때문에 딱히 누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 열심히 했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오늘도 잘 되어 간다는 한마디만 더 해 주었으면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리처드는 증언 대신 핀잔을 놓았다.

“맞아. 네 재활은 네가 해야지. 내가 무슨 옆에서 잘 해라, 잘 해라 응원해야 동기부여 받고 하는 거냐?”

“이런 빌어먹을. 야, 말이 다르잖아.”

“하긴 PT프로그램 같은 게 팔리는 거 보면 네가 이상한 것도 아니지.”

“널 여기 묻고 갈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진심으로.”

살벌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힘이 빠진 기색이다.

아마 안에서도 리처드가 계속 그를 건드렸을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게 다 에르네스트가 보다 재활을 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일환이었겠지만……

안쓰러운 마음을 느끼다가도 내가 그럴 순 없단 생각이 상충하며 마음이 어지러웠다.

마침 리처드와 에르네스트가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해서 난 살짝 물러서며 내 속내를 들키지 않도록 했다.

“…….”

옆을 보니 한승우는 손으로 상의 위쪽을 펄럭이며 아이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덥네.”

“그러게요. 밖은 꽤 추운데.”

“나갈 만한가?”

밖이 꽤 춥단 말에 어떻게 나갈 만하냔 대답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저렇게 땀을 흘린 상태로.

그 부분은 사샤가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지금 나가면 감기에 걸릴 거예요.”

“혹시나 했던 거지.”

“혹시나?”

“러시아잖아.”

“……대답 생각하기 귀찮다고 해서 그냥 러시아잖아 하고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사샤의 말에 한승우는 뜨끔했는지 목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빠마저 웃기는 데에 성공했다.

복도에서 마주하고 시작된 이야기는 조금 길어졌다.

이대로 다 같이 카페에 가서 목을 축여도 되겠지만, 땀을 흘린 상태니 지금은 씻고 싶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선 여러 가지 씻는 방법이 있었다. 샤워도, 목욕도. 심지어 사우나나 온천까지도 모두 가능하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했다.

재활 훈련도 하고 땀을 흘린 상태이니 온천에 들어가기에 적기인 것 아닐까? 지금 제안한다면 누구나 거기에 찬성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리처드가 또 불쑥 끼어들었다.

“뭘 그렇게 봐?”

“아, 음…… 그냥요.”

“설마하니 이렇게 땀 흘리면서 돌아다닐까봐?”

“그,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내가 알아서 먼저 이야기를 했을 텐데…… 괜히 리처드가 끼어든 바람에 난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딱히 누구 잘못이라 할 건 없지만, 그가 밉다.

적을 만들었다는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 리처드는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들 샤워할 거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오빠가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안내했다.

“샤워는 여기 옆 샤워장을 이용해. 갈아입을 옷 가지고 와서 씻으면 될 것 같네.”

“다들 들었지? 가자.”

순식간에 모든 게 정해져 버렸고, 남자애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여기 기다리고 있는 것도 뭔가 우스운 일이다. 난 아무것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카페에 가 있을까?”

“그래요.”

어쩔 수 없이 난 고개를 끄덕였다.

***

소치 여행 첫째 날은 별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다들 첫날이라 그런지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고, 일정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두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데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무래도 휴양이 필요했던 건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모두들 그간의 학업과 연습 등으로 지쳐 있던 심신을 확 놓아버린 모습이었다.

심지어 루슬란 오빠도 저녁 식사를 하고는 잠깐 함께 있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감시하겠다는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물론 감시자가 없어졌다고 해서 우리에게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다 같이 모여 영화도 보고 보드게임도 하며 시간을 보낸 우리는 12시는커녕 11시도 전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첫날이니 급할 것 없단 여유를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찍 잠들었으니 기상 시간 역시 일렀다.

“…….”

눈을 뜨니 새벽 6시였다.

모스크바보다 남쪽이라 해가 일찍 뜨는 곳이지만, 그래도 이 시간은 너무 이르다.

캄캄한 밖에서 막 무언가가 밝아 오려는 조짐이 약하게 느껴진다.

난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스트레칭을 했다. 피아노를 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몸 관리를 하는 것은 내 의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니 잠깐 산책이 하고 싶어져서 외투와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바람이 날 맞이했다. 약간 포근하게까지 느껴진다. 모스크바였다면 분명 영하 10도는 되었겠지…….

