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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43화 (943/1,277)

##  943화

빠르게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면서도 루슬란은 의아해하거나 한심해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가볍게 넘어갈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루슬란에게 캐어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봤자 루슬란은 대답해주지 않을 테고.

때문에 작년 초라는 시기를 뇌리에 기억해두면서 에르네스트는 루슬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베샤스트니흐가는 아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지?”

“예, 이런 좋은 곳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요.”

“그래도 거긴 도시가 좋잖아. 아버지는 딱히 생각이 없으신 것 같지만.”

시사와 문화 등으로 두서없이 오가던 이야기는 부동산에까지 향했다.

에르네스트는 이전에도 루슬란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음을 떠올렸다.

루슬란은 베르체노프의 후계자답게 사회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따라가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적당히 저쪽에서도 맞춰주는 분위기이니 대화를 하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에르네스트의 부상에 대한 이야기나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충분히 예민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오늘은 이 정도로 적당히 하는 편이 낫다고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또 한 번 루슬란과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땐 지금처럼 온탕에서가 아니라 조금 더 차가운 곳일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주눅 들지 않고 되레 반성하며 이후를 생각했다.

조금 난데없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상황이 되어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오늘로 충분했다.

팔도 잘 재활하여 보기에 조심스러워하지 않도록 만들고, 보다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겠네요.”

“……그런가?”

루슬란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시간 감각이 뛰어난 편인 에르네스트는 앞으로 몇 분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들은 루슬란은 그럼 오늘은 이쯤 하자는 듯 허리를 펴며 말했다.

“아무튼, 모처럼 기회가 생겨서 핑계삼아 이야기를 좀 해본 건데…… 사실 이것도 우스운 일이지. 내가 뭐라고.”

“…….”

이제 와서?

단순히 인사만이 목적이었다면 복도에서 마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끌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지금 여기 에르네스트가 있는 건 전적으로 루슬란의 사감이 동반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수준은 불평을 할 정도가 아니란 건 에르네스트도 동의했다.

사실 루슬란이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더 과격하게 할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은 건 에르네스트가 잘해서가 아니라 루슬란이 신중하고 점잖은 사람인 덕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나 싶어 말을 고르고 있는데, 루슬란이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아뇨…… 그냥.”

“어젯밤 기억하지? 내가 시간을 정해놓으라 하긴 했지만 딱히 더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방으로 들어갔었던 거. 난 필요 이상으로 너희들에게 간섭할 생각 없어.”

그는 자신이 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이 정도면 충분히 쿨하기도 했고.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루슬란이 착각하지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다만 이런 건 있는 거지. 시간을 정했던 것처럼 최소한의 지켜야 할 건 있다는 거야. 너희는 아직 학생이니까.”

“학생이긴 하죠?”

“학생이긴 한 게 아니라 학생이라고. 알겠어? 무슨 말인지?”

그 이상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에르네스트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지금 앞질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의 상태도 불만족스럽고, 아나스타샤에게 했었던 말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자 경고도 경고로 들리지 않았다.

되레 지금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뭔가 안심이 되네요.”

“……안심? 왜?”

“글쎄요…….”

“이해 못 할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장난을 치려는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루슬란이 인상을 썼다. 에르네스트는 아차 싶었다.

그런 그를 구원한 건 다시 들어온 타이시야였다.

“20분이 다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어 그녀가 들어오자 루슬란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외부인 앞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함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이전에 빅토르와 이야기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빅토르는 차 안에서 했던 모든 대화들은 단둘이 한 것으로만 쳤다.

타티아나도 은근히 입이 무거운 면이 있었고……. 베르체노프의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서 꽤 진중하다.

거기에 조금 익숙해진 에르네스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슬란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미지근한 물이었는데도 밖으로 나오니 한기가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혹시나 팔이 녹색으로 물들진 않았나 확인했지만 그리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타이시야가 다른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냥 샤워를 하고 끝마치면 되는 것 아닌가 했는데, 안내된 방은 나무로 된 평상이 여러 개 있어 쉴 수 있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당장 샤워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좋은 성분들이 스며들 때까지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생선 말리는 것 같네요.”

“풉.”

타이시야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는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후였다.

그렇게 다시 루슬란과 에르네스트는 방 안에 남겨졌다.

