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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42화 (942/1,277)

##  942화

이젠 빠져나갈 길도 없다. 에르네스트는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안내에 따라 옷을 벗어 놓았다.

무슨 온천 하나 들어가는데 의사를 보고 안내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비싼 테라피의 일종이라 생각하면 조금 느낌이 다르다.

“이쪽으로 오세요.”

준비를 마친 에르네스트는 타이시야를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넓고 길게 펼쳐진 복도가 에르네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창문이 길게 나 있어 숲과 먼 경치가 보인다.

복도엔 몇 개나 되는 칸막이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각 칸막이 안에는 원형의 탕들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었다.

그 탕들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잘 해봐야 사람 서너 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넓은 온천탕을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잠깐만…….’

순간 에르네스트의 뇌리에 불길한 예상이 스쳐 지나갔다.

큰 탕이거나 아니면 차라리 개인 욕조라면 그나마 조금 낫겠지만, 저런 애매한 크기의 작은 탕이라면 어쩌면 루슬란과 마주 앉게 될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소름돋는 그 상황에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탕이 작은 거냐고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기색이 느껴졌는지, 타이시야는 수도를 조작하며 그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매번 물을 새로 채워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왜 이 좋은 별장에 있는 탕이 이렇게 작고 여러 개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테라피의 목적으로 쓰이는 유황 온천탕은 여러 사람을 담글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한 명이 들어가서 온천욕을 즐기고 나면 그 물은 그대로 버리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탕이 클 이유가 없다. 쉽게 물을 순환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사이즈면 충분한 것이다.

합리적인 이유를 떠올리고 나니 불만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길한 생각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물은 또 왜 이렇게 녹색인 거야?’

유황이라 했으니 예상은 했지만 지금 탕에 채워지고 있는 물은 깊은 녹색빛을 띠고 있었다. 기묘한 냄새도 난다.

유황 온천은 사실 피부에 좋다고 하지만, 색깔만 봤을 땐 20분 담그면 피부가 녹색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불길한 예상과, 생전 처음 보는 유황 온천을 마주하며 느끼는 기분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며 에르네스트를 어지럽게 했다.

결국 그는 창밖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어차피 해내야 한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천천히.”

잠시 후 타이시야가 적당히 반쯤 채워진 탕으로 그를 안내했다.

에르네스트는 혹시 무척 뜨겁거나 따갑지 않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발을 밀어넣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 뜨겁지 않죠?”

“그렇네요.”

“원래 유황 온천은 뜨겁게 하지 않거든요. 저희는 정확하게 38도를 맞추고 있답니다. 딱 온천수가 체내에 좋게 작용하는 온도죠.”

냄새도 이미 적응해버렸고, 물도 미지근하니 이젠 이게 정말 테라피가 될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타이시야는 진지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물을 가슴 위까지 오도록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고, 안에서 적당히 근육을 푸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등.

그 태도가 정말 테라피 치료사 같은지라 에르네스트도 진지하게 듣고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알려줄 것들을 다 알려준 뒤 타이시야는 20분 후에 오겠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

물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자니 또다시 이게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색적인 휴양지로서 이만한 것도 없었다.

물론 그 평온함은 금방 깨어졌다.

다음으로 루슬란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발 옆 칸이길.’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칸막이 옆에는 이런 작은 탕들이 몇 개나 있다. 그중 하나에 들어가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들어가 있던 탕 앞에 선 루슬란은 잠깐 멈칫하더니 두 번 고민 않고 그대로 그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좁은 탕이 순식간에 더 좁아진다. 에르네스트는 어색함이 흘러넘치는 이 탕 속에서 꼼짝도 않고 밖을 내다보았다.

“물이 식었는데?”

그런데 탕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루슬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원래 유황 온천은 미지근하다고 설명해 줄 타이시야는 나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에르네스트가 대신 설명했다.

“이거…… 유황 온천은 일부러 안 뜨겁게 한다더군요.”

“……그래? 왜지?”

“글쎄요, 일반 물이 아니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에르네스트도 이곳이 처음인데 왜냐고 물어본들 알 리가 없었다.

“…….”

순간 루슬란도 조금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침묵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어쩐지 아까보단 조금 말하기 편해진 기분이었다.

온천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 건지, 루슬란도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그런 건진 알 수 없지만.

여기서 딱 5초만 더 침묵하고 있다간 20분 내내 한마디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20분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아예 미리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루슬란도 유황 온천은 처음입니까?”

“뭐…… 그렇지. 그냥 온천이라면 몰라도.”

역시 루슬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좋은 별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유황 온천을 이용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지금은 에르네스트 때문에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루슬란은 손으로 물을 약간 걷어올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좁고 미지근하고 녹색인가 생각하고 있었어.”

“저도 똑같은 생각 중이었죠.”

“그래, 그렇겠네.”

처음으로 생각이 일치한 것 같단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두 사람의 생각은 아까부터 쭉 계속 같았다.

루슬란은 그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리고 아마 또 다른 것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것?”

“아까부터 쭉 어색하다던가?”

한껏 어색해해도 계속 끌고 다니길래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는가 했는데, 막상 듣고 보니 루슬란도 어색해했던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루슬란은 왜 그렇게 보고 있냐는 듯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아니었나? 나만 어색했던 건가?”

“저도…… 아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 말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루슬란이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르네스트에게 있어선 그의 나이도 입장도 결코 쉽게 대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같은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결국 비슷한 걱정을 안고 있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에르네스트는 무작정 불편하다며 피하려고만 했던 자신을 조금 반성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물속에 조금 더 깊게 잠기면서 수면이 가까워진다.

