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1화
루슬란은 이전부터 에르네스트에겐 정말 멀고도 먼 존재였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후계자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유명인사였던데다가, 사업가인 에르네스트의 아버지는 수시로 그의 담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칭찬하곤 했다.
으레 있을 법한 사고 하나 없이 유능한 면모만 보여준다 했던가?
으레 있을 사고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사업 쪽엔 관심 없이 좋아하는 음악에만 몰두하고 싶었던 에르네스트는 일단 듣는 척이라도 열심히 해야 했기에 아버지가 루슬란의 이야기를 할 때면 본받을 만한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이전부터 가지게 된 관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타티아나와 친해진 후로 루슬란과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느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하네…….’
게다가 지금은 베르체노프가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빅토르를 통해 조금 알게 된 후였다.
그 중심에 있을 루슬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최소가 경계고 최대가 적대이리라.
거기에 대해선 확신이 있었다.
이미 예전에 타티아나와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가 위협을 당하기도 했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에르네스트 역시 똑같은 태도를 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반대로 루슬란 입장에서도 에르네스트를 막 대하진 못하고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바로 왼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심스럽게 여겨진다는 게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서, 차라리 에르네스트는 루슬란과 멀리하길 원했다.
나중에 겉보기나마 멀쩡해지게 된다면 루슬란도 원하는 대로 태도를 취할 테고…… 그래야만 에르네스트도 제대로 마주 설 수 있을 테니까.
“…….”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슬란이 에르네스트를 편하게 내버려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은근히 쳐다본다는 걸 종종 느끼긴 했는데, 타티아나나 다른 친구들이 사라지자마자 루슬란은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괜히 약하게 보이긴 싫어서 똑바로 걸어갔더니 루슬란이 물었다.
“다른 애들은 시내로 놀러 갔던데.”
“전 소치는 예전에 와 본 적이 있어서.”
“두 번 간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어떻게 말한들 변명처럼 들리기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루슬란의 말대로 놀러 나가는 목적이 그저 시내를 탐방하는 데에 그칠 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사진 등을 찍는 것 모두가 여행의 목적인 것이다.
물론 그런 부분에서 에르네스트는 잠깐이나마 자신이 빠져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던 것이지만…… 구차하게 그런 것까지 다 이야기하긴 싫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그리고 아나스타샤나 리처드도 남아 있습니다.”
“그 애들은 어디?”
“글쎄요 저도 잘. 방금 방에서 나와서.”
원한다면 직접 찾으러 다니겠지. 에르네스트는 루슬란과 대화는 이쯤 하고 싶었다. 더 길게 있어봐야 할 말도 없고.
“다시 가볼…….”
“그냥 방에서 계속 있으려고?”
그런데 그의 말을 자르며 이어진 목소리는 은근히 도발하는 면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자리를 뜨는 편이 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무언가가 끓어올라 절로 입을 움직여버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어제 들어보니 미술관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제가 관람해도 괜찮다면 나중에 가볼까 싶습니다.”
“괜찮지. 지금 갈까?”
“……예?”
“지금 가자고.”
경솔하게 내뱉어진 말은 3초 만에 후회로 되돌아왔다.
이제 와서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었다. 당장 할 일이 있다고 해 봐야 바보같아질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루슬란의 뒤를 따랐다.
미술관의 입구는 그리 화려하게 되어 있지 않았다. 되레 그 전의 체육관의 유리문이 더 화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이곳에 들어올 사람을 가리겠단 뜻이다. 아무나 올 수 없는 장소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 별장 자체가 그렇긴 했지만.
“…….”
미술관의 대단함은 둘째 치고 에르네스트는 평소에도 어색해하는 루슬란과 둘이서 관람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심지어 여기 있는 미술품들은 전시용이 아니라 소장품에 가까운 것이라 그런지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때문에 이걸 가지고 무어라 말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림만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색함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져 간다.
그림과 그림을 건너가도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깐 서 있다가 움직일 뿐이었다.
너무 어색하다 못해 기괴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핑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속이 메슥거림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을까 골몰하던 중, 한참을 조용히 있던 루슬란이 말을 걸어왔다.
“어때?”
“어…… 유리 알렉세예비치의 소장품들이겠죠?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네요.”
설마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침묵하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음악에만 자신이 있을 뿐 미술은 전혀 모른다. 감상은커녕 어색한 분위기에 짓눌려서 허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루슬란은 그 말에서 다른 부분을 짚어냈다.
“되게 멀게 부르는군. 아나스타샤는 아버지를 그냥 아저씨라고 하던데.”
“저랑 그 애는 입장이 다르죠.”
“뭐가 다른데?”
“그야…….”
같은 여자애들이니 친구 사이의 거리를 좁혀도 딱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 하지만 지금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간신히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서 그녀와 언젠가 더 깊게 이야기를 해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해보기로 했지만……
사실 그런 모든 관계성을 지금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에르네스트는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루슬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의미한 얼버무림이었다.
“여러 가지로.”