가볍게 별장을 한 바퀴 돌까 생각하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람의 실루엣이란 걸 알아챈 나는 살짝 경계했지만, 곧 한승우라는 걸 확인하고는 긴장을 놓았다.

“한승우.”

“아, 일찍 일어났네.”

벌써 한참 전에 일어나서 뛰고 왔는지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난 숄을 여미며 미소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

“날씨 좋네.”

“조깅하고 있었어?”

“응.”

그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대답했지만, 여행지까지 와서 이 시간에 아침 조깅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할 말은 칭찬밖에 없었다.

“부지런하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건강도 중요하니까. 아프면 내 손해잖아.”

“모스크바에 있을 때도 계속?”

“추울 땐 안 했지.”

“잘했어. 그게 좋아.”

다행히 운동을 해도 스스로를 잘 챙겨가면서 하는 것 같다. 한승우는 덩치도 정말 크고 튼튼해 보여서 걱정이 없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진 내가 웃자 한승우는 약간 어색해하더니 이제 와서 말한다는 듯 슬쩍 이야기했다.

“모처럼 좋은데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후후, 기뻐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네.”

“당연하지. 흔히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

여행지로만 보자면 오기 어려운 곳은 아니다. 애초에 올림픽을 열었을 정도로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인 곳이니까.

하지만 바쁜 유학생의 신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먼 곳에 와서 보내는 하루하루의 가치가 여행객과는 분명히 다를 테니까.

그래도 신년을 맞아 며칠 정도는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한승우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어.”

“응? 뭔데?”

“오늘은 소치 시내로 나가봐도 될까? 그런데 어떻게 봐도 걸어서 나갔다 오긴 어려울 것 같아서.”

난 괜히 장난을 걸고 싶어서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수영이라도 하고 싶어졌니?”

“이 날씨에 바다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상식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있지만, 러시아인이라면 겨울바다에 들어가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물론 어제 지나오다가 본 해변에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한승우의 목적은 해변이 아니었다.

“어제 지나오면서 보니까 올림픽 기념관도 있고 박물관도 있고…… 한 번 구경할 만한 곳들이 많더라고.”

“그랬었지.”

“구경하고 사진이나 좀 찍어두고 싶어져서.”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마음이 동했다.

이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휴양을 목적으로 하고 스키나 해수욕은 안 할 생각이라지만, 이 좋은 관광지에 와서 별장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건 조금 아쉽다.

한승우 말대로 사진이라도 찍으면 좋을 것 같다.

“그것도 괜찮겠네. 나도 같이 갈까?”

“어? 그래도 돼?”

“물론이지. 여길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제 보니 아나톨리도 시내에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가고 싶은 사람들 모아서 오늘은 나갔다 오자.”

한승우가 어제 아이들과 놀아준 것도 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그가 하고픈 일을 도와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치 구경을 가자고 하면 몇 명이나 나오려나. 아마 열 명 모두가 되진 않겠지만 책임지고 잘 데리고 다녀야겠단 마음이 든다.

***

아침 식사 시간에 타티아나는 시내로 구경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에르네스트는 별생각 없이 거기에 응하려다가 다시 생각했다.

타티아나와 같이 나가서 한 번 돌아봐도 좋겠지. 어지간해서 그는 타티아나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같이 다니면 분명 좋은 추억이 될 테고.

하지만 그가 옆에 있으면 타티아나가 가끔 불안한 시선을 보내거나 움찔거린다는 것을 느낀다.

그건 팔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눈에 띄는 한 계속 그럴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모처럼 쉬러 왔으니 그녀가 잠깐만이라도 다른 아이들과 걱정 없이 웃으며 지냈으면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소치에서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으니까 이번엔 빠지겠다고 말했다.

물론 올림픽 후에 생긴 수많은 곳들은 전혀 모르지 않냐고 리처드가 물었지만, 그냥 무시해버렸다.

“…….”

그렇게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기로 한 건 타티아나와 한승우, 발렌티나. 그리고 어린애 세 명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도 남았다는 것에 안도를 느껴야 할지 아니면 너희는 안 가고 뭐 하냐고 물어봐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놓친 사람이 한 명 남아있었다.

“에르네스트.”

“……?”

타티아나의 오빠, 루슬란이 그를 불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짓하는 모습에,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이 에르네스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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