그런 그를 보며 비로소 이야기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루슬란은 팔을 뒤쪽으로 기대며 천천히 말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난 그냥…… 너한테 인사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인사?”

“그래. 타티아나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이미 꽤 지난 일이다.

사고 직후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직접 와서 감사를 전하기도 했기에 에르네스트는 따로 루슬란에게까지 감사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가족으로서 늦게나마 이 말은 전해야겠다는 듯 루슬란은 말하고 있었다.

역시 그에게도 부채감이 계속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늘 했던 것처럼, 에르네스트는 변함없이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인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옆에 누가 있어도 그리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옆의 누군가가 바로 네가 되었지. 난 결과를 중요시해. 그리고 그 후에도 네가 보여준 태도들은 우리들에게 감사받기에 충분했고.”

그러나 평범하고 쿨한 에르네스트의 태도에 대부분 그냥 납득하는 것에 반해, 루슬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예리한 면모를 보였다.

그 후의 태도라 함은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상심했던 타티아나를 무대 위로 되돌려 보낸 전부를 말하는 것일 테지.

지금 타티아나는 연주회도 잘 마치고 훈장도 받았으며 긍정적인 모습도 꽤 많이 되찾은 후였다.

아직도 에르네스트에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가 꾸준히 회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같이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누가 평하지 않아도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엔 자신있게 말했다.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죠.”

“그 애를 좋아하니까?”

“……!?”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에르네스트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자니 눈앞의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위험이 있었다.

잠깐 머리를 굴리는 사이, 루슬란이 손을 저어 물방울을 튕기며 말했다.

“경계하지 마. 그러라고 말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말해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물고 있자 루슬란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별것 있었다.

“조금 궁금하더라고. 난 네가 그 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아마도 한참 전부터. 아니라곤 하지 않겠지?”

“…….”

“그렇게 보면 이야기가 간단했지. 그래서 타티아나를 계단에서 네가 구했단 말을 듣고도 그리 복잡하지 않게 생각했어. 그리고 이후 있을 일들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나갔다는 것이 네 말대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루슬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생각보다 그리 꽉 막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엔 이보다 훨씬 더 무섭고 예민했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그런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루슬란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예상이 많이 빗나가더라고.”

그러고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온다.

“왜 우리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지? 에르네스트. 충분히 보상하겠단 의사는 이미 충분히 전했을 텐데.”

“……최고급 병실과 의사, 그리고 치료비를 지원해주셨잖습니까?”

“그건 최소한의 피해보상이지. 아주 최소한의. 내가 염두에 두었던 건 그 외적인 것들이야.”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그것이 본능적인 것이든 계산적인 것이든 에르네스트는 베르체노프가의 딸을 구해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단순한 부분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마 에르네스트가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루슬란은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곤란해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 아버지에게 무작정 혜택을 더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사업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도 했으니 얼마든지 방법은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루슬란은 그렇게 경솔하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거기에 대해 답하지 않자 루슬란은 살짝 이야기를 틀었다.

“타티아나도 네가 말만 하면 뭐든지 해주려고 하고 있어. 그걸 모르진 않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왜 되레 거리를 두는 것 같지?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 거야.”

이참에 궁금했던 건 아예 까놓고 물어보겠다는 듯 루슬란이 이어 물었다.

“그 애를 정말 좋아한다면 지금 멀리할 이유가 없고, 그 애가 싫어졌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 의문점은 이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다른 사람이 본다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전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엔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어떠한 고집스러운 감정과 아나스타샤까지 얽힌 복잡한 관계가 함께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슬란은 타티아나의 오빠였다. 말 할 수 있는 건 해야만 했다.

“되레 뭐든지 해줄 것 같았으니까요.”

“뭐?”

죄책감이나 부채 의식을 저울 반대편에 놓고 그 위에 그 무엇을 올려놓더라도 타티아나는 공정하다고 말해주겠지. 하지만 그건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일로 감사받는 것까진 괜찮아도…… 인정받고 싶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말이죠.”

그 미묘한 차이는 에르네스트의 고집이다.

타티아나에게 가지는 감정이나 관계의 형태가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결코 뭉개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전 음악을 좋아하는 타티아나가 좋습니다. 그뿐입니다.”

말을 뱉고 보니 갑자기 창피해졌다. 빤히 바라보는 루슬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지금 온천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상황도, 뱉은 말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렇게 에르네스트가 약간 후회하는 사이, 루슬란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해석을 거친 결론을 질문으로 되돌렸다.

“그 애가 책임감 없이도 널 좋아할지 아닐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는 건가?”

외부에서 보면 그건 정확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기 싫었다.

“그건 아닐걸요.”

“푸하하, 그래?”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 루슬란이 웃었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쉽사리 구분이 안 가서 에르네스트는 일단 말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루슬란은 가볍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그걸 느낀 건 언제부터지? 작년 초부터?”

“작년 초?”

“혹시 모르는 건가?”

“예?”

“그럼 말고.”

에르네스트가 다친 건 작년 말이다. 루슬란은 그것과 연관 짓지 않고 있었다.

작년 초? 에르네스트는 쉽게 무언가 떠올리지 못했다.

타티아나와 있었던 큰일이라면 그녀가 위클리 연주회 후 혼수상태에 빠져서 병문안을 몇 번 갔었던 일 정도였다.

그걸 왜 루슬란이 지금의 대화와 연관 지어 말하는 것인지 에르네스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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