“그래, 다르긴 하지.”
그런데 루슬란은 어쨌든 상관없다는 듯 받아들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그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 양들은 두서없이 들판으로 향해 있었다.
루슬란은 그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선 채로 말했다.
“사실 이렇게 봐도 난 잘 모르겠어. 그림이고 사람이고.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과는 말이 통한다는 거겠지.”
지금 말이 통하고 있긴 한 건가?
에르네스트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판단력을 되살려서 루슬란의 말을 돌이켜보았다.
적어도 루슬란이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한다는 것,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도 어떠한 시험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금 에르네스트는 그런 것에 응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가자니 현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고, 피하자니 앞으로도 쭉 문제가 될 것 같고…….
“이후에 계획은 딱히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온천도 가볼까.”
이번에도 거부하지 않으면 정말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엄습해 왔다.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거절했다.
“저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나중에 언제?”
루슬란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지금 이곳에서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래도 너무 강압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는지 조금 물러진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득하려 한다.
“여기에 있는 온천수는 마체스타의 것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질이 좋아. 하루에 두 번씩 몸을 담그지 않으면 손해지. 특히 네 상황이라면.”
온천이 몸에 좋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안다.
타티아나도 은근히 몇 번이나 권유했었고.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조금 옅어지면 한 번쯤 들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루슬란은 그렇게 하게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제는 그냥 넘겨버렸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들어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후에…….”
“아니, 지금. 어차피 나도 할 생각이었거든.”
지금 들어가기 싫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루슬란의 관심이 자신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상태를 보겠다며 따라오거나 할 모든 상황을 미연에 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루슬란은 심지어 같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냥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네.’
에르네스트는 지금 느끼는 이 어색함보다 백 배는 더 강할 어색함을 예상하며 그냥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럴 땐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한 법이다.
“…….”
지금 타티아나는 다른 아이들과 재미있게 잘 놀고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몇 킬로미터 밖에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온천까진 그리 멀지 않았다. 1층 구석에 있었는데, 단순히 온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욕탕과 사우나, 탈의실 등도 모두 함께 있어서 굉장히 큰 시설이었다.
“이쪽이야.”
두 사람은 목욕탕 쪽으로 가지 않고 대신 그 옆에 있는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병원 진료실을 연상케 했다.
테이블 뒤에 있는 남자는 의사들이 입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유황 온천엔 들어가기 전에 진료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는데, 그 진료를 할 의사인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시죠. 루슬란 님. 스파에 들어가시렵니까?”
“예. 여기 있는 이 친구도.”
“그렇습니까?”
의사는 바로 에르네스트를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차트를 휙 넘겨 보더니 바로 말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인대 재건 수술을 하셨다고.”
이미 어지간한 데이터는 다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루슬란보단 에르네스트를 더 중점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도.
“상태를 좀 봤으면 하니 소매를 걷어 주시겠습니까?”
에르네스트는 별말 없이 왼쪽 소매를 걷었다.
단지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저릿한 고통이 타고 올라온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수술 부위를 이리저리 보던 의사가 물었다.
“수술한 지 얼마 정도 지났습니까?”
“두 달이 조금 넘었네요.”
“흠……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요. 재활은 하고 있습니까?”
“예, 얼마 전부터.”
“잠깐 체크해보죠.”
그리고 의사는 팔을 천천히 굽혀 보기도 하고, 굽힌 채로 악력 테스트를 하듯 악수를 하고 힘을 줘 보라고 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이미 모스크바에서 몇 번 했던 것들임을 떠올리며 하라는 대로 행했다.
진단을 마친 의사는 차트에 무언가 체크를 하더니 말했다.
“이 자국만 봐도 어떤 수술인지 알 수 있죠. 그에 비해 예후는 꽤 좋은 편이군요. 두 달째라면 회복력도 남다르신 것 같고.”
“……그렇습니까?”
“유황 온천은 관절과 인대에 좋게 작용하니 아마 들어가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의사는 에르네스트가 온천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단 주의사항도 잇따랐다.
“대신 치유가 되고 있는 중이니…… 되도록 온천 안에선 가볍게 굽혔다 펴는 운동 정도만 해주시고 입욕은 하루 2회, 그리고 1회 시간은 20분으로 제한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더 오래 들어가 있으면 몸이 녹아내리기라도 하나?
하지만 농담처럼 들어선 안 될 말이었다. 유황 온천은 원래 오래 들어가면 안 된다. 그 성분이 일반적인 물과 완전 다르기 때문이었다.
몸이 푹 늘어질 때까지 쉬는 것이 아니라 테라피의 목적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2회, 20분을 되새기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들어가시죠. 타이시야가 도와줄 겁니다.”
의사가 손을 뻗자 옆에 있던 타이시야란 이름의 여성이 그를 탈의실 쪽으로 안내했다.
이런 온천은 처음이었던지라 에르네스트는 약간 긴장됨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따라 이어지는 루슬란의 진단을 들으며 그 긴장감은 더더욱 고조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