일반적인 사우나나 온천욕이었다면 이대로 밖으로 나가 체온을 오르내리게 하기도 하지만, 이곳은 그냥 유황 온천수를 피부 위에서 말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 같다.

역시 약간 특이한 방식이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평상에 앉았다.

그런데 시설들을 점검이라도 하듯 돌아다니던 루슬란은 갑자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추울 것 같으니 뭐라도 할까.”

“……?”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드니,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자작나무를 묶은 빗자루веник를 들고 있는 루슬란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사우나를 가거나 하면 저 자작나무 빗자루로 온몸을 때리곤 했었다.

피부 건강과 혈액순환 등에 도움이 된다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슬란은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짧게 한 마디만 했다.

“대.”

“잠깐만요, 루슬란…… 우린 사우나 한 게 아닌데요.”

“쓰라고 가져다 놓은 거니까 써야지. 따뜻한 대화의 시간은 끝났어.”

따뜻한 온천욕의 시간이 끝난 게 아니라?

심지어 그리 따뜻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미지근했지.

그런데 루슬란은 잘 대해줄 만큼 대해줬으니 지금부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투였다. 에르네스트는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다.

“움직이지 마. 팔을 때리고 싶진 않으니까.”

“…….”

루슬란이 점잖은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에르네스트는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

***

몸을 말리면서 자작나무 빗자루로 얻어맞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전통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그리 생각한다 한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 좋을 거야 아마.”

“…….”

모처럼 좋은 것이라면 왜 반대로 때리게 해주진 않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럴 만한 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불만을 떠올리던 에르네스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어 봐야 무의미했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는 이쯤 하고 싶었다.

일단 루슬란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슬슬 방으로 돌아가선 점심때까진 나오지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한다는 게 이렇게 피곤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놀러나가지 않고 별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더 있었다. 서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만한 사람들이.

“어머, 뭐 하고 있어요?”

복도 저편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뭔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마침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한 눈빛이다.

에르네스트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볼지 앞서 생각해보았으나,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미리 멋대로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온천에 좀 들어갔다 왔어.”

“아, 온천. 저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어때요? 보통 온천이 아니라면서요?”

“물이 녹색이야.”

“와우.”

아나스타샤는 신기해하면서 루슬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녹색이 되지 않았나 하는 표정이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비슷하구나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다리를 반대로 짚었다.

루슬란과 잠시 대화하던 그녀는 곧 에르네스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같이 들어갔었니?”

“응.”

“와, 좋겠다. 나도 같이 들어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되겠냐?”

“안 될 건 뭐니?”

아나스타샤는 별 유난이라는 듯 말했다. 사실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게 되니까 온수 수영장이라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어차피 사우나 등은 다 같이 들어가기도 하고, 더군다나 이곳엔 칸막이가 쳐져 있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그녀가 원하는 건 온천이 아니라 대화 그 자체임을 느꼈다.

게다가 그걸 에르네스트가 인지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으면서도 괜한 장난을 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퉁명스레 대꾸했다.

“들어가고 싶다면 나중에 타티아나가 오면 그 애랑 가.”

“어? 그래도 돼?”

그럼 되지 그거야말로 안 될 건 뭐냐고 하려던 에르네스트는 멈칫했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샤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루슬란은 슬슬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올라가볼게. 할 일이 생각나네. 둘이 이야기하고…… 점심은 어떻게 할래?”

“글쎄요, 식당에서 다 같이 먹을까요?”

“그래. 그러면 1시쯤에 식당에서 보자.”

“그럴게요.”

계단으로 향하는 루슬란에게 손을 흔들어준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엔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걱정과 궁금증, 그리고 부러움까지.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말로 하지는 못했다.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뽀송뽀송해졌네?”

“…….”

갑자기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확 부끄러워짐을 느끼며 그에 반발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이런 곳에서 서서 이야기하진 말자는 듯 복도 쪽으로 손짓했다.

“온천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갈증이 날 텐데, 가서 카페에서 뭐라도 한 잔 마시자. 나도 목말라서 나왔어.”

“그래.”

아무래도 방으로 돌아가는 건 조금 더 후가 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이전까지의 대화들을 되짚어보면서 아나스타샤가 만약 궁금해한다면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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